성명 | 천성환(千成煥) |
생몰 | 1917년 6월 22일 ~ 1954년 1월 27일 |
출생지 |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 (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1]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천성환은 1917년 6월 22일 경기도 용인군 모현면(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고성군 고성면 동리(현 강원도 고성군 구읍리)로 이주하였다.그는 1937년 고성보통학교 훈도로 근무하였으며, 1938년부터는 고성남심상고등소학교 훈도로 근무하였다. #
1938년 6월 26일 강원도 고성군 고성면 율대리에서 김종희(金宗熙)·황동현(黃東鉉) 등과 함께 일제의 한민족 말살정책에 대항하여 독립정신을 함양하려면 한글을 보급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하고 비밀결사 고성민족문화연구회를 조직했다. 또한 자신이 담임 교사를 맡고 있던 고성남심상고등소학교 학생 70여 명에게 "조선어는 조선인의 생명이다"라고 강조하면서 1주일에 1시간으로 제한되어 있는 조선어 교육시간을 4∼5시간으로 임의 배정하고 일인화(日人化) 교육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1940년 1월 1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
그러나 1939년 3월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40년 6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형(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 공소하였으나, 9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원심 미결 구류일수 중 120일 및 2심 미결 구류일수 중 40일 본형에 산입)을 언도받고 # 다음날인 9월 25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42년 4월 17일 출옥한 이후 # 조용히 지내다 1954년 1월 2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천성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194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의하면, 용인군 모현면 오산리가 출생지/본적지이고 고성군 고성면 동리는 주소지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