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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0 08:34:30

요제프 우리딜

파일:Josef Uridil.jpg
오스트리아의 축구감독
이름 요제프 우리딜
(Josef Uridil)
생년월일 1895년 12월 24일
사망년월일 1962년 5월 20일
국적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오스트리아
출신지 오타크링
포지션 센터 포워드
신체조건 176cm / 81kg
등번호 -[1]
소속팀 루마니아 오타크링 (1910-1912)
블루 스타 (1912-1914)
SK 라피트 빈 (1914-1925)
피르스트 비에나 FC (1925-1926)
SK 라피트 빈 (1926-1927)
AS 바리 (1929-1930)
국가대표 8경기 / 8골 (1919-1926)
감독 AS 바리 (1929-1930)
ZFC 잔담 (1931-1933)
블라우브 비트 암스테르담 (1933-1934)
리펜시아 티미쇼아라 (1934)
루마니아 대표팀 (1934)
SFC 헬포트 (1934-1935)
BSK 베오그라드 (1935-1936)
FC 비엘(1936-1937)
FC 루체른 (1936-1937)
슈바르츠바이스 에센 (1938-1941)
VfL 알텐뵈게 (1941-1943)
슈바르츠바이스 에센 (1949-1951)
SK 라피트 빈 (1953-1954)
SSV 얀 레겐스부르크 (1954-1957)

1. 생애
1.1. 선수 생활1.2. 감독 생활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수상
3.1. 선수
3.1.1. 클럽3.1.2. 개인
3.2. 감독
3.2.1. 클럽

1. 생애[2]

1.1. 선수 생활

1.1.1. 클럽

우리딜은 오스트리아 오타크링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단사였으며 8살 무렵부터 축구를 접했다고 한다. 많은 유소년 클럽을 돌아다니다 1914년, 공격수로 뛸 수 있다는 이유로 SK 라피트 빈에 정착했으며 1차 대전 때는 탱크라는 별명을 얻었다.

우리딜은 소속팀과 함께 많은 우승컵을 손에 넣었으며 1921년 공식적으로 기록된 오스트리아 1부 리그의 첫 득점왕이 되기도 했다.

1921년에 우리딜은 오스트리아 축구 역사에 남을 명경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디오니스 쇠네커를 상대로 라피트 빈은 후반 30분까지 3대5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나마도 1대5에서 2골을 더 넣어 2점차까지 스코어를 좁힌 것이었다. 하지만 라피트 빈은 불과 15분 만에 4골을 더 넣어 7대5로 경기를 뒤집어 버렸다. 우리딜은 이 경기에서 7골을 혼자 다 넣는 대활약을 펼쳐 당연히 MOM이 되었다.

1.1.2. 국가대표

우리딜은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 대표팀에 데뷔했으며 8경기에 출전, 8골을 기록했다. 스위스를 상대로 해트트릭을 기록하기도 했다.

1.2. 감독 생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할 무렵 우리딜은 1929-30 시즌에서 AS 바리 선수 겸 감독으로 감독 생활에 첫 발을 내딛었다. 루마니아에서 있을 동안에는 리펜시아 티미쇼아라를 준우승으로 이끄는 동시에 라둘레스쿠와 공동 감독으로 루마니아 대표팀을 이끌었다.

그 후에 스위스, 유고슬라비아 등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3] 1938년부터 독일에 정착했고 슈바르츠바이스 에센과 알텐뵈게에서 감독직을 수행했다.

1953-54 시즌에는 친정팀 SK 라피트 빈에 복귀해서 감독 자리에 앉았고 이 해에 라피트 빈은 1부 리그 왕좌에 다시 앉았다. 이 시즌 전 라피트 빈은 잉글랜드의 아스날 FC을 6대1로 꺾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1차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와 SK 라피트 빈을 대표하는 최고의 공격수였다. 가끔은 인사이드 라이트 포워드나 센터 하프백으로 뛰기도 했다.

당시 인기도 대단해서 그의 이름을 딴 맥주, 사탕 등이 나오기도 했고 그를 소재로 한 Heute spielt der Uridil(오늘의 우리딜의 플레이)라는 음악도 있었다. 1924년에는 영화에도 출연했다.

3. 수상

3.1. 선수

3.1.1. 클럽

3.1.2. 개인

3.2. 감독

3.2.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유고슬라비아에선 BSK 베오그라드에 우승컵을 안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