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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06 21:34:36

적경원

1. 개요2. 역사

1. 개요

적경원(積慶園)은 고려의 원()[1]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사친(四親)의 신주를 안치하기 위해 설치했다.

2. 역사

공양왕이 즉위하고 두 달 뒤인 1390년 1월 9일, 예조[2]에서 왕의 4대조를 추봉하고, 그 신주를 모실 원(園)을 두며, 제사를 관장하는 관청인 사관(祠官)을 둘 것을 청했다. 예조는 황실의 먼 친척으로 제위를 계승한 후한 광무제 북송 영종을 언급하고, 사마광 여불위[3]의 논설을 인용하며 왕의 사친을 추증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공양왕이 예조의 의견을 수용하면서 공양왕의 부친, 조부와 조모, 증조부와 증조모, 고조부와 고조모 일곱 명이 국공과 국비로 추증됐다. 공양왕의 모친 국대비 왕씨는 아직 살아있었고 추증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외에 제사를 맡을 관청인 적경서(積慶署)가 설치됐으며 제사를 올릴 날짜도 삭망(朔望, 음력 초하루와 보름)과 사맹월(四孟月, 사계절의 첫 달)로 정해졌다.

윤4월, 도평의사사의 건의에 따라 적경원에서 행할 일곱 신위의 부묘안신제(祔廟安神祭, 신주를 사당에 옮긴 뒤 지내는 제사)와 사계절에 올리는 제향의 기물·예의 등을 제릉서(諸陵署)에 의거해 행하게 됐다.

6월 3일, 성균관 옆에 적경원이 완공됐다. 왕은 25일에 적경원에 행차했고 27일 사친의 추봉과 봉안 의식을 행했다. 사친 일곱 명에 맞게 일곱 명의 왕실 종친이 제사를 지내며 신위를 맞아 봉안했다. 삼한국대공 왕균은 길에서 죽어 조역(兆域, 묫자리)이 없었기에 귀빈을 맞는 영빈관(迎賓館)에서 장전(帳殿, 임시로 꾸며진 왕의 자리)을 설치해 신위를 맞았고, 공양왕의 동생 정양부원군 왕우가 각 사(司)의 관원 한 명과 함께 공복(公服)을 입고 시위했다. 제물로는 소와 양이 한마리씩, 돼지 일곱마리가 쓰였고, 의장 등은 경령전(景靈殿)과 같이 행했다.

적경원 밖에는 비석[4]이 세워졌고 공양왕은 동생 왕우에게 제사 전반을 맡겼다. 이후에도 공양왕은 적경원을 찾았다. 1391년 11월에는 공양왕이 직접 적경원에 행차해 제사를 지냈고, 1392년 4월에는 세자 왕석이 적경원을 참배했다. 그러나 새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12월 26일에 인희전(仁熙殿)과 함께 헐렸다.


[1] 왕의 사친(四親)의 무덤을 가리킨다. [2] 공양왕이 즉위한 해에 예의사(禮儀司)에서 바뀐 명칭. [3] 보다 정확하게는 여씨춘추에서 정자(程子)의 논설을 인용한 것이다. [4] 『고려사』에 정도전이 적경원중흥비(積慶園中興碑)의 비문을 쓰고 옷 한벌과 말 한필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