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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파평 윤씨 |
출생 | 1896년 9월 11일 |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1] | |
사망 | 1964년 4월 13일 |
경상남도 남해군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27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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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1896년 9월 11일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의리에서 태어났다.1919년 4월 2일 같은 마을 주민인 이예모(李禮模)가 하동군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독립선언서를 구해와 그를 비롯해 인근 문항리에 사는 정순조· 정몽호· 정학순을 초청하였다. 이때 이들은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서당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에게 계획을 알리고 참가를 권유하였다.
이튿날인 4월 3일 오후 3시경, 그는 많은 시위군중들을 인솔해 설천면 남양리 도로 위에 모였다가 이예모가 독립선언서 낭독을 마치자 태극기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면 읍내를 향하여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대열이 고현면(古縣面)에 이르렀을 때, 고현면장 김치관(金致寬)[2]은 경찰주재소에 밀고했고, 이에 남해면 읍내 장날이던 내일 다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기로 하고 일단 해산하였다.
이튿날 아침 그는 남해면 장터로 먼저 갔다가 그날 오후 3시경 장꾼들이 1천여명으로 늘어나자, 전날의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시위군중은 약속된 신호에 따라 가슴에 숨겨 온 태극기를 꺼내들고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군중은 남해군청·우체국·학교·헌병대 주재소에 들어가 관리들을 끌어내어 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으며, 경찰간부의 모자와 대검을 빼앗아 내동댕이쳤다.
주재소의 경찰들이 어쩔 줄 몰라 하자, 고현면장 김치관은 다시 경찰 경비전화를 이용하여 사천(泗川)경찰서에 응원 요청을 하였다. 그는 이 사실도 모르고 날이 저물어 자진 해산하려 하다가, 김치관의 이같은 소행을 알고는 고현면 이어리(伊於里)에 있는 김치관의 집을 파괴한 후 해산하였다.
그러나 그 뒤 일본 경찰의 검속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그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였으나, 9월 2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은거하다가 1964년 4월 13일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10월 28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