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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22:57:37

오케하자마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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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하자마 전투의 절정,
모리 신스케와 최후의 일격을 벌이는 이마가와 요시모토.
미기타 토시히데(右田年英, 1863 ~ 1925) 작
「이마가와 요시모토 오케하자마 대전투(今川義元 桶狭間大合戰之圖)」,
토요아케 시립 도서관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신장공기의 기술
3.1.1. 신장기의 기술
3.2. 실제
3.2.1. 병력3.2.2. 전투 경위3.2.3. 천하통일 시도?
4. 결과5. 매체에서의 오케하자마 전투
5.1. 게임5.2. 드라마
6. 출전 무장
6.1. 이마가와 측6.2. 오다 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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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桶狭間の戦い
에이로쿠 3년 5월 19일(1560년 6월 12일),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 오와리국의 오케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고작 2천 기의 병사들로, 침공해 온 슈고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의 수만 대군을 격파한 싸움으로 일본 전국시대 3대 기습의 하나로 꼽힌다.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를 장악할 수 있었던 중요한 계기가 된 전투이다.

2. 배경

스루가·토토우미를 지배하고 있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는 근접한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노부히데, 노부나가 2대에 걸쳐 오랫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이마가와 가문은 사가미의 호조, 가이의 다케다 가문과도 분쟁 상태였기에 쉽게 오와리를 정복할 수 없었으나, 미카와의 마츠다이라 히로타다[1]가 급사한 사건을 계기로 미카와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보하였고, 처남 다케다 신겐의 제안으로 1554년에 호조, 다케다, 이마가와의 고소슨(甲相駿)[2] 3국 동맹을 맺어 후방의 우려도 없애는 데 성공하였다.

다케다 신겐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의 카와나카지마에서 길게 대치하게 되자 안심한 요시모토는 전군을 오와리로 파견할 수 있었고, 스루가의 방위는 아들 우지자네에게 맡기고 최소 2만 5천에서 최대 4만 5천이라는 대군으로 오와리 침공을 시작했다.[3][4]

에도 시대의 한 설화에서는 이 전투에 출격하기 전 요시모토와 후계자 다툼을 하고 져서 죽었던 서형 겐코 에탄이 꿈에 나타나서 '넌 내 원수지만 이마가와 가문을 위해서 얘기하는데, 이번 원정은 중지해야 한다'라고 호소했다고 한다.

3. 전개

3.1. 신장공기의 기술

(1560년) 5월 17일에 쿠츠카케에 들어온 요시모토의 군대는 오타카 성에 군량을 들인 뒤 오다 군의 구원병이 오기 힘든 만조 시기를 노려서 차례로 오다 측의 요새를 함락시키기로 결정했으며, 18일부터 와시즈, 마루네 요새가 공격당한다는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18일 밤에도 노부나가는 특별히 군을 편성하지도 않고, 잡담을 좀 한 뒤 가신들을 해산시켰고, 이걸 본 가로들은 '운이 다하니 정신이 흐려진 것 같다'라고 비웃으며 돌아갔다. 날이 밝자 공격받고 있던 와시즈, 마루네 두 요새가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노부나가는 소식을 조용히 들은 후 춤을 추며 아츠모리(敦盛)를 불렀다.
인간 세계의 오십 년은 하천[5]의 덧없는 꿈과도 같도다. 한번 삶을 얻었거든 진멸치 않을 자가 어디 있으랴.
(人間五十年 下天のうちをくらぶれば 夢幻の如くなり ひとたび生を享け 滅せぬもののあるべきか)

그리고 노부나가는 갑작스럽게 '소라 고둥 나팔을 불어라' '갑옷을 가져와라' 라고 명령을 내린 다음 신속히 갑옷을 입은 뒤 선 채로 식사를 끝냈다. 그리고 말을 타고 성문을 빠져나갔는데, 이 출격에 눈치채고 동행한 건 5명의 호위 무사뿐이었다.

노부나가는 다 합쳐서 6명밖에 안 되는 일행으로 달려가서 오전 7시경 아츠타 신궁 앞에 도착했고, 두 요새 방향에서 연기가 솟는 걸 보고 마루네와 와시즈가 함락된 것을 눈치챘다. 조금씩 병사들이 모이기 시작했기에, 이 시점에서 모인 병력은 처음 마구잡이로 달려나온 노부나가와 기마무사를 합쳐 6명에 병사 200명 정도였고, 오다 군은 아츠타에서 조금 더 나아가서 탄게 성채, 젠쇼지 성채를 차례로 지나가면서 병력이 모이는 것을 기다리고 태세를 가다듬었다.

이 때 노부나가는 신사에 참배하고는, 동전을 던지면서 부하들에게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우리가 이긴다."라고 말했는데, 정말로 동전들이 모두 앞면이 나와서 사기가 크게 올랐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노부나가가 던진 동전은 실제로는 모두 앞면만 있던 것이라고 한다.

이때 요시모토는 4만 5천의 병력을 이끌고 쉬다가 두 요새가 함락된 걸 듣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량 운송 임무로 지쳐서 오타카 성에서 쉬고 있었다. 마침 우연히도 노부나가가 젠쇼지 성채에 들어온 걸 안 오다 측의 한 무장이 300여 군사를 이끌고 무단으로 적진에 돌격했다가 참패하여 전사한 탓에 요시모토는 방심할 대로 방심해 있었다.[6]

노부나가는 움직임이 적에게 보인다는 제지를 뿌리치고 군을 이끌어서 다시 젠쇼지 성채를 나가서 나카지마 성채로 들어갔고, 이 시점에서 2천 명 정도가 모였다.

노부나가는 개전에 앞서 전군에게 한마디 연설을 했다.
적은 저녁에 군량을 사용하여 밤새 오타카 성으로 달려가고, 와시즈, 마루네 성채에서 격전을 치렀으며 이로 인해 손발이 모두 지쳐 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아직 팔팔하다. '적은 군사로 큰 적을 두려워하지 말라. 운은 하늘에 달린 것이다'라는 옛말을 모르느냐. 적이 공격해오면 빼고, 적이 빼면 공격해라. 이리하여 적을 쓰러뜨려라. 전리품을 챙기지 말고 자른 적의 목도 버려라. 이 일전에 승리한다면 여기 모인 자들은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 가문의 이름을 빛낼 수 있으리라. 한마음으로 힘써라.

또한 여기서 싸우고 있던 마에다 토시이에 등의 군대가 합류하였고, 노부나가는 이들까지 이끌고 오케하자마의 산기슭까지 몰래 진군했다.

이때 갑작스럽게 하늘이 흐려지고 강풍이 불며 대지가 흔들리는 큰 비가 쏟아졌는데, 쿠츠카케의 고개에 서 있던 두 아름이나 되는 나무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동쪽으로 큰 소리를 내며 쓰러지니 군사들이 아츠타 신사의 효험이라고 중얼거렸다.

곧 하늘이 맑아지려 하자 노부나가는 창을 하늘에 치켜들고 돌격명령을 내렸다. 전군이 요시모토의 본진에 한덩어리가 되어 돌격해 들어갔고, 이마가와 군은 전부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서 무기, 깃발, 심지어는 요시모토의 가마까지도 내던져지는 형편이었다. (이때가 오후 2시경)

요시모토는 200여 호위병의 필사적인 보호를 받으며 계곡을 따라 퇴각했으나 포위당한 채 파상 공격을 받아 50여 명까지 호위 병력이 줄었다. 노부나가 본인조차도 말에서 내려 창을 휘두르며 적을 찔러죽이는 격전이었다. 이를 본 오다 군은 모두 분발하여 싸웠으며, 역전의 용사들이나 친위 무사들도 다수 죽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핫토리 고헤이타가 요시모토에게 달려들었으나 요시모토의 검에 허벅지를 베여 쓰러졌다.

이후 모리 신스케가 요시모토를 창으로 찔러 쓰러뜨린 뒤 목을 베었다.

오케하자마는 본디 계곡이 파이고 계곡 사이에는 깊은 늪지대가 조성되어 있으며 수풀이 높이 자란 험한 지형이었기 때문에 이후 이마가와 군은 이런 곳에서 헤매다가 늪에 빠지고 오다 군에 추격당해 속속 전사했다. 요시모토군은 너무나도 혼란에 빠진 나머지 무기와 깃발 등 온갖 장비를 내버리고 패주했다.[7]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수급을 제외하면 다른 수급은 모두 키요스 성에 귀환한 후에 확인하겠다고 한 뒤 승리 선언을 하고 귀환했다.

3.1.1. 신장기의 기술

노부나가는 사전에 치밀하게 단계적으로 이마가와군의 움직임, 본진의 배치에 대한 정보를 입수해 철저히 계획된 우회 공격을 가해 요시모토의 수급을 취했다. 전투 후에는 정보 수집의 책임자인 야나다 마사츠나, 첫 번째로 요시모토에게 창을 들이대고 돌격한 핫토리 고헤이타, 수급을 취한 모리 신스케의 순으로 포상했다.

3.2. 실제

3.2.1. 병력

신장공기에는 이미가와군이 4만 5천이라는 엄청난 대군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도쿠가와 미키와 화본태합기에는 4만으로 기록되어 있다. 코요미키, 무공야화 등의 다른 사료에는 2만 ~ 3만 사이의 병력으로 기술된 것이 많다. 현재는 고쿠다카의 한계를 고려해서 2만 5천이 정설이다.

오다군은 의외로 전체 병력이 많았지만[8], 주변 사방이 적이었기 때문에 실제 동원가능한 병력은 극히 적었으므로 전체 병력은 신장공기의 기술처럼 2천여가 고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2천이 이마가와의 2만여 군대와 싸운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5천가량의 본대와 싸웠고 이들이 악천후와 기습 때문에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져버렸으므로 전투 결과가 완전히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다.[9]

3.2.2. 전투 경위

후세의 창작물에서는 요시모토가 방심했다거나 노부나가가 실은 치밀한 계략으로 상황을 조성한 뒤 기습전을 벌였다는 식의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실제 1차 사료의 묘사를 보면 그런 설은 어디까지나 창작일 뿐이다. 주로 오케하자마 전투를 빛나는 기습전술의 승리로 기록한 <신장기>의 경우 동시대 기록자들에 의해 신빙성에 심각한 문제점이 지적받고 있다. 노부나가는 가신들이 전투를 포기한 것 아닐까 착각할 만큼 가만히 시간만 보내다가 번개같이 뛰쳐나갔을 뿐이며, 요시모토는 노부나가의 명령 없이 무단 출격한 오다 측의 돌격대를 꺾고 방심해 있었다. 승리의 중요한 요인으로 취급되는 요시모토의 방심은 노부나가의 치밀한 연출로 유도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이었다는 말.

요시모토의 본진은 고지대에 있었으나 급작스러운 폭풍우로 인해 순간적으로 주변의 정보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렸고, 각 성채를 압도적인 병력을 나누어 점령하러 보낸 탓에 본대는 5천 정도였다. 고쿠다카에서 현재 추산되는 요시모토의 본대가 2만 5천 정도이므로, 본래대로 정면으로 회전을 벌였다면 2천을 거느린 노부나가는 12배의 적과 싸워야 하는 것이 되지만 이런 우연들이 겹쳤기 때문에 실제 전투는 결과적으로 방심한 상태이자 시야가 차단된 상태에서 기습당한 본대 5천 vs 완벽한 조건이 갖춰진 기습을 가한 오다군 2천의 싸움으로 전력이 거의 차이가 나지 않게 되었다.

현재 학설로는 당시에 급작스러운 폭풍우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고, 면밀히 계산해 적의 눈을 속이고 기습했다는 우회 공격설[10]과 그냥 기습 이외의 특별한 작전이 없이 정면으로 돌격했는데 주변 환경상 대성공으로 이어졌다는 정면 돌격설이 맞부딪치고 있다.

많은 창작물에서는 당연히 전자의 치밀한 기습작전이었다는 것으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후자의 정면돌격전, 우연한 조우전이었다는 쪽이 지지받고 있다. 학계의 주류 의견은 오케하자마 전투는 노부나가의 번뜩이는 기습 작전이 일궈낸 전술적인 대승리가 아니며, 상당히 무모한 정면 돌격전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악천후와 상대의 방심 등이 맞물려서 싸우고 보니 운 좋게 적장과 사령부가 싹 전멸해 있었다는 것. 오다 쪽에서는 운빨로 최선의 결과가, 요시모토 쪽에서는 운빨로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가 벌어진 셈이다.[11]

신장공기에서는 노부나가가 요시모토의 진격에 고민하며 가만히 앉아있다가 갑작스럽게 갑주를 챙겨입고 소집령을 내린 뒤 돌진했다고 쓰여 있을 뿐이고 아무런 정보전이나 전략, 전술에 대한 기술이 없다. 오다의 부하 무장인 삿사 하야토의 소부대가 이마가와군을 공격했다 패퇴해 더더욱 요시모토를 방심시키는 효과를 낳았고 이것이 기습 우회공격설에서는 보통 의도적 양동작전이었다고 해석되고 있으나, 이것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기록한 오타 규이치는 그가 '우리끼리 먼저 공을 세우자'면서 무모하게 돌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12]

물론 <신장공기>에도 기습 우회공격으로 볼 근거가 없지는 않다. 우선, 요시모토가 고지대에 사령부의 병력을 배치하고 다이묘의 위치를 각종 우마지루시, 자신의 화려한 가마 등으로 완전히 노출시킨 채 노래를 부르며 방심하다가 그가 전사하자 휘하 병사들이 이것들을 내던지고 도주한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본진이 오다 측 스파이나 병사들의 눈에 들어왔고, 그것을 토대로 신속히 기습전술을 세웠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13]

현재로서는 노부나가 본인을 가까이서 섬겼으며 당시에도 오다군에 소속되어 있던 오타 규이치가 쓴 신장공기의 기술이 제일 신빙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만 이쪽도 상대의 병력을 4만 5천 명이나 되는 어이없는 대군으로 써놨기 때문에 이런 저런 자료들과 비교 검토가 필요하다.

이외에도 다케다 가문과 관련되는 중요 사료인 <갑양군감>에서는 약탈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마가와 군에 슬쩍 섞여서 본진 근처까지 간 뒤에 요시모토를 급습했다는 기록이 있어서 우회 돌격설의 근거 중 하나가 되었는데, 갑양군감은 정작 주제인 다케다 가문과 관련한 기술들의 신빙성도 의심받는 군담류 서적이어서 믿기 힘들다는 점이 문제.

신장공기의 묘사[14]를 근거로 하여 요시모토의 지휘소는 당시 지형상 공격받고 있던 오다 측의 요새인 마루네와 와시즈 성을 모두 전망할 수 있는 근방의 고지로 추정되고 있다.

전투 장소로는 전통적으로 오케하자마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으며 관련된 설화가 이것저것 전해지는 나고야 시 미도리 구 근방이라는 설이 있지만, <신장공기>보다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신장기>에서는 덴가쿠하자마라는 곳이 전투 장소였다고 기술되어 있다.

3.2.3. 천하통일 시도?

본격 일본 최강이 된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이 싸움을 시작으로 교토로 치고 올라가서 천하를 얻으려 했는데 어이없이 전사하여 좌절됐다는 식의 해석이 거의 사실인 양 다루어지고 있으나 실제 그랬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도토우미 /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문은 요시모토나 노부나가의 이전 대부터 계속 미카와를 놓고 싸우는 원수지간이었다.

요시모토가 큰 병력을 끌고 오와리를 친 것은 즉석에서 교토로 대진공 작전을 벌이려는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미노, 오우미의 다이묘들은 요시모토의 고쿠다카에서 산출할 수 있는 2만 5천 가량의 병력으로 단번에 석권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으며,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 전에 한 것은 오와리 진출을 위한 준비지 교토 진출 준비가 아니었다.

우선 이마가와 가문은 서쪽으로의 진출을 위해 사전에 3국 동맹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이 3국 동맹으로 인해 북쪽(다케다 가문)과 동쪽(호조 가문)은 안전해졌고, 남은 서쪽(오다 가문)으로의 진출이 용이해진 것이다(남쪽은 바다). 또한 이마가와 가문의 인물이 막부로부터 임명된 오와리의 슈고였던 역사가 있고 노부나가의 아버지인 노부히데 대에 이마가와를 배신하고 불법적으로 점거한 영토[15]가 있기 때문에 이마가와 가문은 사전에 전쟁명분 역시도 확보한 상태였다.

당시 오다 가문의 영지인 오와리(尾張)는 꽤나 풍요로운 곳이라서 1598년에 마무리 된 태합검지(太閤検地)에서 오와리의 고쿠다카(石高)가 57만 석이나 되었다. 이에 반해 이마가와 가문의 영지였던 미카와(三河), 도토미(遠江), 스루가(駿河)는 각각 29만 석, 25만 석, 15만 석이었다.[16] 그리고 스루가와 미카와는 이마가와 가문이 온전히 소유한 영지도 아니었다. 스루가의 동쪽 일부는 호조 가문이, 미카와의 서쪽 일부는 오다가 영유 하고 있었다. 이 역시 지형도를 보면 알겠지만 미카와에서 그나마 넓은 평야 지대는 미카와 서부에 있다.[17]

때문에 이마가와는 일반적인 이미지와 달리 단순히 오와리를 가벼운 장애물처럼 짓밟고 넘어갈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다. 이마가와에게 있어서 오다는 엄청난 강적이었으며, 노부나가가 처한 위기는 오로지 오다 가문의 분열 때문에 빚어진 것이었다. 오케하자마 전투의 일차적인 목적은 오와리의 병탄이고, 그 후에 가서야 비로소 교토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오다 가문의 부의 원천은 이들의 영지였던 남쪽의 항구 도시인 츠시마 아츠다에서 해운업으로 벌어들이는 엄청난 돈이었다. 이마가와는 이 두 도시를 차지하고자 했다.

4. 결과

이마가와 가문은 삽시간에 당주와 유능한 가신을 많이 잃었다. 후계자 이마가와 우지자네는 아버지에 비해 능력이 떨어졌고 영지의 안정을 중요시했다.[18] 한편 선봉 마츠다이라 모토야스는 자신의 영지였던 미카와의 오카자키 성에 입성해 종속 관계에 있던 이마가와로부터 독립을 해버리고, 요시모토의 모토(元)를 따서 종속 관계를 나타내던 이름을 마츠다이라 이에야스로 바꾼다.[19][20][21] 이후 이마가와 가는 잦은 모반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1568년, 그렇잖아도 신뢰하기 힘들다는 평이 있는 다케다 신겐의 번개 같은 뒤통수를 맞아 스루가를 잃고 도쿠가와에 의해 남은 토토우미마저 뺏겨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이마가와 가는 순식간에 멸망하고 만다.[22][23] 이후 우지자네는 스루가를 되찾기 위해 후호조 씨를 의지하였으나 호조 우지야스가 죽고 노선을 전환하면서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이에야스에게 몸을 의탁한다. 이로 인해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나아가 여흥으로 축구 놀이를 보여주는 치욕을 겪게 된다. 우지자네가 이에야스 아래로 들어가면서 이마가와 가문 자체는 하타모토로 막부 말기까지 존속하다가 메이지 유신 시기에 남계 후손 단절로 가문이 없어진다.

반면 오다 노부나가는 1559년 오와리국 전토를 통일하고 당면한 가장 큰 적을 쓰러뜨려 미노, 오우미 등지로 진출하며 천하 포무의 발판을 디디게 되었다.

5. 매체에서의 오케하자마 전투

5.1. 게임

5.2. 드라마

6. 출전 무장

6.1. 이마가와 측

6.2. 오다 측


[1]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버지. [2] 각각 세 가문의 본거지인 카이(甲斐), 사가미(相模), 스루가(駿河)의 글자를 딴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각 지방의 별칭인 고슈(甲州), 소슈(相州), 슨슈(駿州)에서 나온 명칭. [3] 요시모토의 병력은 코요미키에는 2만, 무공야화에는 3만, 신장공기, 화본태합기 등에는 4만으로 기록되어 있는 등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상정하게 어렵다. 실제 고쿠다카의 한계를 고려해보면 2만 정도가 타당하지만, 4만을 동원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다. [4] 이 작전으로 이마가와 가문이 교토를 차지해 천하를 얻으려 했다고 해석되는 경우가 많으나, 확증은 없으며 오와리를 병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것이 정설. 어차피 교토에 가더라도 오와리는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5] 불교의 욕계 중 마지막 차원으로, 이곳의 주민들은 인간 세상에 비해 어마어마한 수명을 자랑한다고 한다. 즉 이곳의 시간 관념으로 사람의 인생은 극히 덧없는 찰나의 순간이라는 뜻 [6] 흔히들 요시모토가 방심한 나머지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고 하는데, 후대로 가면서 <신장공기>보다 묘사가 다소 과격해진 감이 있다. 당시의 목격자인 오타 규이치는 이 바보같은 돌격대를 격퇴한 요시모토가 '나의 창끝에는 악마와 귀신도 당하지 못할 것이야!'라면서 병사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기고만장해져 있었다고 한다. 그게 그거지만... [7] 본문에 쓰였듯, 이것이 보통 기습공격설을 거꾸로 뒷받침해주는 근거가 되기도 하는 부분이다. [8] 오와리는 겉보기에는 땅이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비옥한 땅이라 고쿠다카로 치면 상당한 수준이었다. [9] 특히 오케하지마는 오다의 영지에 있는 곳이므로 노부나가는 지리에 대해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잘 알고 있었을 테니 교묘하게 본대만을 노리고 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았다. 노부나가 본인이 놀러다니는 척하면서 지리를 측정하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속깊은 인물이었기도 하고. [10] 일본군의 전사 연구에서 주장해 왔던 학설이다. 구일본군의 전사 연구들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기는 하지만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은 건 물론이고 사료 분석이나 교차 검증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 학문적인 수준에도 한계가 있어서 현재는 현대적 연구 결과에 의해 반박당하는 일이 잦다. [11] 물론 오케하자마는 오다 가의 영지 내였으므로 지리의 이점은 노부나가가 챙겼을 가능성은 높았다. [12] 명령을 위반하거나 명령 없이 적에게 공격을 가하는 행동으로, 당시 무사들 사이에서 흔한 군율 위반행위이던 '누케가케'라고 한다. 관례적으로 처벌이 별로 없었지만 도쿠가와군은 유독 이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13] 즉, 원래는 내부적으로 알아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당장 편성 가능한 병사들만 이끌고(당장 이렇게라도 안 하면 항복을 주장하거나 실제로 배신하고 항복할 자들도 있었을 테니까) 오케하지마에 왔는데 닌자들의 보고나 현재 상황을 봤을 때 지리적 이점도 있고 적은 방심 중인 데다가 적 부대는 분단되어 있고 비바람까지 내리는 등 의외로 생각보다 상황이 괜찮아서 그대로 기습했다는 것. 노부나가도 군략에 뛰어난 사람이었으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건 자체는 우연일 수는 있어도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고. [14] 근처에 완만한 계곡과 늪지대가 펼쳐져 있음. 본진은 고지대. 아츠타 신궁과 최전선인 마루네, 와시즈를 조금 지나친 곳에 있음. [15] 노부나가의 아버지 노부히데는 막부로부터 위임받은 합법적 영토인 쇼바타성을 원래는 친분이 깊던 이마가와측을 배신하고 탈취했다. 그는 성주인 이마가와 우지토요의 시짓기 모임에 참석해 친목을 다지는 척 쇼바타 성에 자주 방문해 며칠이나 체류했고, 갑자기 쇼바타 성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척 하면서 긴급히 유언을 남겨야 하니 자기 부하를 쇼바타 성 안에 불러들이게 해 달라는 부탁을 해 허락을 받았다. 그리고 성안에 들어온 부하들이 일제히 혼란을 일으키고 성주 우지토요를 인질로 잡아 성을 점거했다. 노부히데는 이런 기상천외한 계략을 써서 성을 단박에 빼앗았고, 이 쇼바타 성에서 노부나가가 태어났다. [16] 그도 그럴 게, 오와리는 간토 평야(関東平野)와 에치고 평야(越後平野)에 이어 당시 일본에서 세 번째로 넓은 평야인 노비 평야(濃尾平野)의 남반부를 차지하는 곡창 지대였다. 홋카이도가 일본의 판도에 들어온 지금에야 홋카이도의 이시카리 평야(石狩平野), 토카치 평야(十勝平野)가 각각 평야면적 2위, 3위를 차지하면서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노비 평야는 여전히 일본에서 다섯 번째로 넓은 평야고 기소 강(木曽川)이 흘러 수원도 풍부한 곳이다. 이에 비하면 스루가나 미카와 도토우미는 산지가 많아 농지로서 가용한 면적 비율이 오와리에 비하면 현저히 떨어진다. 다만 오케하자마 전투 당시의 각 쿠니의 고쿠다카는 태합검지 실시 후의 고쿠다카와 다소 차이가 있긴 하다. 그러나 오와리와 이마가와 3국의 석고 차이는 지형빨 때문이고, 지형빨을 뒤집을 만한 특별한 요인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양측 석고의 비율은 태합검지 때와 큰 차이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17] 그 미카와도 원래는 마츠다이라 가문의 영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야스를 인질로 붙잡아놓을 필요가 있었던 것. 아무리 이마가와에서 이에야스를 교육하고 요시모토의 조카와 결혼시켜줬다고 해도 그걸 곧이곧대로 듣고 이에야스를 배신자로 볼 수 없는 근거이기도 하다. [18] 오다 노부나가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당시 이마가와 가문의 국력은 오다 가를 능가했다. [19] 사실 이 종속 관계는 요시모토의 조카인 세나히메를 모토야스에게 시집보내는 등 그리 굴욕적이거나 가혹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마가와를 이탈한 것은 도쿠가와의 비열한 배신 행위가 되기 때문에 자신에게 맞게 역사를 실컷 윤색한 이에야스 본인과 에도 막부의 공작으로 인해 현재는 철저한 굴욕적 예속 관계로 그려지는 경향이 많다. [20]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자기 영지를 이마가와에게 뺏긴 것이니 아무리 대우를 받았다고는 해도 불만이 없을 수는 없었다. 거기다 인질이었으니 목숨이 위험해도 이상하지 않기도 하고 또, 그런 식으로 영지를 뺏기면 자기 가신도 돌볼 수 없게 된다. 당장은 이마가와 가문이 오다보다 국력이 강했음에도 요시모토가 죽자마자 바로 등을 돌린 이유이기도 하다. [21] 또, 당시 상황은 미카와 영지를 온전히 먹기 위해 이마가와에서 이에야스를 모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노릇이었다. 요시모토야 워낙 뛰어난 영주였으니 굳이 이에야스를 죽이지 않더라도 이에야스가 감히 경거망동을 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우지자네는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 난리를 겪고도 이마가와에 얌전히 머물러 있는 쪽이 훨씬 더 어리석은 짓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에야스 본인도 이 참에 자기 영지를 돌려받을 생각이었을 테고. [22] 이 때문에 신겐이 오케하자마의 흑막이라는 주장도 있다. 신겐이 노부나가를 이용해서 이마가와를 제거한 뒤에 스루가를 차지했다는 것. 이 주장의 근거로 요시모토가 술판을 벌이고 있다가 기습을 당했다는 기록이 하필이면 다케다 가문의 군기라는 점이 제시된다. 오케하자마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은 신겐이 오케하자마 전투의 통설의 근거라는 점이 의혹이라는 것이다. 물론 신겐은 그저 쳐다보고만 있다가 낼름 스루가를 집어삼켰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이겠지만... [23] 애시당초 이마가와는 다케다보다 강력했기 때문에 신겐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요시모토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그 요시모토가 죽은 이상 땅욕심 가득한 신겐이 그 욕망을 참아낼 리가 없었던 것. 물론 이렇게 뒷일은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이득만 챙긴 결과는 신겐 다음대에서 다케다 가문의 멸망을 불러왔다. [24] 셋사이는 꼭 없어도 되지만 하지만 요시모토를 살리려면 필요하다. 실제 역사에서 셋사이는 오케하자마 전투 5년 전인 1555년에 병사했다. [25] 물론 노부나가는 폭우 때도 범위는 좁아져도 공격이 가능한 비 피하기 스킬이 있고 이때쯤에 비 피하기 말고 딱히 쓸 스킬도 없기 때문에 잉여가 되진 않는다. 또한 강제 폭우가 아니고 폭우의 확률이 높은 정도라 기습이 성공한 이후엔 세이브로드 노가다로 2턴에 한번씩 맑은 날씨를 띄워주는 걸로 넘길 수 있다. [26] 팁은 나루미성을 점령하지 않고 이마가와 본대에 바로 공격을 퍼붓는 것. 나루미성을 점령하지 않고 돌아가는 중엔 나루미성의 부대를 제외하곤 이마가와 군대가 움직이지 않는데 10턴 정도면 이마가와의 본대에 접근할 수 있고, 아군 본진에 수비용 부대 하나정도만 남겨둬도 요새 보정이 엄청나기 때문에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27] 패배 조건은 셋 중 하나를 만족시키면 된다. 노부나가의 퇴각 or 아군 본진의 점령 or 승리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채로 30턴의 경과. [28] 복수 부대의 사기를 중간 정도의 효과(통갈급)로 떨어뜨리는 스킬. 사기가 0이 되면 그 부대는 퇴각한다. [29] 야전에서는 무장의 스킬을 단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그래서 적절한 타이밍을 노려야 한다. [30] 오죽하면 시작시 외교창을 열어봤을 때, 사이토 가문은 병력이 전멸하거나 해서 수하에 병력이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일때 뜨는 feeble이 나온다. [31] 원래 헤이조 자신처럼 다케다 가문에 복수를 맹세했다가, 개인적 인연으로 다케다 신겐을 섬기게 되어 군사로 활약하는 야마모토 간스케는 헤이조와도 아는 사이다. [32] 신겐은 당시 스와 요리시게의 딸이자 토라오우마루의 누이인 유우를 두번째 부인으로 맞이해 잘 보살피고 있었고, 유우 역시 스와 가문의 핏줄을 남기기 위해 자발적으로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헤이조나 쥬케이니는 이런 사정을 나쁘게 왜곡해서 토라오우마루가 부친의 복수를 하도록 충동질한 것. 물론 다케다 가에 의해서 스와 가문이 망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33] 아내가 요시모토의 딸이어서 이마가와파인 신겐의 큰 아들 요시노부의 후견인이다. 즉 오부 역시 친 이마가와 파인 셈. [34] 간스케는 본래 다케다 가문에 첩자로 파견된 이마가와 가문의 가신이었다가 다케다 가문 쪽으로 돌아서서 충성을 바치는, 닌자나 첩보원 같은 존재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