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시기인 1707년 4월 25일 스페인 알바세테의 알만사에서 스페인-프랑스동맹군과 영국-포르투갈-네덜란드 연합군이 맞붙은 전투.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전쟁 개시 이래 불리하게 전개되던 전황을 뒤집는데 성공한다.2. 배경
1705년 10월 19일, 영국-네덜란드-오스트리아 연합군은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지방의 대도시인 바르셀로나를 2개월간 공격한 끝에 공략한다. 이어 그해 12월 발렌시아가 가담하면서, 연합군은 카탈루냐와 발렌시아의 호응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펠리페 5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1706년 4월 바르셀로나 탈환 작전을 개시했지만 적의 역공으로 패퇴했고, 연합군은 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의 지휘하에 포르투갈군과 함께 스페인 내부로 깊숙이 침투했다. 급기야 1706년 6월 25일, 연합군은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에 입성했고 6월 29일엔 사라고사까지 함락시켰다. 이로서 연합군은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마드리드, 사라고사 등 스페인에서 가장 큰 도시 4개를 모조리 확보했다.그러나 스페인 귀족과 국민들은 여전히 펠리페 5세를 자신들의 국왕으로 지지했고, 연합군의 보급선이 지나치게 길어저셔 도시들을 오래 점거하기 힘들었다. 얼마 후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급파된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는 프랑스군을 이끌고 연합군에게 역공을 가해 발렌시아에서 몰아내고 1706년 10월 마드리드를 탈환했다. 1707년 초, 골웨이 백작은 마드리드를 다시 공략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잉글랜드-네덜란드 연합 해군이 이베리아 반도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군대는 안정적인 해상 보급을 받았고 잉글랜드로부터 기병 3개 대대와 보병 13개 대대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반면 프랑스군은 열악한 보급을 만회하려고 드넓은 스페인 영토 곳곳에 분산 배치되어 있으므로, 적의 공세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골웨이 백작은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4월에 공세를 개시하기로 했다.
골웨이 백작은 오스트리아군으로 하여금 오리우엘라를 공격하게 해 무르시아 일대를 위협함으로서 적의 시선을 그쪽으로 쏠리게 했다. 그 사이, 그가 이끄는 영국-포르투갈-네덜란드 연합군은 아라곤으로 진군한 뒤 나바라로 나아가 펠리페 5세를 프랑스의 원조로부터 완전히 차단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그의 군대는 카스탈라로 나아간 뒤 푸엔테 라 히구아라로 진군해 4월 10일에 도착했다. 이후 그는 작전을 변경했다. 프랑스군이 아직 제대로 합세하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그는 아예 프랑스군이 모두 집결하기 전에 무르시아 일대를 석권하기로 했다. 그는 4월 12일 에클라로 진출했고, 이후 4월 14일에 몬테레그르 델 카스티요에 도착했다. 그러나 4월 17일 비예나로 진격한 연합군은 거기서 적 수비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일주일 동안 공성전을 벌인 끝에 함락시킬 수밖에 없었고, 프랑스군은 그 사이에 집결하여 적에게 역공을 가할 태세를 갖췄다.
4월 20일, 베릭 공작은 알만사로 진영을 옮긴 뒤 4월 22일에 2천 명의 보병대와 500명의 기병대를 연합군이 장악하고 있던 아요라토로 파견해 재탈환하게 했다. 연합군 척후병들은 이를 확인하고 골웨이 백작에게 보고했지만, 아요라토로 파견된 적 분견대의 규모가 8천 명에 달한다는 과장된 보고를 했다. 이에 골웨이 백작은 적이 아직 모두 모이지 않았고 8천에 달하는 분견대를 따로 다른 곳으로 보냈으니 알만사에 있는 적의 규모는 아군보다 훨씬 열세하리라 확신하고 알만사를 급습하기로 결심했다. 이리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패권이 걸린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영국-포르투갈-네덜란드 연합군
- 총사령관: 골웨이 백작 앙리 드 마스
- 병력: 15,000 ~ 28,000명
3.2. 스페인-프랑스 동맹군
- 총사령관: 베릭 공작 제임스 피츠제임스
- 병력: 25,000 ~ 32,000명
4. 전투 경과
4월 25일, 알만사로 진격한 연합군은 대열을 형성했고, 프랑스-스페인 연합군 역시 이에 맞서 대열을 형성했다. 양측의 대열간 거리는 6.5km였다. 영국-오스트리아-네덜란드-포르투갈 연합군은 42개 보병 대대와 60개의 기병 대대를 정렬시켰으며,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은 50개 보병 대대와 81개 기병 대대를 배치했다. 골웨이 백작은 예상과는 달리 적의 규모가 큰 것에 경악했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후퇴했다가는 군대의 사기가 떨어지고 적의 추격에 직면할 것이 자명하다고 판단하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오후 3시경, 양측 포병대가 서로에게 포격을 가했고, 뒤이어 스페인 기병가 체로 몽티존과 아로요 데 로스 몰리뇨스 하천으로 진격하여 잉글랜드-네덜란드 기병대와 격렬한 결투를 벌였다. 골웨이 백작은 좌우익 부대가 적을 붙들어 놓는 사이 중앙의 주력 부대가 적의 중앙 대열을 돌파하는 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중앙 부대에게 전면적인 공세를 지시했다. 이에 연합군 중앙 부대는 프랑스-스페인 동맹군의 중앙을 맹렬히 공격했고, 이로 인해 프랑스-스페인 동맹군 중앙 대열은 허물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이에 베릭 공작은 예비대 및 일부 기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막아내게 하면서 대다수 기병대에게 적의 측면을 돌파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스페인 연합 기병대는 즉각 행동을 개시했고, 마침내 연합군 좌익이 적 기병대의 맹렬한 돌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좌익이 붕괴되자 연합군은 삽시간에 공포에 사로잡혔고, 우익 부대는 가까스로 전장을 무사히 탈출했지만 중앙에 배치된 연합군 병사들 중 다수가 적에게 주살되거나 항복했다. 이리하여 전투는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