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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22:28:40

자바 전쟁

자와 전쟁에서 넘어옴
1. 개요2.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1708)
2.1. 전후: 수라바야 반란
3.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19–1723)4. 자바 전쟁(1741–1743)
4.1. 배경: 바타비아 화인 학살(1740)4.2. 케 판장의 도피와 파쿠부워노 2세의 지원4.3. 자바 북부 화인 반란4.4. 차크라닝랏 4세의 개입4.5. 파쿠부워노 2세의 변심과 수난 쿠닝 반란4.6. 카르타수라의 함락과 전쟁의 종결4.7. 전후: 차크라닝랏 4세의 반란(1745)4.8. 전쟁 이후
5.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49–1757)6. 디파나가라 전쟁(1825–1830)7. 참고 문헌

1. 개요

'자바 전쟁'(Perang Jawa, Java War)은 근세 및 근대 자바섬 중부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크게 다음 세 가지 의미를 가진다.
본 문서에서는 시간순으로 제1차,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 및 '가장 좁은 의미의 자바 전쟁'을 다루고, 그 이후의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과 디파나가라 전쟁은 각각의 전개 과정이 길고 복잡하므로 별도 문서로 넘겨주기 처리한다.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바섬에서는 이상의 전쟁들과 이상에서 파생된 전쟁들 외에도 다양한 전쟁[1]이 벌어졌으나, 이 시기 자바 토착 세력의 정치 변동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이상의 다섯 전쟁이었다.

2.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04–1708)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도움을 얻어 트루나자야 봉기(1674–1681) 및 봉기 와중에 발생한 푸그르 공(Pangeran Puger)의 반란을 진압한 마타람의 수수후난 아망쿠랏 2세(Amangkurat II, 재위 1677–1703)가 1703년 사망하였다. 아망쿠랏 2세를 계승한 것은 그의 아들 아망쿠랏 3세(Amangkurat III, 재위 1703–1704)였지만, 아망쿠랏 3세는 왕자 시절부터 개인적 평판이 나빴고 아망쿠랏 2세의 동생 푸그르 공이 왕위를 찬탈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 하였다. 1704년 5월, 아망쿠랏 3세가 군대를 보내 푸그르 공의 가족을 체포하려 하자, 푸그르 공은 가신들을 이끌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조차지 스마랑으로 피신하여 동인도 회사에 몸을 의탁하였다.

스마랑의 군수 롱가 유다나가라(Rongga Yudanagara)가 푸그르 공 세력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사이의 교섭을 중재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입장에서 아망쿠랏 3세는 동인도 회사와 적대한 운퉁 수라파티(Untung Surapati, 1660–1706)와 공모하고 있다는 의심을 사고 있었고, 푸그르 공은 20여 년 전 동인도 회사 및 아망쿠랏 2세와 적대하기는 했지만 평판이 아망쿠랏 3세보다는 훨씬 나았다. 동인도 회사의 충실한 동맹이던 마두라 방칼란 공국의 차크라닝랏 2세(Cakraningrat II, 재위 1647–1707)도 동인도 회사에 푸그르 공의 지원을 권유하였다. 이에 따라 동인도 회사는 푸그르 공을 차기 마타람 군주로 인정하고, 푸그르 공의 세력과 함께 아망쿠랏 3세에게 대항하여 전쟁을 시작하는데, 이것이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의 시작이다. 푸그르 공은 1704년 6월 6일에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1세(Pakubuwono I, 재위 1704–1719)로 즉위하였다.

파쿠부워노 1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방칼란 공국뿐 아니라 수라바야 군수 장라나 2세(Jangrana II, 군수 재직 1705–1709)의 지지도 얻었고, 1705년 네덜란드군, 방칼란군, 수라바야군과 합세한 파쿠부워노 세력이 아망쿠랏 3세의 치하에 있던 마타람의 수도 카르타수라(Kartasura, 마타람 수도 1680–1745)를 침공하였다. 수비측 마타람군의 지휘관은 파쿠부워노 1세의 동생 아랴 마타람 공(Pangeran Arya Mataram)이었는데, 아랴 마타람 공은 이미 은밀하게 파쿠부워노 1세 측으로 포섭되어 있었다. 파쿠부워노 1세는 1705년 9월 17일 어렵지 않게 카르타수라를 점령하였고, 아망쿠랏 3세는 마타람 왕실의 보물을 가지고 인근의 포노로고(Ponorogo)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아망쿠랏 3세는 포노로고의 영주 마르타왕사 공(Adipati Martawangsa, Adipati Martowongso)을 오해로 고문하였고, 이에 마르타왕사 공의 세력이 아망쿠랏 3세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아망쿠랏 3세는 다시 마디운(Madiun)을 거쳐 크디리(Kediri)로 도주하였다.

이때 동부의 파수루안(Pasuruan)을 거점으로 반네덜란드 독립 세력을 이끌던 운퉁 수라파티가 크디리로 피난한 아망쿠랏 3세에게 사절을 보내 아망쿠랏 3세와 운퉁 수라파티의 연합이 성사되었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파쿠부워노 1세에게 넘어와 있었다. 1706년 카르타수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방칼란, 수라바야의 4자 연합군이 운퉁 수라파티의 거점 파수루안을 침공했고, 1706년 10월 17일 방일(Bangil)의 전투에서 운퉁 수라파티는 전사하였다. 운퉁 수라파티의 아들들은 잔당을 이끌고 말랑(Malang)에 머물던 아망쿠랏 3세와 합세하였고, 마타람군은 이들을 쫓아 1708년까지 말랑, 블리타르(Blitar), 크디리에서 2년 가까이 추격전을 벌였다. 결국 1708년 아망쿠랏 3세가 수라바야에서 항복하여 계승 전쟁은 파쿠부워노 1세의 완승으로 마무리되었다. 아망쿠랏 3세는 네덜란드령 실론으로 유배되어 자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1734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파쿠부워노 1세와 협력한 대가로 1705년부터 마타람에서 엄청난 이권을 획득하였는데, 특히 마타람 속령이었던 치르본, 마두라 동부( 수므늡 공국)의 종주권을 갖고 스마랑을 마타람에서 영구 할양받게 되었다. 또한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 지역에서 아편과 직물 수출의 독점권을 갖고, 연간 800코얀(koyan, 800코얀은 약 1,300톤)의 쌀을 향후 25년간 무상으로 공급받을 권리도 얻었다. 전후에는 파쿠부워노 1세와의 협약으로 동인도 회사가 마타람 측의 비용 부담으로 카르타수라 궁에 동인도 회사 수비군을 주둔시키게 되었으며, 1709년의 추가 협정에서는 동인도 회사가 쌀, 목재, 인디고, 커피 등의 교역 관리권까지 획득하였다.

2.1. 전후: 수라바야 반란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전후 조사 과정에서 수라바야의 장라나 2세가 파쿠부워노 1세와 아망쿠랏 3세 사이에서 은밀하게 줄타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706년의 파수루안 침공 과정에서 장라나 2세는 카르타수라 연합군을 일부러 습지 등의 험지로 안내하여 네덜란드 병사들이 질병에 걸리게 하였고, 파수루안 전역에서 수라바야군은 건성으로 싸워 전사자를 내지 않았던 것이다. 동인도 회사는 이러한 사실을 파쿠부워노 1세에게 알렸고, 1709년 파쿠부워노 1세는 수라바야 군수 장라나 2세를 수도 카르타수라로 소환하여 처형하였다.

장라나 2세 사후 마타람 간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던 장라나 2세의 수라바야 세력은 장라나 2세의 두 동생 아랴 자야푸스피타(Arya Jayapuspita)와 장라나 3세(Jangrana III)에 의해 둘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특히 이들 중 강성했던 자야푸스피타의 세력은 1714년부터 마타람에 굴종하기를 거부하고 그레식(Gresik), 투반(Tuban), 라몽안(Lamongan) 등 동부 자바 해안 지대로 영향권을 넓히며 장라나 2세의 복수를 꿈꾸며 반마타람 반란을 준비하였다. 이대로 방해받지 않고 수라바야가 세력을 확장한다면 자칫 17세기 초의 마타람–수라바야 간 장기전 국면이 재연될 가능성도 있었다. 1717년, 마침내 파쿠부워노 1세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연합군을 동원해 수라바야를 침공하였는데, 수라바야의 자야푸스피타는 장라나 3세, 발리의 불렐렝(Buleleng) 세력, 운퉁 수라파티 잔당의 지지를 얻어 반마타람 공동 전선을 형성하고 연합군에 맞섰다. 1718년 장라나 3세가 사망하고 전투에서 패배한 자야푸스피타도 궁지에 몰려 수라바야 인근의 모조크르토(Mojokerto)로 피신했지만, 마타람 연합군은 자야푸스피타 세력을 완전히 일소하지는 못했고 자야푸스피타 세력은 1720년대 초까지 한동안 독립 세력으로 남았다.

자야푸스피타 세력은 1719년 파쿠부워노 1세가 사망한 후 벌어진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서 동인도 회사가 지지하는 계승자 아망쿠랏 4세(Amangkurat IV, 재위 1719–1726)에 반대하는 세 계승권 주장자 중 블리타르 공(Pangeran Blitar)을 지지하여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도 참전하였으나, 최종적으로 패배하였다. 자야푸스피타는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기 전 1720년대 초에 병사하였다.

3.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19–1723)

1719년 마타람의 파쿠부워노 1세가 사망하자 왕자 아망쿠랏 4세(Amangkurat IV, 재위 1719–1726)가 새로운 마타람의 수수후난이 되었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역시 자연스럽게 적법한 군주 아망쿠랏 4세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파쿠부워노 1세의 다른 아들 블리타르 공(Pangeran Blitar)과 푸르바야 공(Pangeran Purbaya)은 아망쿠랏 4세의 계승에 반대하여 1719년 6월 카르타수라의 궁을 습격하였다가 격퇴되었고, 블리타르 공과 푸르바야 공은 남쪽의 마타람 지역[2]으로 도피하여 세력을 규합했다. 그러자 파쿠부워노 1세의 동생 아랴 마타람 공(Pangeran Arya Mataram)도 세력을 이끌고 북부 해안의 즈파라(Jepara)로 가서 마타람 군주를 참칭하여, 아망쿠랏 4세와 세 명의 왕위 요구자 사이에서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하였다.

아랴 마타람 공은 1719년이 다 가기 전에 패배하여 항복하였고, 수수후난 아망쿠랏 4세의 명으로 즈파라에서 교살당했다. 블리타르 공과 푸르바야 공도 1719년 11월 아망쿠랏 4세의 중앙군에 패퇴하여 마타람 지역을 빼앗겼지만 항전을 지속하다 1720년에는 아직 수라바야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은 자바 동부로 피신하여 수라바야 반란군 및 운퉁 수라파티 잔당과 합세하였다. 이 시점에서 반란 세력의 규모가 무시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블리타르 공이 1721년 사망하고 수라바야 반란의 지도자 자야푸스피타마저 1723년 병사하자 반란 세력은 급속도로 힘을 잃어 갔다. 1723년 5–6월, 반란 세력을 이끌던 푸르바야 공과 수라바야 영주 수릉라나(Surengrana), 수라파티 잔당 지도자가 모두 항복하여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과 수라바야 반란이 아망쿠랏 4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수라바야의 수릉라나는 네덜란드령 실론으로 유배되었으며, 푸르바야 공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바타비아로 데려와 감시하며 유사시 아망쿠랏 4세를 계승하도록 선처하였다. 제2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네덜란드군의 군사적 역량은 오랜 내란으로 쇠잔한 마타람과 지방 세력들을 압도하였으며, 마타람 술탄국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사실상 보호국 처지가 되어 있었다.

4. 자바 전쟁(1741–1743)

4.1. 배경: 바타비아 화인 학살(1740)

자바섬 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무역 중심지 바타비아를 비롯한 여러 자바의 해안 도시에는 상당수의 화인(중국계)이 거주하고 있었다. 특히 바타비아에서는 네덜란드가 처음 진입하는 시점부터 동인도 회사의 고용 노동자로 화인을 데려왔으며, 네덜란드 세력의 진입 이전에도 치르본 등 여러 지역에는 화인 공동체가 있었다. 화인들은 공장과 농장 노동자, 상인, 중개인, 하급 관리 등으로 자바의 경제와 행정 방면에서 식민 세력에 필요 불가결한 파트너였다.

바타비아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화인(중국계) 인구는 18세기 전반 꾸준히 증가하여 1만 명에 달하였으며, 화인들이 축적해온 부는 점차 눈에 띄면서 유럽인의 위기감과 토착민의 질시를 샀다. 1730년대, 바타비아 및 인근에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수천 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화인들에 대한 여러 괴소문이 바타비아에 나돌기 시작하였고, 화인 집단에 대한 혐오 정서가 팽배하였다. 화인들 쪽에서도 이러한 반중국계 정서를 모르지 않았으며, 화인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은 동인도 회사 관리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이 쌓여 있었다. 특히 동인도의 화인 제당 노동자들은 1720년대부터 유럽으로의 설탕 유입량 증가와 서인도 제도와의 경쟁으로 촉발된 전세계적 설탕 가격 하락으로[3] 동인도 설탕 산업이 휘청이면서 궁핍해지고 있었다.

1740년, 국제 설탕 가격은 1720년의 절반으로 떨어졌고, 수출 가격 결정권자인 동인도 회사 관리들은 화인 노동자의 반발이 우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가격 인하를 단행하였다. 1740년 9월부터 바타비아 및 인근에서는 이에 따라 화인 제당 노동자들의 불만이 극에 달했고, 10월 1일 동인도 총독 아드리안 팔케니르(Adriaan Valckenier, 총독 재직 1737–1741)와 동인도 참사회(Raad van Indië)는 수천 명의 불만이 가득한 화인들이 바타비아 성벽 앞에 운집해서 시위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무시해 버렸다. 10월 7일, 제당 노동자를 중심으로 수백 명의 성난 화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오늘날의 자카르타 자티느가라(Jatinegara)와 타나아방(Tanah Abang) 지역에서 50명의 네덜란드 군인을 살해하였다.[4] 동인도 회사는 즉각 1,800명의 정규군 및 다수의 민병대를 투입해 화인들에 대한 전면적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화인들의 무기를 압수하기 시작하였으나 화인과 기타 거주민 집단 간 상호 불신과 공포는 커져만 갔고, 폭력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었다.

상황은 점차 무고한 화인과 화인 재산(가옥, 상점 등)에 대한 네덜란드인, 토착민 군인과 민병대의 일방적인 폭행, 학살, 파괴로 변해 갔다. 병원에서 화인 환자들이 화인이라는 이유로 병상에서 끌려내려가 살해당하는 일마저 벌어졌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아드리안 팔케니르 총독은 10월 11일 장교들에게 휘하 병력을 통제하라고 요청하였으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참사회는 오히려 화인들에 대한 폭력을 방조하였는데, 10월 13일 참사회는 항복하거나 살해당한 화인에게 두당 현상금을 걸어 화인들에 대한 폭력이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는 끔찍한 결과를 낳아, 현상금을 위해 학살에서 생존하여 도피하는 화인들까지 민병대의 사냥 표적이 되었다. 10월 22일, 팔케니르 총독은 모든 살해 행위를 중단하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했으나, 성명은 오직 사건의 원인으로 화인의 폭동만을 꼽았으며, 폭동에 참여한 일반 화인들에게는 사면을 약속했으나 화인 폭동 주동자들에게 막대한 현상금을 내걸었다. 대대적인 학살은 이를 기점으로 잦아들었으나 화인 재산에 대한 약탈은 11월 말까지 계속되었다. 11월 8일, 동인도 회사의 종주권을 받아들이는 치르본 술탄은 2천–3천 명가량의 군대를 바타비아 수비군으로 차출해 보냈다.

1740년 10월의 학살로 인해 바타비아에서만 화인 약 1만 명이 살해당하였으며, 최소한 약 500명의 화인이 부상당하고 화인 소유 가옥 600–700채가 약탈당한 후 불에 탔다. 학살 생존자의 규모는 학자들마다 추정치가 다른데, 적게는 600명에서 많게는 3,400명 정도가 생존하였다고 한다.[5] 바타비아 학살의 여파는 동인도 회사 직할령에 속하거나 직접 영향권에 속한 다른 자바 북부 해안 도시로 퍼져나가 1741년에는 스마랑에서, 나중에는 수라바야 그레식에서도 화인 학살이 발발하였다. 학살 이후, 바타비아 화인들은 관리를 위해 한동안 성벽 밖 화인 거주구(pecinan)에만 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화인 거주구를 나오기 위해서는 특별 통행권이 필요했다. 총독 팔케니르는 1740년 말부터 사임 의사를 밝혔으며, 1741년 말에 공식적으로 퇴임한 후 네덜란드 본토로 귀환하는 길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17인 위원회의 지시로 1742년 1월 25일 케이프타운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1742년 8월 바타비아로 끌려가 투옥된 채로 바타비아 학살 관련 혐의 등으로 재판을 받았다. 1744년 3월, 팔케니르에게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그의 모든 재산이 압류되었다. 팔케니르는 아직 조사가 끝나기 전인 1751년 6월 20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1755년 팔케니르에게 선고된 사형이 철회되었고[6], 1760년 그의 유족은 725,000휠던의 배상금을 받았다.

4.2. 케 판장의 도피와 파쿠부워노 2세의 지원

바타비아와 인근 지역의 학살 생존자 일부가 학살이 진행되던 와중 가딩믈라티 마을(Kampung Gading Melati)에 대규모 피난처를 구축하였고, 케 판장(Khe Pandjang)이라는 자가 이들을 지휘하였다. 그러나 가딩믈라티는 800명의 네덜란드인과 2천 명의 토착민으로 구성된 네덜란드군의 포위 공격을 받았고, 케 판장은 화인 생존자들을 무장시키고 조직화하여 포위를 뚫고 도피하였다. 이 전투에서 약 450명의 네덜란드군, 800명의 화인 사상자가 발생했다.[7] 케 판장의 무리는 우선 가까운 자바 서부의 반튼 술탄국으로 가서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튼 술탄은 도움은커녕 3천 명의 군대를 보내 이들을 막아섰고, 결국 케 판장은 자바 북부 해안을 따라 스마랑을 향해 동쪽으로 피난하였다. 케 판장의 무리는 이동하며 지역의 화인들을 흡수하여 조금씩 커져 갔다.

케 판장의 피난과 동시에 바타비아에서 벌어진 학살의 소식이 점차 해안을 따라 자바 북부와 북동부의 항구 도시들로 퍼져나갔고, 름방(Rembang), 드막(Demak), 그로보간(Grobogan) 등지의 화인 공동체에서 네덜란드 세력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이 커져 갔다. 1741년 2월 1일, 마침내 자바 북부의 파티(Pati, 드막과 름방 사이에 위치함)에서 창과 칼로 무장한 37명의 분노한 화인 폭도들이 동인도 회사의 사병 클라스 뤼턴(Claas Lutten)의 집에 쳐들어가 그를 살해하였다.[8] 자바인으로 구성된 진압군은 폭도 가운데 한 명을 붙잡아 죽이고 머리를 벤 후 장대에 꿰어 본보기로 스마랑 한가운데 내걸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자바 주둔군 사령관 바르톨로뫼스 피스허르(Bartholomeus Visscher)는 이 시점까지도 화인의 대대적인 반란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으며, 여러 군의 군수(대개 자바인)에게 수상쩍은 행동을 보이는 화인을 체포하여 사살하라는 권고를 보냈다.

1740년 말, 마타람의 수수후난 파쿠부워노 2세(재위 1726–1749)는 바타비아의 정황과 화인 무리가 동쪽으로 이동 중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신하들과 함께 대처 논의에 들어갔다. 1740년부터 1741년까지 파쿠부워노 2세의 행보는 기회주의적이었는데, 그는 겉으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약간 우호적이었으나 휘하 장군 자야닝랏(Jayaningrat)과 치트라소마(Citrasoma)에게는 상황을 관망하며 화인과 동인도 회사 사이의 전투에서는 중립을 취하면서 최대한 많은 화인들이 안전히 도피하도록 도우라는 명령을 내렸고, 반네덜란드 성향이 강한 그로보간의 군수 마르타푸라(Martapura)에게는 그로보간 지역에서 화인들의 반네덜란드 감정을 자극하도록 선동케 하였으며, 이브라힘(Mas Ibrahim) 등 일부 주전파 자바 귀족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공격하는 데 자금을 지원하였다. 한편 파쿠부워노 2세 본인은 카르타수라의 궁전에 머물면서 궁전의 노대 수리 사업에 몰두하는 척하며 동인도 회사의 의심을 피했다.[9] 피스허르는 파쿠부워노 2세의 책동에 대한 첩보를 입수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동인도 회사에 호의적이었던 파쿠부워노 2세를 한동안 여전히 신뢰하였다.[10]

4.3. 자바 북부 화인 반란

1741년 4월, 분노한 천여 명의 화인 행렬이 탄중(Tanjung)에 이르렀고, 화인 세력이 직접적으로 스마랑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11] 스마랑에 머물던 피스허르는 탄중 군수에게 화인 반란군을 저지하라고 요구하였으나 탄중 군수의 군대는 출격하기 전 고품질의 쌀을 요구했다. 동인도 회사가 급히 쌀을 조달해 보내자, 탄중 군수의 군대는 화인 반란군과 맞서는 척하며 사정거리 밖에서 사격하고 물러갔고 화인 세력은 거의 방해받지 않고 이동하였다. 다급해진 피스허르는 파티, 즈파라(Jepara), 쿠두스(Kudus) 등지의 군수에게 화인 반란군을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는데, 마타람에 충성하는 군수들은 540여 명의 병력을 모아 탄중으로 보내고 슬며시 마타람의 수도 카르타수라로 이동했고, 탄중으로 간 그들의 군대는 마찬가지로 전투하는 척하다 스마랑으로 철수해 버렸다. 군수들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피스허르에게 파쿠부워노 2세는 나중에 그들에게 6천 명의 군대를 맡겨 돌려보낼 테니 동인도 회사가 참전 보상금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유사한 시점에 자바 북부 해안 지대 다수 지역에서 화인들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지배에 반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드막과 그로보간에서는 화인 무리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국을 세우고 싱세(Singseh)를 자신들의 군주로 옹립하였다.[12] 파쿠부워노 2세의 밀명을 받은 그로보간 군수 마르타푸라는 화인 반란군과 대강 전투를 벌이는 척하다 물러났는데, 마르타푸라는 휘하 병사가 스스로 아군의 군마를 사격하게 해두고 네덜란드군이 도착하자 군마의 상처를 보여주며 이처럼 격렬한 전투가 있었노라 하며 네덜란드군을 기만하였다.[13] 한편 1727년 파쿠부워노 2세가 임명한 라슴 공작(adipati) 위댜닝랏(Tumenggung Widyaningrat)은 본명이 '우이 잉 키앗'(Oei Ing Kiat)인 부유한 화인 무슬림이었는데, 바타비아의 화인 피난민 일부가 라슴에 도착하고 보호를 요청하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위댜닝랏 이하 라슴의 자바인, 화인 전체가 합심하여 네덜란드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1741년 4월 말, 화인과 자바인이 합세한 수천의 반란군 무리가 스마랑에서 지척인 그로보간에 모였다는 소식이 스마랑에 퍼졌다. 피스허르는 신경질적으로 사태에 대응하며 불필요하게 주변의 반감을 샀고, 공황 상태에 빠진 일부 스마랑 주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탈출하기도 했다. 5월 초, 투반(Tuban), 그로보간, 칼리웅우(Kaliwungu), 큰달(Kendal) 4개 군의 군수들이 파쿠부워노 2세가 약속한 6천 명의 군세를 정말로 이끌고 스마랑에 나타났다.[14] 동시에 5월 11일, 파쿠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를 축출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동인도 회사 직할령이었던 중북부 해안 지대 전체의 군수들에게 마타람 왕실에 충성할 것을 요청했다.[15]

1741년 5월 23일, 탄중을 출발한 1천 명가량의 화인 반란군이 주와나(Juwana)의 소규모 동인도 회사 초소를 공격하였고, 름방에서도 반란군이 동인도 회사 초소를 공격하여 본격적인 자바 전쟁이 시작되었다.[16] 주와나를 휩쓴 화인 반란군은 곧이어 스마랑으로 진격하여 파쿠부워노 2세가 보낸 마타람군의 협조 하에 스마랑을 포위 공격하였다. 피스허르는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자제력을 잃고 충직한 동인도 회사의 화인 장교 앙코(Anko)와 용코(Jonko)를 붙잡아 참수했고, 모든 화인을 죽이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후자의 비현실적인 명령은 실행되지 못했다. 스마랑 포위전과 동시에 자바 북부 각지에서 화인 반란군의 진격은 계속되어 화인 세력은 7월 27일까지 름방 전역을 점령하였고, 7월 31일에는 북부의 주요 항구 즈파라를 함락하였다. 만약 중부에서 동인도 회사의 세력 중심 스마랑마저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지게 된다면, 네덜란드 세력은 결국 17세기처럼 바타비아 인근에 국한된 영역으로 후퇴해야 할 것이었다.[17]

4.4. 차크라닝랏 4세의 개입

당시 마두라 서부 방칼란 공국은 마타람과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양측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방칼란군은 17세기 중반의 트루나자야 봉기에서 마타람 수도 플레렛을 점령하는 등 용맹한 군대로 이름이 있었다. 방칼란의 군주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로의 진출을 꿈꾸며 1730년대부터 자바 동부의 여러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고, 특히 블람방안 지역에서 발리인들과 세력 경쟁을 벌였지만, 마타람 왕실과 방칼란의 관계는 파쿠부워노 2세의 여동생이 차크라닝랏 4세의 공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건으로 인해 틀어져 있었다.

이런 가운데 자바 중북부에서 네덜란드 세력이 위기에 처하자 차크라닝랏 4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자신의 세력으로 원조를 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하였다.[18] 동인도 회사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차크라닝랏 4세의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 북부에 방칼란군을 보내 화인 반란이 진행 중이거나 화인 세력의 위협을 받던 그레식, 수라바야, 투반, 지팡(Jipang) 등지에서 네덜란드군을 돕게 하였으며, 네덜란드의 신뢰를 얻기 위해 마타람 왕실과의 관계를 끊고 공비(파쿠부워노 2세의 여동생)를 카르타수라로 돌려보냈다. 방칼란군은 진주한 지역에서 화인들을 무차별 공격하였는데, 1741년 7월 12일까지 수라바야와 그레식에서 모든 화인들은 살해당하거나 도시를 떠나 도망쳤다.[19]

1741년 7–8월, 카르타수라의 네덜란드 통감(resident) 요하네스 판펠선(Johannes van Velsen) 휘하 네덜란드군 요새는 파쿠부워노 2세의 마타람군과 화인 반란군의 협공으로 함락되었고, 판펠선은 붙잡혀 처형당했다.[20] 한편 케 판장의 화인 반란군은 이제 트갈(Tegal)을 노리고 있었다. 스마랑 포위는 지속되었고, 불안정한 피스허르는 해임되고 스마랑의 네덜란드군 지휘는 아브라함 로스(Abraham Roos)가 맡게 되었다. 로스의 부임 후 스마랑으로 네덜란드 증원군이 도착하고 로스가 방어 태세를 새로이 하여 스마랑은 간신히 임박한 함락을 면했다.

1741년 11월, 스마랑은 약 3,400명의 네덜란드 수비군(절반 정도가 유럽인)이 약 3,500명의 화인 반란군과 2만 명에 달하는 자바군(파쿠부워노 2세의 마타람군)의 포위 하에 놓인 형국이었는데[21], 로스가 지휘하는 네덜란드군은 우세한 화력과 뛰어난 전술로 포위를 깨뜨리고 수적으로 포위군의 주력이었던 마타람군을 퇴각시켜 마침내 1741년 말까지 포위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스마랑의 승리에 고무된 네덜란드 세력은 즈파라 수복을 위한 원정을 준비할 수 있게 되었고, 각지에서 방칼란군의 네덜란드 측 가세로 화인 세력의 공세는 지지부진해졌다.[22] 이를 기점으로 자바 전쟁의 판세는 네덜란드–방칼란 연합군 쪽으로 크게 기울게 되었다.

4.5. 파쿠부워노 2세의 변심과 수난 쿠닝 반란

1742년 초, 파쿠부워노 2세는 불리해져 가는 전황을 보며 네덜란드에 반기를 든 것을 후회하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 마타람군은 네덜란드에 대한 적대 행위를 중지하겠다고 알렸다. 1742년 3월 동인도 회사의 호헨도르프 남작(Baron von Hohendorff)이 카르타수라 궁으로 파견되어 마타람과 동인도 회사 간의 화평 조약이 체결되었다.[23] 파쿠부워노 2세를 믿고 있던 화인 반란 세력과 자바인 주전파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더 이상 네덜란드에 굴복한 파쿠부워노 2세를 자신들의 군주로 인정하지 않고 당시 16세였던 아망쿠랏 3세의 손자 가른디(Raden Mas Garendi)를 1742년 4월 6일 파티(Pati)에서 새로운 수수후난 아망쿠랏 5세(Amangkurat V)로 옹립하였다.[24] '수난 쿠닝'(Sunan Kuning), 즉 '황색의 왕'이라는 별칭으로 더 유명한 아망쿠랏 5세는 자바인과 화인의 군주로서 반네덜란드 세력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었다. 반란군의 다른 지도자였던 싱세도 드막 지역에서 1742년 6월 4천 명의 화인 반란군을 거느린 채로 건재하였고, 곧 수난 쿠닝의 세력에 합세하였다.

1742년 6월 19일, 수난 쿠닝을 받드는 자바인 지휘관 유다나가라(Kyai Mas Yudanagara)가 이끄는 자바인 군대가 카르타수라를 떠나 수난 쿠닝의 세력에 합세하였다. 유다나가라의 자바 반란군과 케 판장의 화인 반란군은 합세하여 6월 30일 파쿠부워노 2세가 있는 마타람의 수도 카르타수라를 공격하였고, 2천 명가량의 마타람 수비군을 무찌르고 곧 카르타수라를 점령하였다. 파쿠부워노 2세와 가족들, 가신들, 그리고 호헨도르프 남작은 솔로강(Bengawan Solo)을 건너 마그탄(Magetan)과 포노로고(Ponorogo)로 피신하였고, 도주한 파쿠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와 차크라닝랏 4세에게 간곡히 도움을 요청했다.[25] 1742년 7월 1일, 수난 쿠닝은 카르타수라에서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카르타수라의 수수후난이 되어 여러 반란군 지도자에게 작위를 내렸다. 수난 쿠닝 휘하 자바인 반란군 지도자 사잇(Raden Mas Said, 후일의 망쿠나가라 1세)과 화인 지도자 싱세는 공동으로 다시 스마랑을 노리고 공세를 취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상승세는 여기까지였다. 1742년 7월 말, 싱세의 화인 반란군은 파쿠부워노 2세에게 충성하는 자바인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했고, 비슷한 시점에 네덜란드 원정군에 의해 싱세의 거점이었던 드막이 함락되었다. 싱세는 반란군이 잠시 점령하였던 동부의 수라바야로 이동하였지만 곧 네덜란드군에 포위되었다. 1742년 8월 28일에는 네덜란드군에 의해 쿠두스가 함락되었다.[26] 사잇과 케 판장은 조금 더 버텼으나 네덜란드군, 방칼란군, 파쿠부워노군에 의해 여러 차례의 패배가 누적되어 갔고, 1742년 말이 되자 스마랑 공격은커녕 세력의 유지에 급급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4.6. 카르타수라의 함락과 전쟁의 종결

1742년 11월, 반군 세력은 자바 각지에서 패주하거나 항복하고 있었고, 수난 쿠닝의 거점 카르타수라는 솔로강을 도하한 방칼란군, 응아위(Ngawi) 방면에서 온 파쿠부워노군, 웅아란(Ungaran)과 살라티가(Salatiga)에서 온 네덜란드군에 의해 삼면에서 협공을 받았다. 1742년 12월, 마침내 카르타수라가 함락되었고, 방칼란군이 17세기 중반과 제1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 이어 역사상 세 번째로 마타람의 수도에 점령군으로 입성하였다.[27] 수난 쿠닝은 카르타수라를 버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였다. 동월 케 판장의 군대가 자바 남부에서 패배하자, 싱세는 마침내 희망을 버리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항복 협상에 들어갔다. 차크라닝랏 4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파쿠부워노 2세를 불충실한 통치자의 표본으로 처형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동인도 회사는 여전히 파쿠부워노 2세가 통치하는 마타람 세력과의 협상으로 자바를 안정화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완곡히 거절하였고, 오히려 전후 방칼란 세력의 대두를 염려하기 시작하였다.

1743년 2월, 화인 반란군과 파쿠나가라(Pakunagara)가 이끄는 자바인 반란군이 마지막으로 네덜란드 연합군과 자바 남부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였다.[28]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반란군에 대해 항복하면 죄를 묻지 않을 것이라고 공표하였고, 이에 반란군은 결정적으로 와해되었다. 동월 싱세가 수라바야에서 항복한 것을 비롯하여 반란군 세력의 많은 지도자와 병사가 네덜란드에 항복하였다. 케 판장의 세력도 와해되었으나, 케 판장 본인은 항복하지 않고 도주하였다. 케 판장은 도피 생활을 지속하며 나중인 1758년에 발리에서 목격되었으나,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수난 쿠닝과 마지막 반란군 세력은 자바 이곳저곳으로 도피하며 한동안 추격전을 벌였으나 1743년 9월 마침내 수라바야에서 항복하였다. 항복한 반란군 지도자 싱세와 수난 쿠닝은 네덜란드에 의해 실론으로 유배되었다.

1743년 초, 전황이 안정되자 한때 네덜란드에 반기를 들었던 파쿠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이후의 관계를 규정하는 굴욕적인 조약을 맺어야 했다. 파쿠부워노 2세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자바 북부와 동부의 많은 영토(수라바야, 름방, 즈파라) 및 마두라 서부(방칼란 공국)를 추가로 할양하였고, 매년 8,600톤의 쌀을 제공해야 했으며, 이에 더해 마타람 신민이 자바, 마두라, 발리 밖으로 항해하는 것이 한동안 금지되었다.[29] 간신히 권좌로 복귀한 파쿠부워노 2세는 약탈로 황폐화된 수도 카르타수라를 버리고, 솔로강 유역의 수라카르타에 새로 왕궁을 짓고 1745년 이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4.7. 전후: 차크라닝랏 4세의 반란(1745)

자바 전쟁이 끝난 후 방칼란의 차크라닝랏 4세는 마침내 자바 동부 진출의 숙원을 이룰 수 있으리라 믿고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자바 동부의 영토와 여러 이권을 요구하였으나, 방칼란 세력에 위협을 느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차크라닝랏 4세의 요구를 거절했다.[30] 이에 차크라닝랏 4세는 자바 동부 수라바야 및 인근의 영주들과 당시까지 남아 있던 운퉁 수라파티 잔당과 연합하여 동인도 회사에 대한 자바 동부의 채무 지불을 중단시켰다. 1744년 7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차크라닝랏 4세와 협상하려 했지만 차크라닝랏 4세는 거부하였다.

1745년 2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차크라닝랏 4세를 반란자로 규정하고 그의 폐위를 선언하였다. 이에 차크라닝랏 4세는 방칼란군을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마두라 동부와 자바 북부, 자바 동부를 침공하였다. 다시 한 번 파수루안에서 름방에 이르는 지역에 반네덜란드 반란의 불길이 타올랐으나, 1745년이 다 가기 전에 네덜란드는 승기를 잡았다. 패퇴한 차크라닝랏 4세는 보르네오 남부 반자르 술탄국 반자르마신(Banjarmasin)으로 도주하여 영국 함대로 망명하려 했지만 결국 1745년 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붙잡혔다. 체포당한 차크라닝랏 4세는 174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령 케이프 식민지의 희망봉으로 유배되었다.[31] 동인도 회사에 의해 차크라닝랏 4세의 아들이 차크라닝랏 5세(재위 1745–1770)로 즉위하고 전쟁이 끝난 후 방칼란은 약화되어 더 이상 네덜란드에 반항하지 않았고,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일개 지방 공국으로 존속하였다.

4.8. 전쟁 이후

자바 전쟁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자바에서 넓은 영토를 획득하고 재정적으로도 큰 이득을 취할 수 있었지만, 이는 마타람 술탄국을 더한층 강하게 압박하여 빼앗은 것이었으므로 마타람의 왕족, 귀족들 가운데 반네덜란드 정서가 심해지고 있었다. 한편 중부 자바에서 격렬한 전쟁이 벌어진 전장 중 상당수는 동인도 회사의 영역에 속한 곳이었고, 여러 번 위기에 몰리며 동시다발적으로 전투를 수행한 관계로 동인도 회사 측도 인적, 물적 소모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차크라닝랏 4세의 반란이 진압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동인도 회사는 마타람의 반네덜란드 세력과 격렬한 또 한 차례의 전쟁(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 전쟁에서는 고전하다가 결국 반란군 지도자들과 협상하여 전쟁을 끝내야 했다.

1740년대의 자바 전쟁은 당시까지 자바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역할은 없던 화인들이 본격적인 정치적, 군사적 행위자로 등장한 사건이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화인 학살과 자바 전쟁을 겪은 후 바타비아 등지의 화인 공동체는 빠르게 복구되었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학살과 전쟁 와중 피어오른 종족 집단 간의 증오심은 차차 희미해져 갔다. 그러나 학살과 전쟁의 기억 자체는 결코 잊히지 않았고, 후대에 역사서 바깥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소환되고 문화적으로 재현되는[32]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현대 인도네시아의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았다.

자바 전쟁은 인도네시아 경제사에서도 하나의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 이전부터 불안하던 자바 설탕 산업은 자바 전쟁으로 1740년대 사실상 정지 상태에 빠졌고, 1750년대부터 조금씩 회복되었지만 규모는 18세기 초의 전성기에 비해 축소된 상태로 정체되었다. 자바 전쟁으로 화인들의 손으로 굴러가던 자바 제당업이 몰락했던 것이다. 자바 제당업은 그 이후 근근이 유지되었고, 자바가 세계적 주요 설탕 생산자로서 과거의 위세를 회복하기까지는 한 세기가 넘게 걸렸다.[33]

5. 제3차 자바 왕위 계승 전쟁(1749–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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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디파나가라 전쟁(1825–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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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참고 문헌



[1] 18세기 중반 반튼의 내부 반란, 18세기 후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블람방안 원정, 19세기 초 영국의 자바 침공, 19세기 초 영국의 욕야카르타 침공, 기타 18세기와 19세기의 소규모 반란들 등 [2] 이때의 '마타람'은 마타람 술탄국이 아니라 대략 오늘날의 욕야카르타 지역에 해당하는 좁은 의미의 자바 지명 마타람이다. [3] (Ota 2006, 133) [4] (Setiono 2008, 111–113) [5] 인도네시아 역사학자 베니 스티오노(Benny G. Setiono)는 특히 약 500명의 수감자와 환자가 살해당했으며, 3,431명이 학살에서 생존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Setiono 2008, 119–121) [6] (Setiono 2008, 125–126) [7] (Raffles 1830, 235) [8] (Setiono 2008, 135) [9] (Ricklefs 1983, 275) [10] (Setiono 2008, 139) [11] (Setiono 2008, 137) [12] (Raffles 1830, 235–236) [13] (Raffles 1830, 239) [14] (Setiono 2008, 142) [15] (Setiono 2008, 143) [16] (Setiono 2008, 145), (Ricklefs 1983, 272) [17] (Setiono 2008, 147) [18] (Setiono 2008, 148) [19] (Setiono 2008, 147) [20] (Setiono 2008, 147), (Raffles 1830, 241) [21] (Setiono 2008, 145), (Raffles 1830, 281) [22] (Raffles 1830, 281) [23] (Setiono 2008, 150) [24] (Setiono 2008, 156), (Raffles 1830, 242) [25] (Setiono 2008, 152–153), (Raffles 1830, 282) [26] (Setiono 2008, 155) [27] (Setiono 2008, 157), (Raffles 1830, 282) [28] (Raffles 1830, 244) [29] (Setiono 2008, 161) [30] (Setiono 2008, 161) [31] (Setiono 2008, 161–162) [32] 최근의 예로는 현대 인도네시아 소설가 익사카 바누(Iksaka Banu)의 단편 소설 〈별똥별〉(Bintang Jatuh) 정도를 들 수 있다. [33] 1780년대부터 근대적 사탕무당 대량 생산이 이루어지기 시작하면서 설탕 업계에서는 기계에 의존한 소위 '설탕 혁명'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중국, 인도 등지에서 구식 제당업이 19세기 말까지 몰락하는 가운데, 19세기 말 아시아의 전통적 설탕 주요 수출지 가운데 유일하게 자바에서만 동인도 정부의 노력으로 첨단 과학기술이 접목된 근대적 제당 산업이 정착해 자바는 쿠바 다음의 세계 2위 설탕 수출지가 되었다. 이러한 자바 설탕 산업의 흥성은 20세기 전반까지 이어졌다. (김병준, 고일홍 2023, 15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