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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20:39:28

이소응(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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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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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紹膺
1110년 이전[1] ~ 1180년( 명종 10)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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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중기의 장군. 무신정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인물.

2. 생애

초반의 삶에 대해서는 서술된 기록이 없는데 『 고려사』 「열전」에도 그와 같이 정변을 일으켰던 인물들은 상당수가 반역이든 아니든 간에 기록된 것을 고려하면 상당히 특이한 부분이다. 1170년(의종 24년) 대장군으로 보현원에 행차하는 의종을 호송하였는데 도중에 수박 대회에 참여했다가 지쳐서 기권하고 나왔다. 그런데 젊은 문신 한뢰가 이를 보고는 이소응의 뺨을 때려서 거기에 맞고 나가 떨어지는 큰 모욕을 당하였다. 당시 이소응은 무신이 오를 수 있는 2번째로 높은 지위[2]인 대장군에 있었고 환갑을 넘은 노인이었다. 시대상을 생각하면 거의 최고참 원로 수준의 인물이었고 그런 사람이 혈기 넘치는 젊은이들과 대등하게 겨루기 힘든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거의 새내기나 다름없는 젊은 문신 한뢰가 때리고[3] 의종과 문신들은 그걸 보고 낄낄대기나 하니 결국 무신들이 폭발한 것이다.[4]

평소부터 무신들은 천대와 푸대접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던 차에 이 사건이 불씨를 지핀 셈이다. 결국 이소응은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마구 참살하고 마침내 의종을 폐위시켜 무신정권을 세웠다. 무신정권이 성립한 후 그는 참지정사에까지 올랐고 정중부 세력에 가까웠기에 정중부 집권시에 승승장구했으며 이후 경대승 정권[5] 때도 경대승과 사돈관계[6]였기에 경대승이 집권한지 1년 후에 사망했어도 그의 가문은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딱히 최고집권세력가에게 도전하지 않은 데다 무신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원로였기에 아무도 함부로 대하지 않은 탓도 있다. 무신정변을 일으켰던 주요 인물들의 상당수가 좋지 않은 결말을 맞이한 것을 고려해보면 드물게도 거의 완벽한 수혜자로서 살다 갔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늙어서도 봉록에 집착해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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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신정변이 일어나던 1170년에 환갑을 이미 넘었기에 늦어도 1110년 이전에는 태어났다. [2] 가장 높은건 상장군으로 당시 정중부가 상장군이었다. [3] 때린 것마저도 큰 원한 같은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모욕의 의미로 때린 것이다. [4]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 국방부장관 앞에서 합동참모의장의 뺨을 순전히 모욕하려는 의미로 새내기 서기관이 때린 셈이다. 지금 시대에는 큰일나겠지만 당시 고려는 대놓고 무신을 하대하고 무신의 이권을 계속 줄여나가던 상황이어서 이런 행각을 벌인 한뢰가 징계나 처벌을 안 받을 수 있었다. [5] 경대승이 정중부를 죽였지만 경대승의 아버지인 경진은 오랫동안 친 정중부 세력이었다. [6] 이소응의 딸 중 1명이 경대승의 동생과 결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