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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17 14:08:51

장역지

張易之
(? ~ 705년)

1. 개요2. 생애3. 양국충과의 관련성4. 계보

1. 개요

중국 무주 시기의 권신으로, 형제인 장창종과 함께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측근이었다. 당나라의 역사를 다룬 중국의 정사서인 구당서 신당서에서는 장행성 열전에 부전으로 족손 관계임이 언급된다.

2. 생애

장역지는 옹주 사호참군을 지냈던 장희장(張希臧)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장역지는 얼굴이 희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음률과 가사에 뛰어났다고 한다. 장역지는 음서를 통해 관직이 상승봉어까지 이르렀다.

장역지는 태평공주의 추천으로 입궁하여 측천무후를 모시게 되었고, 형제인 장창종과 함께 측천무후의 남총이 되었다. 측천무후의 총애를 받은 장역지는 사위소경(司衛少卿), 공학감(控鶴監), 내공봉(內供奉), 봉신령(奉宸令)[1], 인대감(麟台監) 등의 관직을 역임하고, 항국공(恒國公)으로 책봉되어 실봉 300호를 식읍으로 받았다. 측천무후의 일파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연을 맺었고, 측천무후 일파는 감히 이름을 거론하지 못하고 그들의 이름을 장역지는 오랑(五郞), 장창종은 육랑(六郞)으로 불렀다.

당시 측천무후가 연로하여 정사는 장역지, 장창종 형제에게 위임하였는데, 장역지는 형제인 장창종과 함께 측천무후로부터 받은 총애를 바탕으로 정사를 좌우하고 전횡을 부린다. 한편 황태자 이현의 아들인 이중윤과 영태공주(永泰公主), 무연기(武延基)가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정사를 좌우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자, 장역지는 이들을 참소하였고 이중윤과 영태공주는 자결을 명 받았다. 이 밖에도 무주의 많은 대신들이 장역지, 장창종 형제가 정사를 좌우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하여,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무주 대신들 사이의 갈등의 골은 더더욱 깊어졌다.

장역지는 이후 702년에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사부소경 장창의(張昌儀), 사례소경 장동휴(張同休)와 함께 관직이 강등되었다. 705년 측천무후가 병으로 눕게 되자, 장역지는 장창종과 함께 측천무후를 모시며 변고가 일어날 것에 대비했다.

장역지, 장창종 형제에 대한 규탄 여론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가운데, 장간지, 최현위, 환언범, 경휘, 원서기 등이 마침내 궁중 쿠데타를 일으켰고 황태자 이현을 맞이한 뒤에 군대를 이끌어 장역지, 장창종과 더불어 장창기, 장창의, 장동휴의 목을 모두 베었다. 이들 형제의 목은 천진교 남쪽에 효수되어 백성들이 만세를 불렀고 그들의 시체는 살도 남지 않게 찢겨진다. 아울러 장역지, 장창종 형제와 엮였던 조정 대신 수십 명이 황태자 이현의 복위 이후 폄관을 당하였다.

3. 양국충과의 관련성

당나라 최악의 간신인 양국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장창기의 딸이 글을 올리자, 당시 권신으로 있었던 양국충은 그녀를 도와 장역지 형제의 관작을 추복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는 양국충이 장역지의 외조카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4. 계보

신당서 종실세계표에 근거하면 계보는 다음과 같다.


[1] 공학부의 명칭을 봉신부로 고치면서 봉신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