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colcolor=#fff> 장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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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14년 10월 4일 |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Gréville-Hague, Gruchy | |
사망 | 1875년 1월 20일 (향년 60세) |
프랑스 일드프랑스 바르비종 | |
직업 | 화가 |
성향 | 리얼리즘 |
배우자 | 캐서린 (1875년 1월 3일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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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를 대표하는 프랑스 출신의 자연주의 화가로, 농부였던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농촌의 고단하고 열악한 일상의 삶을 관찰자로서 그린 19세기 프랑스 바르비종파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작가다. 그는 프랑스 시골의 바르비종 학교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밀레는 농민을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같은 시기의 쿠르베와 항상 비교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경력 말기에 이르러서는 순수한 풍경을 그리는 데 점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밀레는 유화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파스텔, 콘테 크레용 드로잉, 에칭으로도 유명하다.2. 생애
노르망디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7년, 파리에 가서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고, 루브르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 후 1848년, <곡식을 키질하는 사람들>이 샬롱에 당선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듬해에 바르비종으로 이사해 농민들의 생활모습을 그렸는데, 밀레는 농부의 일을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 그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대표작으로는 <이삭 줍는 여인들>, <만종>등이 있다.지금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화가로서 그림값이 장난 아니지만, 생전에는 그다지 대박을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생활고에 시달려 싸구려 누드화를 그려 팔아야 하던 시절도 겪었다. 이렇다보니 고향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귀향할 경비가 없어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고. 말년에야 어느 정도 명성을 얻어 돈을 벌 수 있었고, 그 즈음에 한 말이 "내가 원한건 부귀와 번영이 아니라, 평화와 안정이다."
그의 친구 테오도르 루소가 모처럼 그림을 괜찮게 1점 사간 사람이 있다고 하여 무척 기뻐했는데 세월이 지나서 사실은 루소가 직접 그림을 사주었고 자기가 사줬다면 밀레가 자존심에 상처받을까봐 거짓말했다는 걸 우연히 알게된 적도 있었다. 루소와는 이런 인연으로 죽을 때까지 무척 친하게 지내면서 우정을 나누었다.
생전에 정치적 논란에 휩싸인 적도 있었는데, 농부의 모습을 주로 그린 것을 두고 보수 우파에게 '계층 갈등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란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밀레는 사회주의 등의 정치 사상에는 관심이 없다고 일축했다.
살아 생전 몇몇 그림은 해외로 팔려나갔는데 세월이 지나 그가 재평가받자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 측이 거액으로 그런 밀레의 그림을 해외에서 사오기도 했다.
3. 대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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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종 | 봄 | 이삭 줍는 여인들[1] |
4. 논쟁
밀레의 그림에 대한 해석에서 간혹 논쟁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사회 비판적인 철학을 가진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의 평소 철학과는 달리 만종이나 이삭줍기 등의 대표작들은 평화로운 외견상의 내용과는 달리, 그림의 배경은 역설적인 경우가 눈에 띈다. 이렇다보니 그의 그림을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며 숨겨진 메시지를 찾으려는 비평가들이 생기게 된다.한 예로, 후대의 유명한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는 만종을 보고 왠지 감자 바구니에서 관(죽은 아이의 관)이 느껴진다는 식으로 말하며 밀레가 단순히 "추수기의 풍요와 평화와 감사"같은 그림이 아니라 죽은 아이를 애도하는 기도를 올리는 부모의 모습을 그렸다고 주장 했다. 후대의 기술발전으로 그림에 대한 정밀 엑스레이 검사가 가능해져서 살펴보니 실제로 바구니 주변에 직사각형 형태의 펜 선이 있는게 확인되었다. 다만 이게 실제로 관을 그린것인지 단순히 구도를 잡기 위한 것인지는 불명. 흔히 스케치 전 구도를 잡기 위해 캔버스에 십자 형태의 펜 선을 그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게 십자가를 그렸다고 할 수 없지 않은가.[2]
또한 '이삭 줍는 여인들'의 이삭을 줍는 여인들은 수확이 끝난 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최하층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확물은 원칙적으로 지주의 것이나, 떨어진 이삭은 예외였기 때문이다.[3] 여인들의 모자와 옷의 색은 파랑, 빨강, 흰색의 프랑스 혁명의 깃발 색을 상징하며[4] 멀리서 수확을 감시하는 감독관[5]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식으로 그의 그림은 "다시 한번 쳐다보고 곰곰히 생각해보면 사회비판적 요소로 다시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기에, 진정 화가가 의도한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두고 꽤 다른 해석 및 평가가 존재한다.
[1]
참고로 이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뒤의 배경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걸 볼 수 있다.
[2]
대부분의 밀레 연구가들은 <만종>에 관한 이러한 주장에 별 근거가 없다고 여긴다. 아기의 죽음을 기리는 기도를 그리는 장면이라면 아무리 가난한 농민이라도 최소한의 장례에 필요한 의식은 갖추기 마련인데 그림 속 부부는 일하다 말고 기도를 드리는 듯 옆에 쟁기도 놓아두었고 그냥 밭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다. <만종>에서 묘사되는 장면도 특별한 어떤 예식을 그린 게 아니라 당시 가톨릭 신자들이 하던 일도 잠시 중단하고 꼬박꼬박 바치던
삼종기도 중 저녁기도(오후 6시에 바친다)를 드리는 모습이며, 이는 당시 프랑스 서민들의 일상적 모습에 가깝다.
[3]
배경으로 보이는 평화로운 수확풍경과 대비 된다.
[4]
현재 프랑스 국기
[5]
혹은 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