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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2 13:26:53

장덕성

<colbgcolor=#000><colcolor=#fff> 장덕성
張德成
파일:10000000003410.png
출생 1846년
청나라 하북성 직례군 백구하
사망 1900년 7월 (향년 53~54세)
청나라 하북성 왕가구진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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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의화단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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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화단 운동의 인물.

2. 생애

하북 백구하출신으로 대운하에서 뱃사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1898년 의화단 운동이 만연했고 그들이 만든 무술 의화권은 그가 지나가던 행선지인 정해현 독류진까지 전파되었다. 남녀노소 할 것없이 모두 권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하루는 길거리에서 어린아이들이 권법을 익히는 것을 봤는데 냉소를 보냈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왜 웃느냐고 힐문했다. 이에 그는 너희들에게 진짜 신권이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하고는, 누런 종이 하나를 꺼낸 다음, 옥수수 속을 하나 쌌다. 그리고는 땅위에 던져 아무나 들어보라고 했다. 몇몇 사내들이 나섰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장덕성을 대사형으로 모시게 된다. 뱃사공 시절 만났던 인물들과 본인의 리더십으로 5,000명의 인원이 모이게 되었고 이합집산이였던 의화단 세력의 중심이 된다.

1900년 그의 세력을 포함한 의화단은 서태후에게 인정을 받고 서양인, 서양 문물을 추종하는 인물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8국 연합군에게 청군이 전멸했다. 장덕성은 직예총독 유록과 힘을 합쳐 톈진에서 8국 연합군이 진을 치고 있던 곳에 소때를 이용해 돌파하고 병사 몇 명을 전사시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나 청나라 방판북양군무 송경이 해산명령을 내려 청나라가 등돌렸음을 깨닫고 자신의 병력 5,000명, 후속 병력 5,000명 도합 1만명이 최후의 저항을 했으나 4일만에 톈진이 함락되고 2인자인 조복전이 포로로 잡히고 유록은 자살했다.

장덕성은 부하 일부을 데리고 톈진을 빠져나가 하북성 왕가구진 일대로 도망쳤다. 현지의 소금 상인인 왕모에게 식사를 접대할 것을 요구했고 왕모는 술자리를 마련했는데, 먹을 게 없지 않느냐고 불만을 품고 소리치고 식탁을 발로 차서 엎었다.

이에 주민들은 화가 나서 도구를 들고 달려와 장덕성과 그의 부하들을 구타해 포박했다. 이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너는 스스로 칼과 총도 피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한번 시험해보자."라는 말을 하고 주민들의 칼에 부하들과 난도질 당해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