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치 않는 일을 어쩔 수 없이 한다"는 뜻으로 쓰이는 관용어. 흔히 춘향전에서 변학도가 성춘향에게 억지로 수청을 요구했다는 의미의 억지춘향으로 알려져 있고 표준국어대사전의 '억지' 항목에도[1] 용례가 그와 같이 실려 있으나, 억지춘양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아무튼 봉화군 춘양면에서는 여기의 어원중 하나를 주장하고 있어, 면내 장터를 억지춘양시장 # 이라고 이름붙이고 홍보하고 있다.
2. 어원
'변사도가 춘향으로 하여금 억지로 수청을 들게 하려고 핍박한 데서 나온 말'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억지춘양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설이 전한다.
1.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일대에는 '억지춘양'이라는 속요가 전하고 있다.
왔네 왔네 나 여기 왔네 / 억지 춘양 나 여기 왔네 / 햇밥 고기 배부르게 먹고 / 떠나려니 생각나네 / 햇밥 고기 생각나네 / 울고 왔던 억지 춘양 / 떠나려 하니 생각나네…
철도가 없고 도로도 발달하지 않아 교통여건이 좋지 않았던 시절 춘양은 한반도에서 상당히 외진 곳이어서 외지에서 시집을 온 부녀자들이 이 춘양에 한 번 들어오면 다시 가는 친정 길은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가기 힘든 발걸음을 ‘억지춘양’이라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게 어려운 여건 속에서 춘양에 들어와 살면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고 춘양이 비교적 경제적으로 여유(금정광산, 춘양목 등으로) 있는 고장이어서 춘양을 떠나려니 되레 섭섭하다는 의미가 담긴 노래이다.2. 옛부터 ‘백목(百木)의 왕(王)’이라고까지 불리며 춘양을 대표하던 소나무 춘양목이 너무도 유명하여 춘양.장동(춘양 소로리).내성(봉화)장날 상인들이 너도 나도 내다 팔려 가져온 자기 나무가 춘양목이라고 우긴다는 말에서 ‘억지춘양’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3. 1944년 일제는 영주~ 춘양을 연결하는 영춘선(지금의 영동선) 철도 공사를 시작하여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내성역(현 봉화역)까지 철도를 개통하였으나 일제의 패망으로 철도 공사는 중단되었고,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23일 경상북도 북부 일대의 홍수로 그나마 개통되어 있던 구간도 운행조차 해보지 못한 상태로 유실되고 말았다.
1949년 이미 개통된 영주~봉화 구간을 복구하여 열차 운행을 재개하고 다시 철암까지 연결하는 철도 공사가 재개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건설은 중단되었고, 휴전 이후인 1954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공사가 재개될 수 있었다.
그러나 철도 공사가 90% 이상 진전된 상황에서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 출신으로 당시 제3대 국회의원이자 자유당 원내총무였던 정문흠(鄭文欽,1892 ~ 1976)은 갑자기 영암선 철도가 춘양면을 지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결국 교통부 철도국에 압력을 넣어 법전~ 녹동 구간을 직선으로 연결하도록 계획되어 있던 철도를 춘양면 소재지로 돌아서 가게 만들고 춘양면 의양리 면소재지 외곽에 역사를 설치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영암선은 직선으로 갈 수 있는 짧은 구간을 춘양면소재지를 거쳐 2km 이상 돌아서 나가는 Ω자 형태의 노선으로 변경되어 건설되었고, 이 과정에서 험준한 산악지형을 극복하기 위해 약 300m의 터널 1개와 길아천철교에 버금가는 높이 30.7m, 길이 60m의 철골 철교 등 교량 4개를 건설하는 난공사를 거쳐야 했고, 결국 개통 시기도 그만큼 늦춰지게 되었다.
이러한 뒷이야기가 알려지면서 "철도를 억지로 춘양으로 돌렸다"는 뜻에서 억지 춘양이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2.1. 논란
억지춘양과 억지춘향(이)이라는 말 중 어느 것이 맞는지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꾸준히 논란이 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실린 신문기사에"格에맛지안는 地方部社會部, 經濟部椅子에 턱턱걸어안저서 억지春香의 붓대勞働을 머리골치가띙하게 終日하고잇다." -
1927년,
동아일보
#
"이러케 억지春香을 꾸며노타싶이한 K君이 機械的으로움즉여야할 拘束된 店員生活에 調和되지안흘것은 定한 理致다." - 1938년, 동아일보 #
"머리채를느러트리든옛시절로 거슬러올나가도못쓰겟지만 노란머리아닌털을 억지춘향으로구비치게한들 어쩔거시여" - 1949년, 동아일보 #"
"이러케 억지春香을 꾸며노타싶이한 K君이 機械的으로움즉여야할 拘束된 店員生活에 調和되지안흘것은 定한 理致다." - 1938년, 동아일보 #
"머리채를느러트리든옛시절로 거슬러올나가도못쓰겟지만 노란머리아닌털을 억지춘향으로구비치게한들 어쩔거시여" - 1949년, 동아일보 #"
이와 같이 억지春香이라는 표기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도 소개하였듯이 봉화군 춘양면에도 일제 강점기 이전부터 '억지춘양'이라는 속요가 현재까지 전래되고 있으며, 춘양이라는 지명은 일제 강점기 이전인 조선 시대부터 "춘양현(春陽縣)"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온 유서 깊은 지명이다.
또한 해당 글에 의하면 춘양역의 굴곡 노선은 구배 문제로 생긴 결과라고 하고, 해당 칼럼에 의하면 영동선 춘양역과 과거 춘양역으로 불렸던 경전선의 석정리역 사이의 역명 분쟁이 노선 분쟁으로 와전되었을 수 있다고 한다.
두 표현 모두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있어 어느 쪽이 맞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는 각각 별개로 생겨난 두 말이 비슷한 의미로 쓰이게 되었거나, 혹은 두 말의 발음이 비슷하다 보니 어느 한 쪽으로 와전된 것으로 보는 것이 중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3. 같이 보기
[1]
<관용구> 억지 춘향(이). 억지로 어떤 일을 이루게 하거나 어떤 일이 억지로 겨우 이루어지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영달이 내미는 잔을 팔기는 억지 춘향이 되어 받아 든다." ≪김춘복, 쌈짓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