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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20:57:54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

1. 개요2. 상세

1. 개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일어났던 두 번째 라이베리아 내전이다.

2. 상세

He killed my ma,
he killed my pa,
but I will vote for him.

그는 우리 엄마를 죽였다.
그는 우리 아빠를 죽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투표할 것이다.
찰스 테일러가 97년 대통령 선거에 내건 구호.[출처] 해석하자면, '그는 전쟁을 일으켜서 우리 부모님을 죽였다. 그가 져서 전쟁을 일으키면 이번에는 우리가 죽을 차례다. 우리는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를 뽑겠다'는 뜻.
찰스 테일러가 선거에서 자신이 지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사실상 공갈 협박을 대놓고 하며 어찌어찌 대통령으로 집권했지만, 라이베리아 내전은 해결되지 못한 채 결국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 터졌고 라이베리아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되어버렸다. 자세한 내막은 찰스 테일러 문서 참고.

테일러는 집권한 지 1년만에 UN 평화유지군을 추방시켰는데 그 이유는 내전이 끝났으니 평화유지군이 필요 없다는 논리였다. 이에 임무 완료를 선언했던 UN은 이의 없이 철수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 테일러의 미친 짓이 시작된다. 1999년 테일러는 시에라리온에 ‘ 혁명연합전선(Revolutionary United Front)’이라는 이름의 무장 집단을 조직하여 시에라리온 내전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여기에 테일러는 라이베리아 전사들을 이 혁명 연합 전선에 보내서 용병으로 참여하게 하여 시에라리온의 도시를 파괴하고, 약탈하거나 민간인 살해를 자행했는데 이 일들을 벌인 이유는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에 있는 다이아몬드를 손에 넣기 위한 것이였다. 물론 반군을 훈련시키고 지원하는 데에도 역시 다이아몬드 밀무역을 통해 얻은 자금이 투입되었다.

한편 대통령이 된 찰스 테일러가 대통령이 된 이후 공권력을 이용해서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정적을 탄압하는 폭압정치를 펼치자, 새뮤얼 도랑 다를 바가 없다며 테일러에 대한 비난 여론이 높아져 갔고, 무엇보다도 테일러가 시에라리온 내전에까지 개입하며 무자비한 전쟁범죄를 저지르자 국제사회에서도 그에 대한 비난여론이 갈수록 거세져갔다. 결국 라이베리아 내 불만세력들이 2000년 2월에 시에라리온에서 ‘화해와 민주주의를 위한 라이베리아인 연합(Liberians United for Reconciliation and Democracy, LURD)’을 결성하며 내전을 재개했는데 이를 제2차 라이베리아 내전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시작된 내전은 2001년부터 정부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혀 서서히 테일러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 반군들도 막장이 따로 없어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 국경지대는 반군에 의한 무자비한 강간과 약탈 그리고 온갖 잔학행위가 벌어지며 황폐화되었다. 한편 반군은 여러 지역을 장악해나가며 2003년에 이르러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까지 공격하였고, 이즈음 새로운 반군집단 ‘라이베리아 민주 운동(Movement for Democracy in Liberia, MODEL)’이 출현하면서 사태는 더욱 복잡해졌다. 이에 2003년 6월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으나 잉크가 채 마르기 전에 다시 내전이 일어났고 LURD는 몬로비아에 대한 무차별 포격을 감행해 1,000여 명이 사망하고 45만 여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특히 2002년과 2003년에 벌어진 2차 라이베리아 내전은 가장 치열한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수많은 아이들에게 마약을 주고 총을 쏘게 하였고, 반군들은 길에서 눈에 띄는 대로 사람들을 사살했다. 정부군 혹은 반군이 되어도 같은 편이 아니면 언젠가는 총을 겨누기 때문에 내전에 참여하기 싫어하는 사람은 다 죽였다. 내전 중반 군이 항구를 점령하면서 도시로 양식이 반입되는 것을 막아 몬로비아 시민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고, 차와 설탕으로 끼니를 때웠다. 찰스 테일러가 몰락하기 전인 2003년에는 의사회 본부에서 보내 온 구호품을 통째로 약탈당하고, 임시로 지은 진료소에서 쫓겨나는 일은 다반사였으며, 진료소에는 늘 환자와 강간으로 인해 생긴 사생아가 넘쳐 화장실은커녕 전염병 환자 격리실도 마련할 공간이 없었다. 당시의 참상을 전한 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의 한 서방국가 출신의 의사는 “유산탄에 등을 맞은 사람이 사지를 모두 잃은 채 실려와서는 이미 숨진 나머지 가족들을 애타게 찾을 때가 가장 가슴 아팠다”고 이야기 했다.

이렇게 내전이 격화되자 UN은 반군들이 항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고, 반군은 테일러 대통령이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도 테일러에게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라고 요구했고 여러가지 제재조치들이 가해지자 찰스 테일러가 나이지리아로 망명하면서 라이베리아 내전은 막을 내렸다. 테일러가 2003년 8월 " 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연설한 후 라이베리아 대통령직은 모지스 블라가 승계를 하기는 했지만 반군이 이미 수도인 몬로비아를 공격하였고 결국 반군들의 공격으로 테일러 정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UN에서 라이베리아에 50,000여 명의 인력을 파견해 국가의 안정을 되찾게 되었고 1989년부터 2003년까지 15년의 내전이 끝났다. 2003년 10월에 미국이 동원한 서아프리카 연합군 3,500명이 치안을 담당하면서 라이베리아 정권을 앞으로 책임지는 위원회를 만들고 브라이언트를 의장으로 세웠다. 브라이언트 의장은 미국과 UN의 절대적인 지시와 후원 하에 여러 종파들이 지금까지 친미 흑인 정권과 싸운 반정부 게릴라 10만명 이상의 반군들에 대하여 무장해제를 강행하여 성공했다. 2005년 10월 11일 UN과 서아프리카 연합군의 평화유지 활동에 힘입어 드디어 라이베리아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엘런 존슨 설리프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내전은 끝났지만 내전에서 벌어진 잔학행위는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 내전에서 약 1백만 명 가량의 난민이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전투의 진행에 따라서 이웃나라인 시에라리온, 코트디부아르를 전전하며 피난을 가야 했지만 문제는 시에라리온과 코트디부아르 이 두 나라 또한 모두 내전에 휩싸인 상태였기 때문에 정착이 거의 불가능한 지경이었다, 게다가 국제단체의 구호물자는 무장집단이 약탈하는 탓에 제대로 된 지원이 되지 않았으며, 정부군이고 반군이고 할 것 없이 자기 편에 가담하지 않는 사람은 부역자로 몰아 살해하고, 고작 10살이 된 어린이까지 징집해 무기를 쥐어주고 전선에 투입시켰다. 민간인에 대한 강간은 물론이고 젊은 여성이나 소녀들을 납치하여 성노예로 끌고 다녔는데, 이런 식으로 라이베리아 내전에 투입된 청소년들이 유니세프가 추산하기로는 전체 청소년 인구의 10%, 강간으로 양산된 사생아들이 1% 였다고 한다. 특히 반군들은 UN군 배치를 앞두고 마지막 기회라며 대대적인 약탈과 징병, 살해, 강간 등을 자행하였다. 고문과 납치도 행해졌다 또한 라이베리아 정부군은 이웃 시에라리온 국민들까지 납치했다.

이러한 이유로 찰스 테일러는 시에라리온 내전 당시에 반군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되어 UN 국제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고 결국 형이 확정되었다.


[출처] Left, Sarah (4 August 2003). "War in Liberia". The Guardian.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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