Алексей Юрьевич Герман (Aleksei Yuryevich German)
(1938. 7. 20 - 2013. 2. 21)
1. 개요
러시아의 영화감독.2. 소개
1938년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명 작가 유리 게르만으로, 알렉세이는 유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를 만드는 등,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소련의 유명 영화사인 렌필름에 입사하여 영화 경력을 시작한 게르만은 첫 작품인 <일곱 번째 동무>로 비평적 성공을 거둔다.그러나, 이 이후부터 게르만의 수난 가득한 인생이 시작된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길 위의 심판>은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 이전까지 오랫동안 금지당했으며, 스탈린 시대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내 친구 이반 라프신>에 이르러서는 작품의 상영 금지는 물론이고 가택 연금까지 당하게 된다. 게르만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소련 붕괴 이후의 일이었다.
이후 뒤늦게 서방에 소개된 게르만은 알렉산드르 소쿠로프, 키라 무라토바와 함께 90년대 러시아의 대표적 영화감독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이후 스탈린 시대의 상흔을 다룬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를 만들기도 했는데, 옐친 시기 러시아의 엉망진창인 경제 상황으로 인하여 완성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프랑스 자본의 손을 빌려서 간신히 영화를 완성하게 됐다. 이후 이 영화는 1998년 칸 영화제에도 진출했는데, 너무나 난해한 내러티브 탓에 수상에는 실패한다.[1][2]
2000년, 게르만은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신이 되기는 어렵다>의 촬영을 시작하였는데, 2006년이 되어서야 이 촬영을 마치게 된다. 그러나 후반 작업과 편집이 엄청나게 길어진 탓에 영화는 2013년에야 공개된다. 알렉세이 게르만은 2013년, 영화의 후반 작업 도중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들이 작업을 끝마치게 된다.
3. 기타
주로 스탈린 시대의 상흔,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 등을 주요 주제로 삼았고, 형식적으로는 약화된 내러티브, 그로테스크한 비주얼, 흑백 촬영 등이 주요 특징으로 지적된다. 후기로 갈수록 장광설과 기괴한 캐릭터들, 긴 분량 때문에 즐기기 어렵다는 평이 많다. 세대는 타르콥스키랑 비슷하지만, 검열과 제작 과정의 어려움 때문에 제대로 활동을 못했던 감독으로, 러시아 현지에서는 소련 붕괴 이후 발굴된 저주받은 거장 감독으로 추앙받는다. 러시아 영화 중에 엄숙함을 파괴하고 막 나가는 카오스와 블랙 코미디를 추구하는 감독들은 알렉세이 게르만과 키라 무라토바 영향력이 강하다. 일리야 흐르자노프스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대표적.국제적으로는 흐루스탈료프, 나의 차!와 신이 되기는 어렵다가 가장 알려진 편. 사후에 재평가가 일고 있는 편이지만 소련 시기 영화들은 러시아 바깥에서는 접하기 힘든 편이다. 평론가 유운성조차도 카자흐스탄 출장 당시 겨우 두 편 정도 DVD를 구했다고 할 정도.
아들인 알렉세이 게르만 주니어도 <도블라토프> 등으로 유명한 영화 감독이다.
4. 작품 목록
- <일곱 번째 동무> (1967)
- <길 위의 심판> (1971)
- <전쟁 없는 20일> (1976)
- <내 친구 이반 라프신> (1984)
- <크루스탈리오프, 나의 차> (1998) [3]
- <신이 되기는 어렵다> (2013)[4]
[1]
당시 심사위원장이던
마틴 스콜세지는 이 영화를 굉장히 호평했으며,
황금종려상까지 주려고 했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해 불발되었지만.
[2]
이 영화의 난해함 탓에 게르만은 훗날 영화 앞에 영화의 내용과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는 자막을 달게 된다. 설명이 있어도 난해한 건 여전하다
[3]
사실 알려진 한국어 제목은 오역에 가깝다. 먼저 러시아 발음으로 보면 Хрусталёв 발음은 흐루스탈료프에 가까우며 전체 문장 역시 명령형에 가깝기에 최종적으로 흐루스탈료프, 차를!가 정확한 번역이다. 제목 유래 역시
라브렌티 베리야가 스탈린의 죽음을 확인하고 부하 보안장교 흐루스탈료프에게 차 대기 시키라는 명령에서 제목을 따왔기에 더더욱 그렇다. 일본어 제목 역시 フルスタリョフ、車を!로 번역하고 있다.
[4]
게르만은 작업 도중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과 아내가 작업을 완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