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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1-22 22:55:49

제임스 피츠제임스



파일:James,_Duke_of_Berwick.png

James FitzJames, 1st Duke of Berwick (1670.8.21~1734.6.12)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루이 14세의 휘하에서 싸우다2.3. 말년

1. 개요

17~18세기 프랑스의 명장, 제1대 베릭 공작. 제임스 2세의 서자로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 왕위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자코바이트를 주도했고, 루이 14세의 대외팽창 정책에 동참해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피츠제임스는 아버지 제임스 2세가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중인 1670년 8월 21일 프랑스 물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제임스 2세의 정부인 아라벨라 처칠로, 영국군 대위이자 정치가인 존 처칠의 여동생이었다. 그는 프랑스에서 로마 카톨릭 신자로 자랐고 줄리 대학 및 예수회 학교에서 고급 교육을 받았고 로렌 공작 샤를 5세를 섬기며 부다 포위전에 참여했다. 피츠제임스는 1687년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아버지에 의해 베릭 공작이 되었으며, 헝가리로 가서 제2차 모하치 전투에 참여해 신성 로마 제국군이 오스만 투르크군을 대파하는 광경을 지켜봤다.

피츠제임스는 잉글랜드로 돌아온 후 포츠머스의 총독이 되었다. 제임스 2세는 아들을 가터(Garter) 기사 작위에 봉했고 옥스포드의 개신교 백작을 해군 대령에서 해임하고 아들을 그 자리에 대신 앉혔다. 사실 그 자리는 피츠제임스의 삼촌이자 말버러 백작인 존 처칠도 탐내긴 했지만, 제임스 2세는 아들에게 중책을 맡기고 싶었고 잉글랜드 정계에서 카톨릭의 세력을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에 아들을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런데 1688년, 오라녜 공 윌리엄 3세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가 제임스 2세의 친 카톨릭 정책 및 지상군 육성 정책 추진에 반감을 품은 잉글랜드 의회의 초대를 받아들여 네덜란드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해변에 기습적으로 상륙했다. 이때 말버러 백작 존 처칠은 다른 장성들과 함께 윌리엄 3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당시 솔즈베리에 있던 제임스 2세와 피츠제임스는 군대의 갑작스러운 이탈로 이를 막지 못했다. 결국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피츠제임스는 아일랜드로 가서 아일랜드 민병대를 결성해 윌리엄 3세에 맞서 싸웠다. 1690년 7월 1일, 당시 28세였던 피츠제임스는 잉글랜드군과 보인에서 맞붙었으나 패배하고 그 자신 역시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1690년 8월 2일, 피츠제임스는 리머릭에서 패트릭 사스필드, 보슬라우 장군과 함께 잉글랜드군에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몇 명의 경비병들과 함께 샤논강을 건넜다. 1691년 6월 22일, 피츠제임스는 프랑스군과 함께 오그림에서 잉글랜드군과 맞붙었다. 당시 피츠제임스가 이끄는 아일랜드군과 프랑스 파견군의 군대는 18,000명이었고 잉글랜드군은 2만여 명이었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아일랜드-프랑스 연합군은 4,000명이 사망하고 3천명이 실종되거나 포로로 잡혔고 잉글랜드군 역시 전사자만 3천명에 달하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1691년 10월 3일 리머릭 조약에 서명한 피츠제임스는 1만 4천여 장병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2.2. 루이 14세의 휘하에서 싸우다

프랑스로 망명한 후, 피츠제임스는 뤽상부르 공작 프랑수아 앙리 드 몽모랑시 휘하의 프랑스군에 복무하여 9년 전쟁에 참가했다. 1692년 6월 30일 나뮈르를 함락시킨 프랑스군은 병력을 둘로 나누어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진군했다. 이때 프랑수아 앙리는 스틴케르케로 향했다. 이에 윌리엄 3세는 프랑수아에게 "잉글랜드군은 아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방심시킨 후 8월 3일 새멱에 스틴케르케에 주둔한 프랑스군을 기습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결사적으로 항전했는데, 피츠제임스 역시 최선을 다해 적과 맞섰다. 이때 구원군이 도착하자, 윌리엄 3세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이후 프랑수아는 피츠제임스의 용기와 담대함에 찬사를 보냈고, 피츠제임스는 프랑수아의 핵심 심복 중 한 명이 되었다.

1694년 라인강 전선 프랑스군의 지휘를 맡은 피츠제임스는 윌리엄 3세의 대동맹군과 맞서 싸웠으나 란덴 전투에서 존 처칠의 잉글랜드군에게 패해 포로로 잡혔다. 그후 3만 플로렌스의 몸값을 지불하고 오먼드 공작과 포로 교환이 이뤄져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적에게 일부러 포로가 되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한동안 추문과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한편, 스미르나로 파견되는 군대를 싣고 가던 잉글랜드의 400척 선박들이 프랑스 해군에게 잡치되는 사건이 벌어였다. 그러자 잉글랜드 의회는 격분했고 프랑스군에 복무하고 있는 피츠제임스에게 비난의 화살이 쏠렸다. 결국 피츠제임스는 1695년 영국 귀족 명단에서 삭제되었다.

1704년 6월, 피츠제임스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의 지휘관이 되어 스페인에 상륙한 신성 로마 제국군을 상대로 선전했고 1706년 니스에 대한 원정을 성공시키고 신성 로마 제국군을 카탈루냐로 패퇴시킨 공적을 인정 받아 프랑스 원수에 임명되었다. 1707년 4월 25일, 피츠제임스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을 이끌고 알만사에서 프랑스 출신 장군 루비니가 지휘하는 잉글랜드-포르투갈-네덜란드군과 맙줕에 대승을 거두고 5개의 잉글랜드 연대, 6개의 네덜란드 연대, 3개의 푸르투갈 연대 깃발과 대포들을 포획했다.

알만사에서 네덜란드-잉글랜드-포르투갈 연합군을 격파한 피츠제임스는 펠리페 5세로부터 아라곤의 대리와 리리아, 제리카 공작을 수여받았고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귀족 지위인 피츠제임스 공작 작위를 수여받았다. 이후 그는 1707년 7월 스페인령 네덜란드 전선으로 보내져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과 함께 사부아 공자 외젠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를 면치 못했고 1708년 8월 외젠과 존 처칠에게 포위당한 릴 요새를 구원하려는 프랑스군에 가담했으나 또다시 패해 릴이 함락당하는 걸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1710년, 프랑스와의 오랜 전쟁에 지칠대로 지친 잉글랜드 국민들은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휘그당을 외면하고 평화를 공약으로 내걸은 토리당에게 다수의 표를 던져 그들이 정권을 잡게 해줬다. 이때 피츠제임스는 자코바이트를 다시 벌일 것을 계획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삼촌이자 최대의 적수인 존 처칠 앤 여왕의 신임을 잃었다는 걸 눈치채고 잉글랜드에 스파이들을 보내 처칠의 부인 사라는 휘그당 지지자이며 처칠은 전쟁 지속을 추구한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에 잉글랜드 국민들의 존 처칠에 대한 감정은 악화되었고, 결국 처칠은 강제로 소환되어 몇년간 불우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1714년 9월 11일, 피츠제임스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을 이끌고 바르셀로나를 장기간 포위한 끝에 마침내 함락시켰다. 이로서 스페인은 신성 로마 제국군의 오랜 근거지였던 카탈루냐 지방의 핵심 도시를 장악할 수 있었다. 피츠제임스는 이 공적으로 황금 양모 기사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후 그는 기옌 지방의 군사 관리자로 임명되었고, 거기서 몽테스키외와 친해졌다.

2.3. 말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식된 후 프랑스로 돌아온 피츠제임스는 1718년 이번엔 스페인 군대에 대항하는 입장이 되어 펠리페 5세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1718년 12월 산 세바스티안을 폭격하고 기푸스코아 및 바스크 지방을 점령했다. 하지만 전염병 창궐과 보급난, 게릴라들의 기습 등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1720년 1월 평화조약이 체결된 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전쟁으 끝으로 평화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피츠제임스는 1733년에 다시 전장에 뛰어들 때까지 평온하게 지냈다.

1733년, 피츠제임스는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에 투입되어 라인 방면 프랑스군을 이끌고 독일의 켈(Kehl)을 포위해 성공적으로 공략했다. 그러나 1년 후인 1734년 6월 12일, 그는 필립스버그를 포위 공격하던 중 적군의 포탄에 맞아 즉사했다. 향년 64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