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 전혁(全爀) |
본관 | 정선 전씨[1] |
출생 | 1899년 11월 12일 |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삼동 (현 경상남도 양산시 중부동 삼동마을)[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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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50년 10월 13일 |
양산경찰서 |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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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전병건은 1899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양산군 읍내면 삼동(현 양산시 중부동 삼동마을)에서 양산면장을 지낸 아버지 전기준(全基準)과 어머니 정의인(鄭宜仁) 사이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읍내면 북안동(현 양산시 북부동)으로 이주하였다. 1914년 3월 양산공립보통학교(현 양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919년 3월 부산에서 일어난 청년 학생들의 만세운동을 직접 보고 군중시위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돌아온 엄주태에게서 상황을 전해 듣고 협의 끝에 먼저 동지 규합을 위해 독립선언서 5매를 복사하여 박삼도(朴三道)·정주봉(鄭周奉)에게 찾아가 거사를 의논하였다. 거사일은 1919년 3월 27일 양산 장날로 결정했으며, 독립선언서 200매와 공약서, 경고문 등을 등사하고 '독립만세'라고 쓴 큰 깃발도 만들었다.
1919년 3월 27일, 이들은 준비물을 품속에 품고 장터에 잠입하여 군중에게 배부한 후 3천여 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4월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5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으며 #, 상고하였으나 그해 7월 12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상고가 기각되면서 # 형이 확정, 옥고를 치렀다.
전병건은 출옥 후 동아일보 양산지국에서 독서구락부를 조직해 청년들에게 사상 서적을 탐독하게 했으며,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에 경도되었다. 1929년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으며, 1932년 양산농민조합 간부의 석방을 요구하며 양산경찰서 습격을 이끌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어야 했다.
8.15 해방 후 양산군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좌익 운동에 뛰어들었지만 미군정에 의해 체포되었고,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뒤 고향에서 칩거했다가 6.25 전쟁 발발 후 양산경찰서로 연행된 뒤 10월 13일에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전병건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