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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9 17:44:35

이종진(의사)

이종진
李宗珍
<colbgcolor=#E61E2B><colcolor=#fff> 출생 1916년 5월 11일 ~ 1994년 10월 19일
충청북도 괴산
가족 관계 1남 1녀 중 외아들
학력 괴산보통학교 (졸업)
청주고등보통학교 (졸업)
평양의학전문학교 (졸업)
존스홉킨스대학 (공중보건학 / 석사)
경성제국대학 (소아과학 / 박사)
경력 대한소아과학회 부회장(1961)
국제가족계획연맹 서태평양지구 의장(1965)
대한결핵협회 상임이사
한국기생충박멸협회 이사장(1967)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장(1971)
한국기독의사회장(1972)
국제가족계획연맹 부회장(1977)
은퇴(1982)

1. 개요2. 생애3. 일화4. 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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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의사.

2. 생애

충청북도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청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에서 담임교사와 의논 끝에 평양에 있는 평양의학전문학교를 지원하였다. 평양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공중보건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하여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보건사회부 의정국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이후 을지로에 있는 국립의료원(메디컬 센터) 초대 원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소아과학회에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하여 부회장 및 의장을 역임하였고, 국제 가족연맹 서태평양지구의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를 하였다.

이후 한국기생충박멸협회 회장직, 한국 스칸디나비아 재단 이사장직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대한가족계획협회 이사장으로 선임되고 약 11년간 이사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기독의사회 회장, 유엔 세계인구회 한국대표, 국제 가족연맹 부의장, 서울 국제로타리클럽 회장 등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1970년 국민훈장 동백장, 1972년 스웨덴 북극성 기사장을 수여받았다.

3. 일화

그의 부모님은 이종진을 키우며 어떤 직업을 택해야 좋을지 늘 기도하였다. 이종진은 어릴적부터 머리가 영특하여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한글을 터득했고 교회를 다니며 주일 학교에서 배운 노래는 집에 와서도 열심히 불렀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열심히 불렀던 찬공가는 '예수 사랑하심은'으로 특히 1절 내용인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를 좋아했다.

이종진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주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였고 담임교사를 만나 자신의 진로를 상담하며 의사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의사의 일이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의학전문 학교에 합격할 당시 게시판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이종진이가 합격했다"라고 외쳤다. 그 당시는 전화 시설이 없었기에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바로 고향으로 내려가 합격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학교에 합격한 후 그는 전문학교 교장 선생님의 특별한 배려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이종진은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공중보건학 석사과정을 진행했다.

그가 대한소아과학회에 참여해 활발한 활동을 할 당시, 학회에 참여했던 회원들이 그를 부회장으로 추대하였고 그의 열심에 놀라며 회원들이 이종진 박사는 국제적인 감각이 뛰어나기에 국제적으로 활동을 해야한다며 그를 지지하였다. 이로 인해 그는 국제 가족연맹 서태평양지구의회에 한국 대표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의 학술 강연에 놀란 회원들은 이종진 박사를 대한소아과학회 의장으로 선출하게 된다.

이러한 국제 협력 사업 경험을 통해 이종진은 일본 및 국제 관계자들과 친분을 쌓게 되었고 부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기생충박멸협회의 운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당시 보건국장을 맡고 있는 한상태를 통해 이종진에게 기생충박멸협회를 맡아달라고 부탁하게 된다. 일본에서 조직가이자 행정가로 기생충 관리와 계족계획을 진행하여 성공한 구나이가 이종진을 선임한 정부의 인사를 "실로 계략적인 것"이라며 좋게 평가하였다.

그가 국립의료원 원장시절, 의료복지의 실현을 위해 국비환자와 사비환자를 구별하지 않고 진료해야한다는 지론을 펼쳤고 경제기획원과 농림부 등을 쫓아다니며 환자의 급식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보고 관계부처에서는 그를 '거지 대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그를 조롱했다.

4. 업적

그가 기생충박멸협회에 회장이 되기 전의 기생충박멸협회는 "똥물에 튀겨 먹을" 정도의 불안정한 운영과 심각한 재정난으로 국정감사에서 문제를 지적당해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이 필요할 정도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종진이 부임되고 난 이후,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민관 양 측에서 상당한 경험과 신망을 얻고 잇는 그는 기존의 갈등을 잘 조정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정부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국제 경험도 풍부한 그의 부임으로 인해 일본과의 렵력 논의가 급 물살을 타게 되었고 그가 임명된 직후인 1967년 11월 30일에 바로 일본 측에 정식으로 '원조 요청서'를 작성해 발송했다. 이에 구니이는 국제 의료 협력에 참여하여 구축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일본 정부 관계자들에게 한국에 대한 기생충 관리 협력 사업을 요청했다.1968년 6월 정식으로 OTCA 차원의 조사단을 파견해 최종적으로 한국의 실정을 확인한 뒤 검친차, 현미경, 윈심불리기, 구충제 지원을 약속하는 사전 협약을 맺었다.

기술적 자원을 바탕으로 '집단 검진, 집단 투약'의 경제적 자립을 중시하는 '일본식 방법'이 도입되었고 이는 이후 한국 기생충 사업을 특징 짓는 중요한 기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