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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영천 청제중립비, 우측이 영천 청제비. |
永川 菁堤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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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세기 경, 신라시대에 경상북도 영천시 도남동 산7-1에 영천 청못(菁池)을 축조한 후 만든 기념비.청못 축조 직후인 536년( 법흥왕 23년)에 세운 '병진년(丙辰年)명 청제비문'과 이후 798년( 원성왕 14년)에 더해진 '정원14년(貞元十四年)명 청제비문'이 있다.[1] 그 왼편에는 해당 비석을 발견하고 다시 세운 내역을 숙종 시기에 기술해서 세운 '청제중립비'가 있다.
오른쪽 비석은 더 오래된 만큼 마멸이 심해 판독이 어려운 반면, 왼쪽 비석은 시대가 늦기 때문에 대부분 판독이 가능하다.
보물 제517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1968년 12월, 한국일보사가 주관하여 신라 삼산에서 학술조사를 진행하던 신라삼산학술조사단이 발견한 6세기 무렵 비석이다. 청제비(菁堤碑)와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라 부른다.
이 비석이 발견된 영천 지역은 신라시대에 체야화군(切也火郡)이라 불렸으며, 원래 독립된 국가였던 골벌국(骨伐國) 또는 골화국(骨火國)이 신라에 병합된 뒤 군이 설치된 곳이다. 당시 체야화군은 별다른 무력적인 마찰이 없이 평화적으로 신라에게 병합되었다. 이후 영천에 있던 골화산(骨火山)은 신라삼산의 하나로 숭배했고, 이 산의 산신을 신라를 지키는 호국의 여신으로 받들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하에 신라가 국가적인 힘을 동원하여 이 지역에 만든 것이 청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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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영천 청못[2] |
비석은 자연석을 간단히 가공하여 글씨를 음각했으며 받침돌이나 지붕돌은 애초부터 없었는데, 이러한 형태는 한반도 비석 양식 문화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으로서 삼국시대 비석들의 공통적인 모습이다. 자연석이다보니 부분에 따라 달라 일정치 않으며, 높이는 130cm 정도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며 비석의 하부 일부는 땅 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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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중립비 앞면 | 영천 청제중립비 뒷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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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청제비 앞면 | 영천 청제비 뒷면 |
536년 병진년(丙辰年) 명문에는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청못을 축조하는데 들어간 공사기간,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 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 받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직책과 이름 등을 기록했다. 제작년대를 대체로 신라 법흥왕 23년(536)으로 보지만, 외위(外位) 문제와 관련하여 한 갑자 올려 자비 마립간 19년(476)에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798년 정원14년(貞元十四年) 명문에는 법당(法幢)이라는 신라의 군사조직을 동원하여 1만 4140명이 2월 12일부터 4월 13일까지 일했고, 부척(斧尺: 도끼를 사용하는 기술자)이라는 일종의 기술자 136인과 법공부(法功夫: 국가에 소속된 일꾼) 등이 수문을 만들거나 목책을 세우는 일에 종사했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파손되어 수리하게 된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수, 관계 담당관의 이름 등이 실려있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구 무술명 오작비와 함께 신라시대 수리시설 및 사회사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3. 보물 제517호
영천 청못이라는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기록한 내용과 중수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이다. 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흔히 ‘청제비’라고 부른다.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이고,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제비 서쪽으로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내용은 1653년 비가 두 동강이 나 있는 것을 최일봉씨 등 세 사람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영천 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이고,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어 흥미롭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제비 서쪽으로는 조선 숙종 14년(1688)에 세워진 청제중립비가 있다. 내용은 1653년 비가 두 동강이 나 있는 것을 최일봉씨 등 세 사람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는 것이다. 영천 청제비는 신라 수리시설의 실태와 신라사회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4. 참조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영천 청제비
- 두산백과 : 영천 청제비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천 청제비
- 향토문화전자대전 : 영천의 수리시설 그리고 최고의 수리비 청제비
- 한국어 위키백과 : 영천 청제비
- 한국고중세사사전 : 영천 청제비
- 고고학사전 : 영천 청제비
-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 영천 청제비
- 답사여행의 길잡이 8 - 팔공산 자락 : 청못과 청제비
- 대한민국 구석구석 : 영천 청제비
[1]
둘은 별개의 비석이 아니다. 같은 비석의 앞면에 법흥왕 시기의 비문이, 뒷면에 원성왕 시기의 비문이 새겨진 것.
[2]
사진 출처: 디지털영천문화대전 - 영천의 수리시설 그리고 최고의 수리비 청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