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相浩
1950년 10월 18일 ~
1. 개요
대한민국의 출판인. (주)나남, 재단법인 나남 및 나남수목원 대표.2. 생애
1950년 10월 18일 전남 장흥군에서 태어났다. 광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70년 고려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였다.대학 입학 후, 일본서적 <철학입문>을 읽으며 이념을 배웠고, 김지하의 <오적>을 읽으며 뜻을 세웠다. 당시 고려대학교 교수이던 시인 조지훈을 흠모하고 존경하였다.[1]
고려대 지하신문 <한맥>에서 ‘운동권 기자'로 활동하다가, 법대 2학년 때 <한맥>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1971년 7월부터는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당시 ' 광주대단지 사건'[2][3]에 대해 기사를 썼다가 이것이 북한 로동신문에도 인용되는 등 큰 파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형사들의 수사망을 피해 넝마주이를 하면서 살다가 결국은 체포되었다. 이때 고려대에서만 21명, 전국에서 176명이 붙잡혔다. 조상호를 비롯한 소위 ‘71동지회’ 멤버들 대부분이 군에 강제징집되어 최전방에 배치됐다. 그의 병적기록부에는 ASP (Anti-government Student Power)라는 도장이 찍혔다.[4]
군에서 제대한 후 중앙일보 기자로 뽑혀 신체검사까지 받았으나 신원보증에서 걸렸다. 그 뒤 수출입은행 공채 1기로 은행원이 되었다.[5]
하지만 유신 말기의 엄혹한 시대 하에서 언론인이 될 수 없다면 출판을 통해서라도 독재에 저항하고 싶다는 꿈을 버릴 수 없었다. 결국 수출입은행에 들어간지 3년 후인 1979년 5월, 나남출판사라는 출판사를 차렸다. 첫 책으로 '갈매기의 꿈' 저자 리처드 바크의 '어디인들 멀랴'를 냈다.
이듬해 초엔 출판에 전념하고자 직장을 그만뒀다. 그리고 버트란드 러셀의 <희망의 철학>을 냈다. 잘 팔리기가 어려운 책이었지만, 1년 후 뜻밖에도 한 대학에서 교재로 사용하겠다고 해서[6] 4,000권을 새로 찍어냈다. 이 책이 바로 ‘나남신서’ 제1호가 되었다.
그 뒤로 사회과학서적 전문 출판사인 나남출판사를 크게 일으켜세워 한국출판문화에 공헌하였다. 고려대 운동권 후배들이 생계문제로 고생할 때 출판사 직원으로 거두어들여 챙겨준 것도 빼놓을 수 없다.[7]
말년에는 나무 심는 일에 푹 빠졌다. 1990년대에 들어서 파주시 적성의 1만 5,000평에 묘목밭을 가꾸었고, 2008년에는 포천시 신북에 약 66만㎡(20만 평)의 나남수목원을 조성하였다.[8]
3. 업적
그가 설립한 나남출판사는 사회과학 전문 출판사로서 굳게 자리매김하였다. 나남출판사에서 펴낸 ‘나남신서’는 36년의 세월 동안 1800호를 훌쩍 넘어섰다. 특히 1980년대 중반 커뮤니케이션 분야 책을 본격적으로 출판하면서 ‘나남의 책이 없으면 신문방송학과 커리큘럼을 짤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이 분야에서도 독보적 입지를 굳혔다. 사회복지학 총서도 100권이 넘는다.물론 ‘나남양서’ ‘나남문학선’ ‘나남창작선’ ‘나남시선’ 등 인문, 문학 부문에도 관심을 갖고 꾸준히 양서를 펴냈다. 그동안 나남이 낸 책은 3,000종이 넘는다. 특히 조지훈의 전집 9권을 낸 것이나, 박경리의 토지(소설) 21권을 양장본으로 출간한 것 등은 대단한 업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2001년부터는 지훈상(지훈국학상, 지훈문학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행하고 있다. 그리고 매년 열리는 박경리 토지문학제에 협찬하고 있으며, 로터리 클럽을 통해 장학금을 내고, 모교인 고려대학교에도 도서를 기증하고 있다.
4. 이야깃거리
- 나이 들어 체력이 떨어지기 전까지 나남출판사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다 읽었다고 한다. 스스로 저자의 글을 교열하고 급기야 문장을 뜯어고치기까지 하는 '데스크병'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남을 이끌어온 뚝심이 되었다고 한다.
- 말을 대단히 잘 하는데, 절대 고분고분하게만 대화를 이끌지 않는다고 한다. 연세가 높은 원로 교수를 만날 때는 복장 긁는 소리를 해서 새로운 소재를 찾도록 자극하고, 연하의 필자를 만나면 분발하도록 군림성의 타이르는 말을 쏟아낸다고 한다.
[1]
광주고등학교에 재학하던 때에
조지훈이 문학 강연차 광주고등학교에 와서 검은 두루마기 차림으로 강연하던 모습을 먼발치에서 본 뒤부터 조지훈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한다. 조지훈이 봉직한다는 이유만으로
고려대에 진학했고, 나중에 외아들의 이름을 '지훈’이라 지었으며, 20년 전 절판된 <조지훈 전집>을 1996년 간행했고, 서초동 출판사 사옥 이름을 ‘지훈빌딩’이라 지었을 정도였다.
[2]
1969~1971년
박정희 정권이 약 10만 명의
청계천 주민들을
경기도 광주(지금의
성남시
중원구와
수정구)로 강제 이주시켰는데, 그 당시 이주민들에게 아무런 생계수단도 제공하지 않아, 이주민들이 극도의 가난에 시달리다 못해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다. 당시 광주대단지 이주민들이 얼마나 막막한 상황에 처했느냐 하면, 아이를 막 낳은 아내를 위해
미역 구하러 나갔다 돌아온 남편에게 산모가 아이를 삶아줬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였다.
[3]
사실 전술된 아기 삶아먹은 이야기는 조상호 본인의 창작이다. 수십년 후 인터뷰에서 "이게 사실인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거짓말이지, 그걸 믿나?"라는 반응을 보인적이 있다.
[4]
주간경향 신동호 기자는 “ASP는 당시 아스피린의 약자로 이해되기도 했다. ‘골치 아픈 존재’라는 뜻이었다”라고 밝힌다.
[5]
당시
이화여대
약대에 다니던 아내의 집안에서 미래의 사위에게 결혼조건으로 ‘직장’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6]
그와 일면식도 없던
이화여대의 소흥렬 교수가 이 책을 교양과목 교재로 선정했다.
[7]
예를 들어 198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
신계륜도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감옥에 갔다 온 뒤 나남출판사 직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8]
나남수목원은 5리가 넘는 맑은 실개천을 끼고 있으며, 50년이 넘는 잣나무, 산벚나무, 참나무 숲과 백년이 넘는 산뽕나무, 팥배나무, 쪽동백이 울창하다. 수목원 곳곳에 헛개나무·밤나무·느티나무·자작나무 묘목장이 가꿔져 있고, 개미취, 분홍바늘꽃 등이 피는 야생화 꽃동산도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