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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21:44:26

장해평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명문가
우당 이회영 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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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ddd> 성명 서훈 내역 비고
첫째
이건영
건국훈장 애족장 (1999)
이규룡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건영의 장남
둘째
이석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이규준 건국훈장 애족장 (2008) 이석영의 장남
셋째
이철영
건국훈장 애국장 (1991)
넷째
이회영
건국훈장 독립장 (1962)
이은숙 건국훈장 애족장 (2018) 이회영의 처
이규학 대통령표창 (1982)
건국훈장 애국장 (1990)
이회영의 차남
장해평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회영의 차녀
이규숙의 남편
이규창 건국훈장 독립장 (1968) 이회영의 3남
다섯째
이시영
(대한제국) 훈3등팔괘장 (1910)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49)
초대 부통령
이규창 건국포장 (2008) 이시영의 장남
여섯째
이호영
건국훈장 애족장 (2012)
조정구 건국훈장 애족장 (2019) 이규학의 장인
정이형 건국훈장 독립장 (1963) 이규창의 장인
신익희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1962)
국민훈장 무궁화장 (1962)
매제 신재희의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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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장해평.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남용무(南容武), 이계백(李啓白), 장기준(莊麒俊)
출생 1905년 4월 10일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
(현 황해남도 안악군 안악읍)
사망 1965년 4월 18일
서울특별시
이규숙[1]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963)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장해평은 1905년 4월 10일 황해도 안악군 판교면 팔리에서 장운동(莊雲洞)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2년 정주 오산학교 3년을 수료한 후 중퇴하였으며, 1923년 조선일보 안악지국을 경영하다가 김구, 오면직 등의 설득을 받아들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이후 1924년 호북성 무한군관학교에 입학해 군사훈련을 받았고, 여기서 동교생 진공목(陳公木)·안재환(安載煥)·박시창(朴始昌) 등과 중국 군대의 기술교관으로 있는 백득림(白得林)·권준(權晙) 등을 중심으로 우한한인혁명청년회(武漢韓人革命靑年會)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조직했다.

1926년 5월에 군관학교졸업한 그는 중국군 11로군에 입단하여 육군 소위로 복무했으며, 1926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귀국했다가 경찰에게 체포되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9년 출옥 후 다시 이병섭(李秉燮)·김지건(金知乾) 등과 군자금 모금운동을 재개하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자 상하이로 탈출했으며, 같은 해 11월경 만주 일대의 군자금 모금 사명을 띠고 톈진으로 가서 이회영, 이을규(李乙奎), 정화암 등과 회동하고 조선혁명당총동맹(朝鮮革命黨總同盟)에 가입, 일제침략의 수뇌부를 총살하고자 했다. 또한 오면직, 김지강(金芝江) 등과 함께 톈진의 일본 조계 안에 있는 일본은행을 대낮에 습격하여 거금을 손에 얻어 군자금으로 활용하게 했다.

1930년 이름을 남용무(南容武)로 고치고 만주 해림한인제1소학교에서 독립정신을 고취했으며, 1932년에 다시 이계백(李啓白)으로 고췬뒤 모란강, 길림 등지를 거쳐 조선일보 및 조선중앙일보지국을 경영했다. 8.15 광복 후 귀국했으며 1965년 4월 18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장해평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66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1]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의 차녀. 본관은 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