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1457e><colcolor=#fff> 얀 시로비 Jan Syrový |
|
|
|
출생 | 1892년 2월 14일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트르제비치 | |
사망 | 1970년 10월 17일 (향년 82세) |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 |
국적 | |
학력 | 브르노 산업학교 |
직업 | 군인, 정치인 |
최종 계급 | 대장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경력 | 체코슬로바키아군 총참모장 |
1926년 1월 ~ 1933년 | |
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
1926년
3월 18일 ~
10월 12일 1938년 9월 22일 ~ 1939년 3월 15일 |
|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
1938년 9월 22일 ~ 12월 1일 | |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국방장관 | |
1939년 3월 15일 ~ 4월 27일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clearfix]
1. 개요
체코슬로바키아의 군인, 정치인이다.2. 생애
1892년 2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 변경백국의 트르제비치에서 태어나 브르노 산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다.2.1. 제1차 세계 대전
케렌스키 공세 당시인 1917년 우크라이나 츠보리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러시아 제국군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5천 명과 조우하여 약 3천 3백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전투로 한쪽눈을 잃었다.2.2. 러시아 내전
시로비는 라돌라 가이다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주요 지휘관으로 활동했고, 1920년 6월 귀국한뒤 체코슬로바키아군에 입대했다.2.3. 전간기
1926년 1월부터 1933년 말까지 체코슬로바키아군 총참모장을 역임했다.1938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 위험이 급증하자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총리 겸 국방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전쟁까지 결의했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 체코를 돕는 나라는 없었고, 결국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과 괴뢰국인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으로 분할된다. 조국의 독립영웅이었던 그는 이때 히틀러와 악수하며 협정에 서명한 것 때문에 나머지 인생 30년이 크게 꼬이게 된다. 윈현 협정 3개월 뒤 총리직에서 사임했고, 국방장관으로 내각에 남았다.
2.4. 제2차 세계 대전 및 말년
1939년 나치 독일의 체코 지역 점령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나치 독일의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국방장관이 되었다.나치 독일의 점령 기간 동안 시로비가 크게 뭘 한 건 없었는데, 그는 명망 높은 인사였던 터라 원래 감시가 심했던데다 1942년에 체코 총독 대리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 대장이 체코인들에게 암살된 이후에는 독일의 체코 레지스탕스 운동 탄압이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시로비는 이 와중에도 개인적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자금을 보탰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한 이후 1947년 체포되어 프하라 국립법원에서 독일에 결탁한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1960년에 사면받기는 했지만 그는 그로부터 약 8년간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후스 전쟁의 리파니 전투를 그린 그림을 지켜야 했다. 이 일로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입은 그는 1968년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지만, 2년 뒤인 1970년에 사망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 이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