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心
생몰년도 미상
조선의 인물.
영남 밀양의 유명한 기생으로 칼춤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며, 윤순의 소실로 있다가 만년에는 전국을 여행하다가 생을 마쳤다. 그 당시 경상도에서는 여자 이름을 心자를 주로 사용한 것을 통해 경상도 출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녀에 대한 것은 청성잡기(淸聲雜記), 검무기(劍舞記), 응천교방죽지사(凝川敎坊竹枝詞), 입연기(入燕記) 등에 기록되어 있다.
1. 기록
청성잡기의 기록에 따르면 밀양 출신의 기생으로 서울로 뽑혀서 왔고 칼춤 솜씨가 당대에 으뜸으로 윤순이 운심에게 마음을 두었고 윤순은 글씨를 잘 써서 운심에게 칼춤으로 자신에게 초서의 원리를 깨닫게 할 수 있냐고 물었으며, 운심은 평소에 윤순을 사모해 한 점 얻어 가보로 간직하기를 원해 윤순은 써주겠다고 허락했지만 바로 써주지 않았다.어느날에 운심은 술을 가지고 와서 권주가를 불러 윤순에게 권해 취하게 했다가 지난날 허락한 것에 대해 이야기해 윤순이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써낸 것을 얻어냈으며, 윤순이 깊이 간직하고 꺼내서 남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윤순이 술이 취했다가 조현명에게 이 일을 발설했다. 이 때문에 조현명이 운심을 불러 물어보았고 운심은 숨길 수 없어 사실대로 이야기했고 그 글씨를 조현명에게 빼앗겨 운심은 죽을 때까지 이 일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운심은 늙어서 명승지를 유람하고 관서 지방의 칼춤을 추는 기생들은 그의 제자였다.
어느날 약산 동대에 오를 때 아래는 만 길 절벽이고 마침 술에 취하고 있었는데,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약산은 천하의 명승지요, 운심은 천하의 명기다, 사람은 태어나면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니 여기서 죽으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탄식하면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렸지만 옆에 있던 사람이 붙잡아 죽음을 면했다. 운심의 멋들어진 풍류와 기개가 이러해 당대에 이름을 드날릴 수 있었다고 한다.
묘향산소기의 부록인 검무기에서는 두 명의 기생이 춘 칼춤에 대해 묘사하면서 근세 검무는 일컫는다면서 이런 기생들은 대개 그녀의 제자라고 했으며, 응천교방죽지사에는 운심은 칼춤이요 옥낭은 가야금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어 그녀가 칼춤에 뛰어나는 것을 알려준다.
청정관전서의 부록인 입연기에는 이관상이 손님들을 데리고 약산의 동대로 올라갔는데, 이 때 운심은 절도사 이은춘이 영변의 수재로 있을 때 자기 아버지가 사랑하던 기생이라 해 데려오게 되었다고 한다. 운심은 이 때 늙어서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동대에 올라 한참 동안 사방을 바라보다가 후세에 만일 밀양의 운심이가 약산의 동대에 올라 즐거움을 이기지 못해 뛰어내려 죽었다 하면 어찌 장한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떨어지려고 했지만 모두가 깜짝 놀라 붙잡았으므로 살아남았다.
2. 광문자전
명기들이 곱고 아름다워도 거지인 광문이 성원해주지 않으면 그 값이 한 푼 어치도 못 나갔다고 하면서 예전에 청지기들이 운심의 집을 찾아간 적이 있지만 술자리를 벌이고 거문고를 타면서 그들이 춤을 추라고 재촉해도 일부러 머뭇거리면서 추지 않았는데 광문이 들어와 스스로 상좌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자 운심은 광문을 위해 칼춤을 췄다.운심은 다른 손님들보다 광문을 인정하면서 신뢰했고 광문을 위해 칼춤을 춘 것을 통해 운심을 찾아온 손님들은 즐겁게 놀았을 뿐 아니라 광문과 벗을 맺고 헤어졌다고 한다.
3. 야뇌 백동수
김광택의 제자이자 임수웅의 사제로 정휘량과 그 일당에 공격당하는 백동수를 도와주며, 동수가 이윤성의 공격에 죽을 뻔 하자 정휘량을 인질로 삼아서 무사히 탈출하지만 이윤성을 만나는 자리에서 정휘량이 보낸 왜인 무사들이 습격하자 이윤성과 함께 이들을 쌍검(무예도보통지)으로 상대하지만 큰 부상을 입는다.[1]참고로 로스트사가에 백동수여체화로 등장.
[1]
본인이 맡았던 왜인 무사들은 전부 죽였지만 이윤성의 공격에 죽지 않고 기절해 있던 왜인 무사의 공격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