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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07 07:50:57

조규하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의병부대를 모집하여 함께 활약한 의병장이다.

2. 생애

평소에 우국지사적 소양을 길러왔으며, 을사늑약 이후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최익현과 임병찬 등이 전라도 태인[1]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태인의병은 봉기한 지 열흘도 못 되어 해산하고 말았다. 조규하는 직접 의병을 도모하기 위해 인근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을 만나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봄 전라남도 곡성군 출신의 신정우 등과 협력하여 의진을 결성하였다.

조규하, 신정우 등은 조계산에 근거지를 구축한 후, 순천, 곡성, 구례 지역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예컨대 조규하 의병부대는 1908년 4월 일본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전라남도 구례 계사리(季肆里)에서 수비대와 교전했으며, 곡성 출신의 노인선(盧仁先)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곡성 죽곡면(竹谷面) 동계리(桐溪里)에서 일본 군경과 싸우기도 했다. 1908년 5월에 이르러 조규하 의병부대 약 40명은 전라남도 순천군 송광면 낙수장(洛水場)에서 순천경찰서 순사대와 격전을 벌이다가 화승총 4정을 빼앗겼으나 인명피해는 없었다.

조규하의 의병부대는 1908년 6월에 남원 출신의 전규문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즉, 이들은 곡성의 죽곡면 하도리(下道里) 마륜산에서 광천수비대를 요격하여 2명을 살해하는 전과를 올린 것이다. 한편, 이들은 일진회(一進會)와 같은 친일주구배(親日走狗輩)를 처단하고, 전라남도 동부지역에 진출한 일본 이주민들을 공격하였다. 1908년 9월 19에서 20일 사이에 조규하 의병부대 약 100명은 곡성군 목사동면(木寺洞面) 선주산(仙住山)에서 일제 군경의 기습을 받아 조규하를 비롯한 약 26명이 전사하고 말았다. 한편 조규하 의병장이 전사한 후 신정우가 잔병을 수습하여 의병항쟁을 이어갔다.

1908년에 사망하였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1] 현 전라북도 정읍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