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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모네 (Jean Monnet) |
생몰년 | 1888년 11월 9일, 꼬냑 - 1979년 3월 16일 |
1. 개요
장 모네는 프랑스의 외교관이다. "유럽 연합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2. 생애
엘리트와 테크노크라트가 독점하는 프랑스 정계에서 독특하게 중졸 기업인이었다. 이런 커리어 덕택에 보다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1888년 꼬냑[1]에서 꼬냑을 파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뛰어난 언어습득 실력으로, 16세의 나이에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꼬냑을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 동맹국들의 보급 제도의 비효율성을 보완하고자 한다. 1917년에 국회의장인 르네 비비아니와 통상-공업-직업-전보부 장관이자 "Wheat executive"[2]의 프랑스 대표인 에티엔느 클레망텔을 만나게 되고, 보급 시스템을 최적화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한다. 영국에 비해 프랑스의 인구당 벼 생산량이 높으니 영국이 벼를 수입하고, 프랑스는 항상 에너지원이 부족하니[3] 영국에서 수입하는 것이었다. 해상 무역강국이었던 미국과 영국의 수송 시스템을 공유해서 물자를 보다 효율적으로 배분할 수 있게 했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장 모네는 전쟁이 끝난 이후 32세의 나이로 국제연맹의 부서기장으로 임명된다. 그는 브뤼셀 재무 회의에서 유럽 국가들을 재건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유럽 국가들의 협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23년에 가업에 문제가 생긴 탓에 사퇴하고, 미국에서 은행 업무를 맡는다. 1932년에 중국 재정부 장관 장징푸의 중국 경제 발달 고문으로 일해달라는 제의를 승낙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장 모네는 프랑스와 영국 정부의 협동을 조율한다. 1940년에 프랑스에 비시 프랑스 괴뢰정부가 세워진 이후 영국으로 피난가서 처칠 밑에서 미군 무기를 수입해오는 건을 맡았다. 전쟁 이후에 프랑스로 돌아와 마셜 플랜과 프랑스 재건 정책을 맡았다.
일생의 대업인 유럽 연합의 창설을 위해 영국을 설득하려 했지만, 영국 측에서 정치적 관계가 아닌 경제, 무역적 관계만을 바란다는 것을 알고 독일로 눈길을 돌린다. 1951년 4월 18일 뜻을 같이하는 프랑스 외무장관인 로베르 슈만, 독일의 콘라드 아데나워와 함께 파리 협정[4]을 맺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와 베네룩스 3국을 포괄하는 경제적 연합, 유럽 석탄 철강 공동체를 창설한다.
1952년 5월 27일에는 같은 6국과 함께 유럽 방위 공동체 조약을 맺지만 실행으로 옮기는데는 실패한다. 이유는 당시 프랑스 총리인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의 내각이 법안을 부결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1957년에 로마 조약을 체결해 점층적으로 관세장벽을 허무는 유럽 경제 공동체를 만든다. 하지만 프랑스 제5공화국이 출범하고 유럽 연합에 훨씬 소극적이던 샤를 드골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유럽 연합 계획을 추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다. 그럼에도 1968년에 로마 조약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전한 자유무역을 완성하는데 성공한다.
1973년에, 장 모네는 유럽 연합 정상회의를 3년 주기로 열 것을, 그리고 유럽 임시 정부를 설립할 것을 영국 총리 에드워드 히스와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에게 제안한다. 이듬해에 임시정부 제안은 기각되었지만 유럽 연합 정상회의는 수용되었고, 최초의 정상회담에서 정부 수반들은 유럽 평의회 의원들을 보통 직접 선거로 투표하는 안을 가결한다.
말년에 회고록 (Mémoires)를 써서 1975년에 출판하고 1979년에 사망한다.
[1]
꼬냑 술을 재배하는 동명의 지명
[2]
1916년에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의 벼/밀가루 보급에 대해 거론하기 위해 생겨난 기구
[3]
1913년에는 프랑스 석탄 추출량의 미국의 그것의 8%, 영국의 반에 불과했다.
[4]
2015년에 환경보호를 목적으로 맺은 다자적 조약과는 다른 조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