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나폴레옹이 1804년 말, 황제 즉위식 직후 벌어진 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제일 첫 번째 국면을 차지하는 전역이다.당시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가 벌어졌던 1801년의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성황리에 마무리짓고 돌아와서는 종신 통령에 취임해 프랑스의 사회 제도나 여러 제도를 완성시키면서 당시의 혁명군을 대육군으로 재창조하고 사단 제대를 도입하는 등 군제를 개혁했고, 그러한 조치가 처음으로 결실을 거둔 사례였다. 손자병법에서 말한 '피를 적게 흘리고 이긴 승리가 제일 좋은 승리'라는 말이 그대로 적용되는 전투이다.
2. 내용
1804년 12월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 이후 오스트리아 쪽에서 먼저 선제공격을 가하여 마크 원수의 4만 오스트리아 군이 친프랑스 선제후국이던 바이에른[1]에 침공하여 바이에른 서쪽의 슈바르츠발트[2] 부근 울름에 진을 치고 대기했다. 소식을 접한 나폴레옹은 각 사단의 지휘관들에게 흩어져 진군하여 울름 부근에서 집결할 것을 명령했고, 대육군은 수십개의 사단으로 나뉘어져 일사불란하게 슈바르츠발트를 통과했고 마크의 정찰병들은 여러 방향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군하는 모든 적의 행군로를 보고했고, 마크는 각지에서 밀려드는 보고를 받고는 이것이 페이크인지 사실인지 갈팡질팡해 했다. 며칠 지나보니 집결지에서 모여든 프랑스 군대가 이미 울름을 포위한 뒤였고, 마크는 상황 파악이 끝나자 재빨리 포위망 중 약한 부분을 뚫기로 했으나, 다음 날 마지막으로 도착한 프랑스 부대에 의해 그곳마저 강화. 결국 마크는 싸우다가 다 죽기보다는 목숨을 건지는 것이 더 낫다 생각했고 그의 부대는 항복했다. 그렇게 해서, 개전한지 1년이 조금 덜 된 시점, 정확히 10월 20일, 오스트리아의 주력 4만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3][4]이후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까지 가는 길은 뻥 뚫렸고, 프랑스군은 그대로 진격해 들어가 또다른 적인 러시아의 주력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노련한 쿠투조프 장군은 훌륭하게 퇴각했고 역으로 나폴레옹을 함정에 빠뜨린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고 혈기만 왕성하던 한 황제에게 나폴레옹이 얼마나 먼치킨인가를 각인시켜준 한 번의 전투로 전쟁 자체가 끝장나며 대불동맹은 붕괴되었고, 옆동네 섬나라의 수상 소(小) 윌리엄 피트는 충격으로 쇼크 먹고 더이상 지도 따위 필요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즉시 저승으로 호적을 이전한다.
[1]
당시 1805년에는 바이에른 선제후국에 속해 있었으나, 1810년에 바이에른 서쪽의 또다른 선제후국
뷔르템베르크에 양도되었다.
[2]
검은 숲이라는 뜻. 나무가 빽빽히 들어차서 숲 속에서 보면 온통 어두워 보여서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3]
얼마나 심각한 손실이었냐면, 1차 오스트리아 전쟁을 마무리지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대불 동맹군 대다수 인원이 러시아군이었고 자연히 오스트리아는 발언권이 낮아지게 됐다. 한 번 당해 본 사람 말을 안 듣고, 수적 우위의 자만감에 빠진 젊어서 혈기가 왕성하고 호기심이 하늘을 찔렀던
알렉산드르 1세의 무모한 도전은 당연히 대패배로 끝났으며 나폴레옹에게 일생일대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4]
당일인 10월 20일 다음 날,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가
넬슨 제독의 영국 및 대불 동맹 연합해군에게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개발살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