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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L그룹의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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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대
이용구 (2006~2011) |
DL그룹 초대 회장 이재준 李載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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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7년 7월 30일 |
경기도
시흥군 남면
산본리[1] (現 경기도 군포시 산본신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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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95년 11월 29일 (향년 78세) |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1-369번지 자택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전주 이씨[2] |
학력 | 군포공립보통학교 (졸업) |
직업 | 기업인 |
부모 |
아버지 이규응 어머니 양남옥 |
형제자매 |
형
이재형 남동생 이재원 남동생 이재우 남동생 이재연 |
배우자 |
이경숙[3] 박영복 |
자녀 |
장남
이준용 차남 이부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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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림그룹(현. DL그룹)의 창업주이다. 호는 수암(修巖)이다.제11대 국회의원 및 재선 안양시장을 지낸 이석용은 5촌 당질(堂姪)이다.
2. 생애
1917년 7월 30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 산본리(現 군포시 산본신도시)에서 아버지 성재(省齋) 이규응(李奎應, 1882. 9. 1 ~ 1948. 8. 15)[4]과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 梁氏) 양남옥(梁南玉, 1886. 7. 10 ~ 1962. 11. 4)[5] 사이에서 5남 4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규응은 조선 선조의 서7남 인성군의 10대 종주이자 9대 종손(宗孫)으로, 1919년부터 1927년까지 시흥군 남면 면장을 지냈다.그 당시 기준으로 고등교육을 수료한 형 이재형과는 달리 군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한성정미소'를 설립해 사업을 시작했다. 1939년 10월 10일에는 대림그룹의 모태가 된 '부림상회'를 세워 건설자재만 취급하다가 8.15 광복 후인 1947년 6월부터 '대림산업'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이후 특유의 근검절약과 성실함으로 대림산업을 국내 굴지의 건설업체로 키워냈으며, 1954년에는 서울증권을 세우고 1977년에는 대림대학교의 전신인 '대림공업전문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1980년에는 기아기연을 인수해 현재의 오토바이 전문 메이커 대림자동차로 키워냈다. 1976년에 금탑산업훈장을, 1981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여받았다.
생전에 그는 건설공사 현장을 시찰하면서 구부러진 못 하나가 떨어져 있어도 곧바로 불호령을 내리는등 부하직원들에게 틈만 나면 절약을 강조할 정도였으며, 또 시간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는 등 매사가 철두철미했다. 또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앞에 나서는 것도 꺼려 보수적인 기업인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주위의 어려운 사람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따뜻한 일면도 지녔다.
1988년에는 장남 이준용을 부회장으로 부임시켜 권력을 사실상 승계했음에도 일선에서 업무를 수행해오다가 1993년 명예회장으로 완전히 물러났다. 그 뒤엔 독서와 운동으로 여생을 보내다 1995년 11월 27일부터 병세가 악화되어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등지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차도가 없어 결국 자택으로 돌아왔고, 1995년 11월 29일 오후 9시 30분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1-369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