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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6:14:35

이도영(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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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만화박물관에 전시된 이도영 삽화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민보에 게재된 삽화( 이도영 作)가 근대적 한국 만화의 시초다.[1]

1. 개요

이도영은 1909년( 융희 3년), 대한민보에 발표된 만화로, 한국 시사만화의 시작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대한민보에 1909년( 융희 3년) 6월 2일 창간호부터 1910년 8월 31일 폐간될 때까지 1년 2개월 동안 시사 삽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대한민보가 창간된 시기인 대한제국 말기에, 국운이 쇠해갔던 당대에 대한 통렬한 비평을 담고 있다.

2. 행적

이도영은 18살이 되었을 때 조선시대 화가였던 조석진 안중식의 문하생이 되어 전통적인 기법에 다양한 소재를 접목시켜 자유로운 화법을 펼쳤다. 그의 화가로서의 기여뿐만 아니라 1918년에는 "고희동, 조석진, 안중식" 등 13인 발기인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립하며 민족 운동에도 앞장섰다. 이도영의 활동은 근대기 교과서 삽화와 잡지 표지 등을 통해 활발했으며, 1910년대 딱지본 소설책의 표지뿐만 아니라 『홍도화』, 『옥중가인』, 『옥중화』 등 다양한 작품을 그려냈다. 그의 표지 작품은 근대 초기의 고급스러운 문화상품으로 꼽히며, 한국 출판사의 근대 표지 디자인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2.1. 작품

파일:대한민보 만평.png
<colbgcolor=#07446e> 1910년(융희 4년) 6월 23일 자 《대한민보》 만평.
통감부 깃발을 든 일본 관료 양 옆의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만평을 그린 화가 이도영은 "한쪽에서 울며 청하고, 한쪽에서 구걸하는 상황이 참 가관이다"라고 적어두었다.

3. 기타


[1] 일제와 기득권층의 탄압에 대한 풍자 만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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