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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6-22 14:43:01

양계(1919)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독립운동가 출신의 북한의 정치인.

2. 생애

1919년 평안북도 운산군 풍중동에서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후 금융조합에 토지가 몰수당하면서 아버지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집 한채, 황소와 약간의 땅만 남았다고 한다. 1928년 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32년에 남은 밭의 일부를 팔아 반소작농이 되었다. 이해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 점원으로 일했고 숙부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1934년에 중학교에 진학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상급생의 영향으로 마르크스 문헌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돈이 없어서 중학교를 중퇴한 후 부모를 도와 일을 하다가 1939년에 소학교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중국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직장에서 안적명이라는 중국인 혁명가의 영향을 받아 1941년 조선인 빨치산 부대에 입대했으며 군정학교 단기강습을 마친 후 선동원으로 배치되었다.

1942년 7월, 조선독립동맹에 배치되어 사업하였고 1945년 8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해방 후 개인 자격으로 귀국, 중국공산당에서 조선공산당으로 전당하였으며 1945년 11월 평안남도 당위원회에 배치되었다. 1946년 8월, 독립동맹이 개편된 신민당과 북조선공산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로동당이 탄생하자 평안북도 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에 임명되었다. 1947년 3월, 북로당 평안북도 당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어 1948년 1월까지 사업했다. 이후 당의 명령에 따라 1948년 2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1948년 9월 15일부터 1950년 7월 1일까지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하였으며 러시아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과목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에 소련 측으로부터 사회-경제 과목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이론 분야에서 괄목할 성장을 보였다고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후 소련 유학이 승인되어 소련에 유학을 다녀왔다. 또한 소련 측은 그가 "사회적인 삶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견실하다. 여하한 종류의 분파주의와 거리가 멀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문제와 관련해 코민포름의 결정을 지지하고 있으며,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부에 대해 비판적이다."라고 정치적으로도 높게 평가했다. 김일성도 그를 두고 "반당단체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당적 처벌을 받은 적이 없다. 지조 있는 훈련된 당원이다. 민주건설 사업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자신의 지식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소련에 충성한다."라고 높이 평가했다. 서동만은 그가 평안북도 부위원장에서 해임된 것이 반소적이란 이유로 좌천된 것으로 보았으나, 소련 문서를 보면 오히려 소련 측의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6.25 전쟁 중에는 3군단 정치부장으로 참전했다고 한다. 1953년 즈음에 반낭비 운동 이후 현정민의 후임으로 자강도 당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미영제국주의 무력침범자들을 반대하여 자유와 독립을 수호한 조선인민의 정의의 조국해방전쟁의 승리를 보장함에 있어서 온갖 헌신성과 창발적 활동으로써 특출한 공훈을 세운 국가정권기관 및 당 지도일꾼"으로 선정되어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다. 1954년까지 재임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55년경 내각 사무국장으로 조동되었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8월 종파사건 이후 종파의 력사적 근원으로 지목받아 극심한 비판을 받았으며, 1957년 8월 5일, 소련대사 푸자노프를 만난 박의완은 양계가 최창익과 공모하여 최창익을 수상으로 옹립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이미 '전 사무국장'으로 언급되는 걸 봐서 최창익 도당으로 몰려서 몰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8월 19일, 김일성과 푸자노프의 대화에 따르면 내각 사무국 당회의에서 양계가 최창익, 박창옥이 가진 '비밀회합'에 대해서 고발했다고 하는데, 살기 위해서 둘을 공격했던 것같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 참석하였는데, 동지 경칭도 받지 못하고 이름으로만 불렸다.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김태근은 오기섭, 류축운, 고봉기와 함께 양계에게 엄격한 당적 기율을 적용하자고 제기했다. 이어 토론한 현무광은 윤공흠, 서휘, 박효삼, 박훈일, 김승화와 함께 양계를 반당반혁명분자로 지목하였다. 해명의 기회를 받은 양계는 자신이 고려인들에 대한 종파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이 최창익과 고봉기의 사주로 당 간부정책을 비난했다고 자백했다. 그리고 최창익과 방창옥을 비난하면서 한번만 용서해주면 자신의 죄를 실제 행동으로 청산할 것이며 당내 종파분자들과 투쟁할 것이라고 애걸했으나 참가자들은 양계를 마구 비웃었다. 이후 오기섭이 토론자로 끌려왔을때 오기섭이 함경남도 폭동 책임자였다고 마구 비난하였고 오기섭은 "나는 양계란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알수 없습니다. 어제까지는 오기섭에 대한 말은 한 마디도 없다가 왜 오늘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둘이 살겠다고 싸우는 것을 보면서 좌중은 그들을 마구 비웃었다. 결국 만장일치로 당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서 제명, 출당되었으며 김용석의 제의에 따라 대표자회장에서 끌려나갔다.

이후 1958년 11월에 박창옥, 박의완, 고봉기와 함께 체포되었으며 11월 23일, 내무상 방학세가 이를 푸자노프에게 통보했다. 1960년 1월, 최창익, 박창옥, 고봉기 등과 함께 총살되었다. #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