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6년 3월 3일 ~ 1624년 9월
1. 개요
조선 중기의 발명가, 무신. 본관은 동래(東萊)[1], 호는 평구(平九).2. 생애
1566년 3월 3일 전라도 김제군 흥부량면 제월리(現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 제월마을)에서 아버지 정계주(鄭繼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임진왜란 때 비거를 제작하여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활약했다고 전해진다. 신경준[2]의 《여암전서》에 따르면 비거로 성의 우두머리를 30리 밖으로 피신시켰다고 한다.
윤승운의 맹꽁이 서당에서 좀 더 자세한 일생이 나오는데 정사인지 야사인지 알 수 없으니 주의해서 읽자. 강원도 횡성 산골 출신이며 매우 총명해 7세, 8세때 논어 맹자등을 전부 읽었다고 하며 가난한 친구를 데려와 밥을 먹이기도 했다. 서당에서도 가난한 친구를 데리고 와 함께 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때쯤 호랑이가 출몰해 가축을 물어갔는데 이놈이 인육 맛을 봤는지 점차 사람을 해치기 시작해 자고 나면 호환이 나니 사람들이 두려워해 제사를 지내려 하나 평구는 범을 잡자고 하고 어른들을 설득해 호랑이가 다니는 길목에 호랑이가 뛰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깊은 함정을 팠고 호랑이를 잡는데 성공한다.
마을 사람들이 잡힌 호랑이를 보던중 방정맞은 사람이 호랑이를 놀린답시고 까불다 함정에 빠지는데 독이 오른 호랑이가 발을 물고 사람들이 급히 옷을 잡고 당기는 대치 상황에서 평구가 급히 집에가서 버선을 긴 장대에 묶어 호랑이가 대신 물게 해 그 사람을 살린다. 청년이 되고 과거길에 오르나 낙방, 무과에 응시해 급제는 했으나 말직에 머물렀다. 원래 문과 장원이었는데 썩은 조정 대신들이 자기 당파 뽑는다고 낙방 시킨것이라고 하며 이후 전라 우수사로 부임중이던 이억기가 충신을 자기 휘하에 뒀다가 수군에서 썩기 아깝다고 여겨 진주 병영 별군관[3]으로 보냈다고 하며 이때가 임진왜란 때였다 한다.
진주성에도 왜적들이 몰려왔고 치열히 항전했지만 총의 위력은 굉장했고 화살과 식량이 바닥났다. 이때 평구는 7일단 단식하며 명상을하더니 비차를 연구해내서 참나무로 이상한 수레를 만들고 사람들의 머리털과 동아줄을 엮어서 완성했다.[4] 전설과 몇몇 문헌에 따르면 2km 높이로 떠올라 30리 내지 50리를 날았다 하는데 그 모양과 원리는 알 수 없다.
이후 비거로 식량을 날라왔고 성안에 있던 화약과 염초를 섞어 창호지에 싼 종이 폭탄 지포를 만들어 왜놈들에게 불맛을 보여줬다 하며 돌도 함께 투하했다고 한다.
족보에 의하면 1624년 9월 58세의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야사에 의하면 그는 진주성 2차 전투에서 죽었다고 하는데, 왜군들은 널판지로 돌을 방어하는 등 비차에 대응하는 대책을 찾았고 보름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적탄에 피격되어 비차가 허공에서 여러번 빙글빙글 돌더니 성안에 거꾸로 추락해 박살났고 정평구는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니 향년 27세였다. 정평구의 사망과 동시에 갑자기 비가 오더니 진주성 문루의 종이 저절로 울리고 그가 거처하던 방 대들보가 내려앉았다 한다. 왜군은 그의 사망을 알고 맹공을 퍼부어 3일만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