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0:50:37

오현주(1927)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27년 3월 9일에 출생했다. 과거 남한에 알려지기로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나서 1936년 공산주의 운동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이후 북한에서 공개한 생일을 보면 어린애에 불과한 오현주가 그 나이에 뭘 했을지는 의문이다. 어쨌거나 해방 후 1950년 조직지도부 부부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 5월, 민청 평안남도 위원장에 선출, 1959년 11월, 민청 중앙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60년 4월, 박달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1년 5월, 조평통이 설립되면서 중앙위원회 위원 및 상무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 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 1964년 5월, 사로청 중앙위원에 재선되었다. 1966년 10월, 2차 당대표자회에 출석, 문헌편찬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다. 이후 평안남도 책임비서에 임명되어 1968년 8월까지 재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67년 11월, 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최고인민회의 4기 1차 회의에서 외교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평안남도 책임비서 해임 이후 한동안 소식이 없었으며 1970년 5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에서 탈락했다. 1971년 11월, 체육지도위원회위원장으로 다시 나타났으며, 1972년 8월 북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고 북한 올림픽 대표단장으로 뮌헨 올림픽에 참가했다. 1972년 12월, 5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아마도 북한 올림픽위원장 자격으로 상설회의 의원에 선출되었다. 1973년 10월, 제4차 인민체육대회 조직위원장에 위촉되었다. 1976년 9월, 최용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후 건설 부문에 조동되었는지 1986년 간석지 건설총국 부총국장 재임이 확인되었다. 허나 개나 소나 다 위촉했던 김일성 장의위원회, 오진우 장의위원회에 모두 탈락한 것을 봐서 그 이전에 당중앙위원회에서 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97년 1월 4일에 조용히 사망했는데, 부고는 발표되지 않았으나 이후 간석지 건설총국장 직함으로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