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한국 공산주의 단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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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이후 |
1. 개요
제2차 조선공산당 결성 전에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의 4개 단체가 모여서 만든 공산주의 단체이다. 이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을 모색하여 신간회 결성에 영향을 미친다.2. 활동
민주주의적 노력의 집결로 인하여 전개되는 정치적 운동의 방향에 대하여는 그것이 필요한 과정의 형세인 이상, 우리는 차갑게 강 건너 불 보듯 할 수 없다. 아니 그것보다도 먼저 우리 운동 자체가 벌써 종래에 국한되어 있던 경제적 투쟁의 형태에서 보다 더 계급적, 대중적, 의식적 정치 형태로 비약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전환기에 달한 것이다. 따라서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히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아니하는 것에 한하여는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
1926년 11월 17일, 「정우회 선언」 中
제1차 조선공산당이 해산된 이후 화요회, 북풍회,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회는 '합동위원회'를 구성하고 1926년 4월, '정우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제1차 조선공산당처럼 화요회가 주도권을 가지고 다른 공산주의 단체과 연합하는 구조였다. 그리하여 정우회는 다시 제2차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 기반이 되어주었다.1926년 11월 17일, 「정우회 선언」 中
하지만 같은 해 6.10 만세 운동이 일어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향한 일제의 탄압이 이어졌고, 제2차 조선공산당도 해산되면서 정우회는 위기를 맞이했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일월회[1]의 합류 덕분이었다. 일월회가 합류한 이후 정우회는 공산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협동전선 구축을 목표로 하는 '정우회 선언'을 발표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