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2395><colcolor=#fff> 앙리 리비에르 Henri Riviè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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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앙리 로랑 리비에르 Henri Laurent Rivière |
출생 | 1827년 7월 12일 |
프랑스 파리 | |
사망 | 1883년 5월 19일 (향년 55세) |
응우옌 왕조 하노이 인근 꺼우쩌이 | |
학력 | 프랑스해군사관학교 (졸업) |
군사 경력 | |
복무 기간 | 프랑스 해군 |
1842년 ~ 1883년 | |
최종 계급 | 대령 |
주요 참전 |
크림 전쟁 제2차 이탈리아 통일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멕시코 출병 청프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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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군인.2. 생애
파리에서 태어났고 1842년 해군 사관생도로 입대해 태평양에서 복무를 시작했다. 1849년 해군 소위가 되었고 지중해 전대에서 복무했다. 크림 전쟁, 이탈리아 통일 전쟁, 멕시코 출병,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적을 얻지는 못했다.뉴칼레도니아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위로 진급했으나 베트남으로 좌천되었다. 1881년 천주교 신부를 죽인 범인을 찾고 상인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5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하노이를 무력으로 점거했으며 이에 베트남 조정은 유영복의 흑기군[1]과 청나라에게 도움을 청했으며 당시 이홍장은 협상을 제안했으나 거부했다. 이에 흑기군+청나라 연합군이 자꾹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했다.
이에 프랑스 총리 쥘 페리의 지지를 받아냈고 국내의 여론도 가르니에의 월권행위와 달리 좋은 반응을 보였다. 이에 청의 당경승은 유영복에게 공격할 것을 명령했고 도발하는 벽서를 써붙어 하노이성 밖으로 나오게끔 해 꺼우쩌이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했다. 전투 중 대포가 뒤집혀 수리하다가 흑기군의 총을 맞고 전사했다.
이 계기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청나라와 전면전을 벌이게 된다.
[1]
프랑수아 가르니에의 프랑스군을 격파하고 가르니에를 전사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