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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2-01-04 02:50:47

안확

파일:안확.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필명 운문생(雲門生), 팔대수(八大搜)
자산(自山)
본관 순흥 안씨[2]
출생 1886년[3] 2월 28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 구사포서계 옥동 우대마을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서촌마을)
사망 1947년 3월 3일
서울특별시
학력 수하동관립소학교 (심상과·고등과 / 졸업)
관립경성중학교 (졸업 여부 불명)
니혼대학 (정치학 / 중퇴)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사상
3.1. 민족개조론3.2. 문명사관3.3. 조선유교론3.4. 체육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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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역사학자, 언어학자, 문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안확은 1886년 2월 28일 한성부 북부 준수방 구사포서계 옥동 우대마을(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서촌마을)의 중인 가문에서 아버지 안윤기(安胤基)과 어머니 김모겸(金慕謙)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큰아버지 안순기(安舜基)에 입양되었다. 운현궁의 가령(家令)으로 흥선대원군의 최측근 ' 천하장안(千河張安)' 중 한 사람인 안필주(安弼周)[4][5]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1895년 수하동관립소학교(현 서울청계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899년에 심상과, 1901년에 고등과를 졸업했다. 그는 일찍부터 사회운동에 관심을 보였는데, 1897년 1월 독립문 낙성식에 참여했고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에도 참석해 연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소학교 교육이 매우 미흡했다고 여겼다. 그는 <조선문학사>에서 당시 수하동소학교의 몇몇 과목은 교재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수신(修身)'이란 과목만은 마음에 들었으며, 자신은 이때부터 체육에 관심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안확은 1902년 3월에 관립 경성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발견되지 않아서 그가 이 학교를 언제까지 다녔는지 알 수 없다. 그는 이 시기 서구 문명을 소개하는 책들을 보며 사상적 기반을 다졌다. 특히 유길준의 < 서유견문>과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통해 서구 문물과 서양의 정치사상들에 대한 인식을 넓혔다. 또한 그가 <조선 문학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이 시기 서북 지방을 주유했다고 한다. 이로 볼 때 그는 평안도에서 교육 계몽운동에 종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1907년 가을에 경남 진주의 안동학교(현 진주봉래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그는 1911년 3월에 경남 마산의 창신학교로 직장을 옮겼으며, 1917년 사직할 때까지 이 학교에서 근무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당장 빨리 걷는 습관부터 가져라. 방안에서 책만 읽다가 나라를 잃어버렸으니, 이 어찌 피눈물 나는 선배들의 모습이 아니냐."며 체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1914년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의 축구부와 야구부를 신설했다. 당시 공이 없자 짚공을 만들어 사용했고, 정식 경기에는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사용했다. 창신학교는 당시 대구 계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벌였고, 두 학교의 경기는 곧 이 지역의 명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안확은 1914년 5월 17일 추산정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어 "이제 이 나라를 되찾고 이 민족을 일인들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은 교육을 통해서입니다."라고 호소했다. 이후 1914년 말에 유학생 자격으로 도쿄로 유학가서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일본의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다만 그가 니혼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니혼대학에 이를 입증할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고, 유학 기간 또한 니혼대학을 졸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확은 일본 유학 기간 동안 일본어와 근대 학문을 습득하고 이를 토대로 자신의 국학을 구성했다. 그는 <조선의 미술>에서 한국의 미술이 중국 및 인도 미술을 배낀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선의 문학>에 한국의 문학은 서양보다 훨씬 앞서 '발달'을 이뤘으며, 국어는 일본어를 비롯한 다른 여러 언어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정도로 독자성을 갖췄다고 봤다. 그러나 국학을 탐구하는 이가 없고 새로운 풍조에만 빠져서 국학은 학문적으로 전혀 발달하지 못한 상태에 있다면서,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배달혼'을 고양시키기 위해 한국 고유의 특성에 대한 연구, 즉 국학에 전념할 것을 요구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안확은 1916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현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 소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이 결성되었을 때 마산지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그는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1918년 이회영이 주도하고 이승훈, 오세창, 한용운 등이 참여한 고종 황제의 해외 망명 계획에 관여했다. 그리고 3.1 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자 마산에서도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고 4월 3일 마산에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는 데 관여했다. 이후 1920년에 서울로 상경한 그는 1920년 6월 28일 오상근, 장덕수, 장도빈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 연합기성회를 발기하고 지방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안확은 조선청년연합회를 결성한 뒤 기관지인 <아성(我聲)>의 편집 책임을 맡았다. 그러나 조선청년연합회는 사회주의 계열과 민족주의 계열간의 주도권 문제로 창립 당시부터 내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모인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청년연합회 내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에 비해 세력이 상대적으로 불리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서울청년회는 동아일보가 조선청년연합회를 자신들의 정치도구로 이용하려하자 민족주의계열과 대립했고, 이 대립은 안확이 <자각론>과 <개조론>을 조선청년연합회 명의로 발행하면서 심화되었다. 유자명은 안확이 개조론을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했다가 그의 강연을 듣고 곧장 반박하는 내용의 <내적 개조론의 검토>를 발표했고, 안확은 거센 비판을 이기지 못하고 <아성>의 편집자 직책에서 물러났다.

1921년 5월 중국 여행을 다녀온 안확은 1922년 11월 <신천지> 신천지사에 입사하여 편집인과 경영진으로 참여하면서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보다는 국학연구에 몰두했다. 1922년에 <조선문학사>를 발표했고, 1923년에는 <조선문명사>를 발표해 국학연구와 집필을 시작했다. 특히 <조선문명사>는 출판 기념회까지 열렸으며, 당시 동아일보 1923년 1월 11일자에 출판 기념회에 대한 기사가 실릴 정도였다. 그는 음악사에도 큰 관심을 보여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약 4년간 이왕직 아악부 촉탁을 자청하여 재직하면서 조선음악사를 연구했다. 그러나 1930년경 아악부원들과 마찰을 빛은 끝에 아악부 촉탁을 그만둔 그는 잡지 <신생> 1930년 12월 호에 다음과 같은 시문을 기고했다.
세상이 험악하니 도처마다 요란하다.
태평천지 찾아가니 어덴들 다를소냐
아마도 나의 피난처는 책뿐인가 하노라.

그리고 1931년 6월 7일 조선일보 기사에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기고했다.
장부가 하올 일 말타기와 검술이라.
이 평생 먹은 뜻이 서생으로 그릇했다.
어긔야 분한 세상에 어이까 하노라.

이러한 그의 시들은 그가 품었던 포부가 현실에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에 대한 깊은 실망이 담겨 있다. 이후 그는 사회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국학 연구에 몰두했다. 안확을 다룬 여러 논문들은 그가 1933년 7월 이후 만주, 백두산, 압록강, 중국, 하와이, 대마도 등지를 유랑하며 국학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했다고 서술한다. 하지만 문일평의 일기에는 안확이 1934년 2월 13일과 9월 14일, 9월 27일에 문일평과 이병도를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함께 회포를 풀었다고 기술되어 있으며, 1935년 3월 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는 그가 청년회관에서 조선무예사와 무사정신을 강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그리고 안확은 1936년 '조광사(朝光社)'에 <조선명인전>을 기고하기도 했다. 이렇듯 안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국내에 계속 남아있었고, 1938년 5월부터 11월까지 7개월간 여러 글을 기고했다. 그렇다면 안확이 유랑을 떠날 시기는 1936년 즈음부터 1938년 사이인데, 당시의 교통수단으로 대략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만주,백두산, 압록강, 중국, 하와이, 대마도 등지를 유랑하면서 자료를 모으는 건 불가능하다.

안확은 1938년 5월부터 1940년까지 문학, 역사, 철학, 어학, 음악, 미술, 체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17편의 글을 기고했다. 1940년에 <조선무사영웅전>을 발표한 후 1941년에는 휴식을 취했고, 1942년 <반도무사도의 유래와 발전>, <무사소사(武士小史>, <고구려의 문학> 등을 발표했다. 이후엔 집필 활동을 잠정 중단한 그는 1945년 8.15 해방을 맞이한 뒤 친구 이병두와 함께 정치 활동을 하기로 협의하고 정당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급환에 걸려 1946년 11월 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안확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3. 사상

3.1. 민족개조론

안확은 1915년에 발간한 <조선의 문학>에서 민족의 정체성을 '전래국수'로 규정하고, 이를 "조선 수천 년의 고유한 무력(武力) 정신" 혹은 "신성한 정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정신은 조선 시대의 '학문 유교'에 오염되어버렸다며, 자신은 유교 정벌에 설 것이며 고유의 문학과 신성한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조선이 6대 문명 국가 중 하나이며 본래의 미술과 문학은 서구와 대등한 수준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우수한 문화가 성리학에 의해 억제되어버렸고 이로 인해 조선의 기술이 서구보다 열등하게 되었다며, 성리학을 배제하고 서구의 신문명을 받아들여 고유한 조선의 문명과 조화시킨다면 조선은 서구와 같은 문명국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안확은 조선 민족성의 약점으로 '반도성'과 '감상성'을 들었다. 그는 반도성은 지리적 조건에서 기인한 것으로 고립성이라는 특성을 낳았으며, 유교의 분립주의의 영향을 받아 더욱 심해져 결국에는 "사색당파의 다툼이 5백년 살풍경을 만들어"내게 되었다고 봤으며, 조선 문명은 고립성으로 인해 진보, 발달을 이루지 못하여 산골짜기에서 썩어버렸고 남은 찌꺼기는 오직 언어와 언문 뿐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감상성은 추상성 관념과 이상적 정신이 박양하여 모든 행위가 감상에서 나오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안확은 조선 민족이 이 감상성에 젖어 운수와 숙명성을 믿고 추리력이 부족해졌다고 여겼다.

한편, 안확은 조선 민족성의 장점으로 조직성, 의리심, 내구성을 들었다. 특히 그는 조직성이 "동양 여러 인종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족속에서도 볼 수 없는 조선인만의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이 조직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 좋은 정치적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현재에도 동일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서, 그 선례로 갑오개혁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거의 모든 민족개조론자들이 조선의 붕당 정치를 비난한데 비해 "그 본질은 유럽의 대의정치와 추호도 양보할 것이 없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지금의 시대를 문명 발전의 전환기로서, 구도덕과 신도덕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혼란의 시대라고 여겼다. 그는 당시 도덕에 대한 관념들을 '허무주의', '공리주의', '성선설'로 구분했다. 그는 허무주의에 대해서는 "신구 사상이 충돌하여 선을 얻지 못한 가운데 회의, 번민, 고통, 타락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고 간주했고, 공리주의는 공동 생활에 실패한 이기주의이며 독재와 압제 같은 결과를 야기한다고 봤다. 또한 성선설에 대해서는 "이(理)는 인간의 천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이성의 작용에 따른 결과이며, 양심은 내적인 갈등이 존재재하기 때문에 도덕의 표준이 될 수 없다"며 역시 옳지 않다고 봤다. 그는 새로운 도덕의 표준으로 '자유이상'을 제시했다.

한편, 안확은 개조론에서 주장하는 "생존경쟁론"을 수용하고 조선이 민족간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되기를 갈망했다. 하지만 그는 <자각론>에서 상호부조론을 수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옛 사람들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깨닫지 못한 까닭에 사회의 원칙도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사회의 상태가 운수의 지배를 받아 순환소수와 같이 변화한다고 보았다. 본래 사회의 상태는 각 개인이 자유의사로 이성을 발휘하되 그 정도가 같지 않으면 나은 자가 모자른 자를 이끌어 교화하며 동시에 나와 남의 정신이 다투는 과정에서 우승열패가 이루어진다.

안확은 단체를 위해 개채를 희상하는 경우는 사회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일어난다고 봤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사회와 개인이 서로 조화와 협력을 이루어 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는 사회가 성인(聖人)이나 영웅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동류인 사람들이 이익이라는 동기로 서로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사회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엘리트의 존재를 강조한 이광수의 민족개조론과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안확은 가족은 사회조직의 단위이자 공동생활의 의식적 조직이며, 가족이 없으면 사회는 모두 소멸한다고 여겼으며, 국민 또는 인류가 점점 발전하는 것도 가족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는 결혼과 관련해서 특이한 주장을 했다. 그는 가족의 이상을 “부부 부자 형제와 같은 직분으로써 자신의 이상적 인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이 가족적 이상에 근거하여 부부의 관계는 “완전히 동등한 관계”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소설적 연애결혼'은 매우 위험하며, 결혼은 쌍방의 동의와 부모의 동의, 그리고 스승과 벗들의 동의를 얻어 행해야 하며, 이러한 동의를 얻지 못한 결혼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결혼은 '사회 공동의 대사건'이니 가족과 쌍방의 의사에만 따른 결혼은 개인 도덕과 사회 도덕 사이에 모순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안확은 사회문제와 관련해 내적 개조를 이룬 후 외적 개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대항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며 인격에 기초할 때 경제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약자인 노동자가 내적 개조를 이루지 않고 경제 문제에만 집중할 시 강자인 자본가 계급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정치가 경제에 우선한다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정당한 평등의 나라는 부의 분배를 고르게 하며 근면 절약의 목적 아래 인민의 경제생활을 보호하고 장려하나니 그러므로 정당한 나라를 가진 자라야 그 경제생활이 자유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안확은 문명이 진보할수록 생활의 곤란함이 증가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게 될 것이므로, 정치를 통해 정당한 평등의 나라를 실현시켜야만 문명이 진보할 때의 불평등 심화를 억제할 수 있다고 봤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동계급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노동자의 심리와 습성을 관찰하여 노동문제를 해결할 힘을 먼저 일으켜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야 하며, 노동자가 자신의 심성과 행위는 돌이켜 보지 않고 자기의 경제적 요구만 애걸해서는 대중의 동정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유자명은 내적 개조를 주장하는 자들은 현실 사회제도의 불완전함을 깨닫지 못하고 무비판적이며 현재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바탕에 횡일하는 인생 고통, 사회고통, 시대고통 등을 제도의 죄가 아니라 한갓 인심의 죄라고 주장한다고 봤다. 또한 그는 인심의 개조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인 견해를 보였다.
내적 개조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소위 인심의 개조라는 것이 재산으로 인해 권력까지 부여된 유산계급의 심리를 변화하게 하여 현 사회 제도의 결함을 깨닫게 하고 그들이 자진해서 사회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말이라면 그것은 도저히 성공할 날을 기약치 못할 것이다.

3.2. 문명사관

안확은 정치사를 통해 생활사를 알 수 있고, 아울러 민족정체성도 공고히 할 수 있다고 봤다. 그는 조선 정치의 특색으로 자치제를 들면서, “조선의 자치제는 단군 건국시대부터 있었던바 그리스 정치와 같은 것으로 동양에서는 선진, 독특한 생활”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문명사관에 따르면, 조선 건국의 '2대 강력'은 '혈족 관념'과 '종교'였다. 그는 상고시대의 종교로 천신 숭배와 조선(祖先) 숭배를 들면서, 조선(祖先)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는 이들이 동일 혈족임을 증명하고자 종교를 동원했고, 조선숭배는 조선인들이 혈족 관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봤다. 또한 그는 아이누, 견융, 한족 등이 “자기 본래의 습관을 버리고 조선의 좋은 습관 풍속을 존봉하고 동화하여 자기 종족의 추장에 귀부하려 하지 않고 조선인과 더불어 공동의 선조를 추대하는 관념이 생겨났다”고 하였다.

안확은 이 조선숭배를 매개로 단군의 조선 건국을 설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 자치제의 특색이 나타나는데, 안확은 이를 ‘가족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단군의 조선 건국이 모세, 솔론, 누바와 같이 위대한 입법자가 국가를 건설하는 경우가 아니며, 신적인 존재의 명령을 받아서 건국한 경우도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단군이 사람들의 추대를 통해 군장이 된 사실에 주목하면서, 단군의 조선 건국은 “가족적 정치의 사상이 점차 발달한 바 전민족의 일치된 의사로서 나라를 세우고 통치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조선의 건국은 개인-가족-부족-국가의 단계를 밟은 것이 아니라 조선숭배를 통해 가족적 관념이 확산되면서 개인-가족적 국가의 단계를 밟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족주의는 건국 이후, 봉건제의 성립에 있어서도 조선적인 특색을 구성했다. 안확은 ‘추대’만을 갖고서 조선의 자치제를 민주정이나 공화정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처음에는 추대의 절차를 밟았어도 이후에는 세습군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확은 일단 “다수자의 의사에 군주정체”라고 규정한 다음, 광범위한 영토를 통치하기가 어려워서 바로 봉건제 를 도입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봉건제가 군사적 정복에 의해 만들어지고, 중국의 봉건제는 군주제가 성립된 이후에 만들어진 데 비해, 조선의 봉건제는 평화적인 방법으로, 혈족관념과 자치적 정치에 기초하여 국가 건설 당시에 만들어졌다고 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여론에 기초한 군주정체"가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으며, 그는 이것을 공화제로 간주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적 발전을 두 측면에서 설명했다. 첫번째는 정치적 단위의 단일화였다. 그는 <조선문명사>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전단 최초 2백년간은 봉건제도로 조직되어 한 대왕 아래 여러 왕이 중립하였고 그후 3천년간은 복체의 정치조직으로 내려왔다. 처음에는 무수한 소정치단체가 있었다가 이것이 다시 공합하여 5, 6개의 정치단체로 형성되고 그 5, 6개의 정치단체가 다시 변하여 3조 병립으로 되고, 그 삼조의 정단이 양조대립으로 되었었다. 그리하여 고려조로부터는 정치의 조직이 단체로 되어 역사가 단식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안확은 조선의 정치가 작은 소방들로 분열되어 있다가, 통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둘째는 정치제도의 발전이다. 그는 정치의 발전을 공화제 - 혼합체 - 귀족정의 순으로 봤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정신이 관습에 있고 주권이 민중에 있어서 완연한 공화제를 이루었고, 삼국시대부터 양조시대에 이르기까지 전후 천년간은 군권이 발달하고 계급제도가 서립하며 구래에 제도와 외국의 제도를 혼용하는 색채가 나타났다. (중략) 전대(삼국시대)정치의 성질은 프러시아 정부의 형체와 같이 군주, 귀족, 인민의 혼합체로 되어 있었다. 까닭에 분립시대에 있어서는 귀족이 있으나 그 권력이 별로 크지 않으며, 또한 참정권이 없으나, 대사를 다 민의에 따라서 행하였었다. 고려조가 수립된 이후로는 주권이 귀족에게 있어서 일반 정무가 귀족의 관할에 달려 있었으므로 근고사는 순전한 귀족의 무대가 되었다.

또한 그는 불교와 고려 왕실의 관계를 로마교회와 로마제국에 비교함으로 서구 중세시대와 유사한 것으로 파악했으며, 부여의 군주제를 폴란드의 선거왕제에 비교했고, 마한, 진한, 변한의 군주제 역시 선거제로 이해했다. 심지어 고구려의 국상인 대대로마저 취임할 때마다 전투를 통해 결정짓는 ‘교상전(交相戰)’을 벌임에도 불구하고, 3년 1대로 되어 있는 점을 근거로 입헌군주국의 총리와 유사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고려시대의 "서경의 특별관제"와 사심관 제도 역시 지방자치의 관점에서 이해했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서구의 역사와 이론을 한국사에 무리하게 적용시키려 든다는 비판을 받았다. 안확이 이렇듯 서구와 조선의 역사를 비교한 것은 조선이 서구와 동등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안확은 조선시대의 정치를 ‘군주독재정치’로 규정하면서, 이를 고려시대의 귀족정치보다 발전된 것으로 설명했다. 군주독재란 “군주가 신민 위에서 전제권을 행사하고, 법률상의 전제권을 소유하며, 법률에 복종할 의무도 없고, 윤음으로 그 법률을 폐할 수도 다시 행할 수도 있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는 조선시대의 군주는 그 권한에 제한이 있어 인민이 무제한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군주독재정치를 군주 한 사람만이 권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군권을 매개로 신민의 정치참여가 크게 확대된 정치로 보았다.

안확은 조선시대 정치가 발전한 증거로 붕당정치를 들었다. 그는 자유가 갈등을 초래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자유는 정치적 의견의 표출을 가능하게 하고, 그런 정치적 의견들이 논의의 과정을 거칠 때 이견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가 없는 전제국의 경우, 관리나 인민이 왕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관민이 다 같이 군주의 노예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난 이유도 없고, 당파가 형성될 수도 없다. 자유가 소중하다면, 갈등 역시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안확은 이러한 논리를 들어 붕당정치는 자유가 가져온 자연스러운 정치적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는 붕당정치가 세 가지 점에서 정치 발전에 기여했다고 봤다. 첫째는 왕권을 견제함으로서 군주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자유를 확대시키며, 둘째는 빈번한 정권교체를 통해 인재들에게 정치적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하며, 셋째는 갈등과 대립 속에서 "중정의 도"를 얻음으로 초월적 진보를 이룩하는 데 기여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갈등은 권력의 제한, 정치적 참여의 확대, 정치적 타협을 이끌어내 자유를 증신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만약 이것을 부정적으로 간주하고 인위로 제거한다면 자유마저 박탈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의 정치는 “비록 군주독재정치이나 입헌군주제나 공화제와 다름없이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은 안락함을 이룩했었다”고 평가했다.

한편, 안확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가 "굴복주의"가 아니라 "호혜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는 호혜주의를 “합리적 타산의 생각”이 명확한 법률적 감정을 발생시킨 결과라고 하였으며, 근세조선의 외교를 “법률적 관념으로 주권을 옹호하는 동시에 호혜주의를 견지하여 권력과 도리를 병행하는 평화정책을 발휘”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안확의 호혜주의가 단순히 ‘권력’이나 ‘도리’ 중 하나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사용하여 국제관계에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확은 조선시대를 정치가 가장 발전된 시대로 평가하고, 그 정치를 입헌군주제적이고 공화제적인 것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이런 조선 정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오백년 전제정치라 함도 (중략) 조선인 전체가 만든 바 정치진화사의 한 계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즉 근세 전제정치는 발달능력이 있는 우리민족 인민 간에 있어서 다른 정체로 옮겨가는바 과도의 계단이니 다시 고상한 의의로 해석하면 계몽정치라 하겠다.

3.3. 조선유교론

안학은 유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며, 유교를 반문명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그는 조선의 유교는 중국의 유교와 다르다고 봤다. 여말선초시기의 유교도들은 실제주의를 주장한 자들이며, 실제주의는 민족성의 하나로 외래문화를 조선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교도가 실제주의를 주장했다는 것은 이들의 유교가 조선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중국의 유교와 조선의 유교를 “공리공론과 실행” 그리고 “이론과 실제”로 대비시켰다. 그리고 조선유교의 실천적인 성격은 정치적 참여와 정치적 갈등이라는 현상을 가져왔는데, 안확은 이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실천이야말로 사상이 이론화, 교조화 되는 것을 막는 계기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정치적 실천을 목표로 하는 조선의 유교는 정치사상을 의미하였던 것이다.

둘째로 안확은 유교의 실천에 공헌한 안향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그는 안향의 업적으로 불교의 퇴척과 신흥 국민의 양성, 유교를 통한 정치의 정리를 들었는데 이 중에서 첫 번째를 제외한 나머지 두 가지는 정치적 실천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그런데 안확은 안향이 후자에 강조점을 두었다고 이해하였다. 즉 안향은 학문의 목적을 “유학을 응용하야 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두었다는 것이다. 안향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정치혁명을 거쳐 조선이 탄생하고, 조선이 5백년 유교국가가 됨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래서 안확은 “이태조는 정치혁명의 창업주요 공(안향)은 인도주의의 신유학을 건설한 사상혁명의 창업주”라고 하였으며, 안향을 '안자(安子)'라고 불렀다.

또한 안확은 중국에서 조선으로 건너온 유교가 이제 전세계로 확대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였다면서, ‘신유(新儒)’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을 제외한 나머지 비종교인들을 유자(儒子)에 포함시켰다. 심지어 서양의 학자들마저 '서양 유자'라 칭했다. 이제 유자는 전통적인 유학자가 아니라 비종교인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렇게 변형된 유자 개념은 동서양의 경계를 지우고, 동서양을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안확은 이렇게 된다면 서구문명을 신유의 개념으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조시대의 문학>에서 이러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물론 그 사이에 있어 유불의 좋은 영향이 없지 아니하나 그것에 너무 빠져들어 믿은 결과 도리어 이로움보다 해로움이 가중하였으니, 이럼으로써 우리들이 신문학을 진흥함에는 유불사상을 격퇴치 아니하면 안된다 하겠다.

3.4. 체육사상

안확은 이성이 육체적 성질에 영향을 받는 부분이 있음을 주장하고 사람은 이성과 육체적 성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식하여 육체에 대한 중요함 또한 강조하였다. 그는 이성과 감성을 따로 분류하면서도 이성의 발휘가 감성의 성질에서도 비롯된 측면이 있다고 하여 자아라는 이름으로 합하여진다고 여겼다. 이런 점에서 볼때, 인간에게 있어 이성 뿐만 아니라 감성 및 감성이 발휘되는 육체도 중요하며, 이것이 결여된다면 사람이 사람으로써 이뤄질 수 없다. 따라서 체육의 균형적 발달과 실천에 있어 이성적 체육과 감성적 체육이 상호 조화를 이루어 균형적인 상태를 추구하여 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또한 그는 <자각론>의 마지막 단락인 '새로운 생활'에서 사람의 신체를 인간의 행위현상에 있어 두 가지의 세계로 나눴다.
정신계: 무형, 무한, 자유, 절대, 의사, 영생, 본체
육체계: 유형, 유한, 부자유, 상대, 행위, 죽음, 현상

그는 인간의 삶을 이 두 가지의 세계로 나누며 육체 현상의 행위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육체 현상의 행위활동은 모두 의사(意思)에 뿌리를 두고 있으니 만일 의사가 없으면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세계 만물은 오직 죽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의사는 정신계만 지배할 뿐 아니라 육체계도 지배하는 것이니 의사는 곧 두 세계의 원천이다. 우리는 이 두 세계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동시에 행위가 귀하지 않고 의사가 중요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의사를 존중할 때 행위는 스스로 따라 오는 것이다.

안확은 육체 활동에 있어 의사(意思)의 주도적 요인에 중요성을 언급 하고 그 이유는 행위는 자연법칙에 의하여 지배되지만 의사는 이성법칙에 따라 독립자유한 까닭이라며 인간의 신체활동은 인간이 이성에 의한 의사를 존중할때 그 의사에 뜻하는 바대로 스스로 따라 오는 것이 행위이며 신체활동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체육은 덕성을 함양하는데 필요한 교육이며, 체육을 통해 민족체질을 개조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여성체육의 필요성에 대해 <개조론>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조선의 여자 교육은 갑자기 일어난 까닭에 나라의 정도와 맞지 않아 여러종류의 폐해가 생겨났다. 첫째, 가사 교육이 부족하여 결혼 후에 집안일을 잘 처리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둘째, 시대적 생활을 경시하여 사치 생활의 허영심만 가득하다. 셋째, 체육을 경시하여 신체가 약할 뿐 아니라 충실한 자식을 낳지도 못한다.”

또한 안확은 운동회의 역할을 강조하며, 단순한 유희성 만을 나타내는 운동회가 아닌 진실한 민성을 함양할 수 있는 운동회의 방침과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운동회는 근대체육을 일반에게 널이 보급시키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당시의 민족적 위기를 맞아 민족의식을 각성 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계몽하는 기능도 담당할 수 있다고 봤다. 특히 당시 운동회가 대부분 유희와 오락에 치중하고 있었지만 군사훈련적인 경기도 포함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운동회가 단순한 유희적 운동회로 전락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군사훈련적 경기를 육성시키기 위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안확이 마냥 운동경기의 유희적 성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청년회의 사업>에서 오락정신을 언급하며 올바른 여가생활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밝혔다. 그는 오락의 장점은 심신의 피로를 회복하여 주어 정신을 쾌활하게 하여 준다고 밝혔다. 반면 오락의 단점은 과도한 유희적 오락에 빠지면 게으른 성품이 배양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오락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그 여러 종류의 오락에 근본바탕이 되는 것들이 심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므로 매우 주의하여야 한다는 것 이다.

[1] '廓'이라는 글자의 뜻과 음이 클 확, 둘레 곽 등이 있는 탓에 자주 안곽으로 오기된다. 심지어 순흥안씨대동보 23권 292쪽에도 안'곽'으로 오기되어 있다. [2] 첨추공파 25세 종(鍾) 항렬이나 항렬자를 쓰지 않았다. 다만 사촌형제 안종수(安鍾洙)는 항렬자를 썼다. [3] 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884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4] 순흥안씨대동보에는 안확의 직계 조상에 안필주라는 사람(安弼周)이 없다. 다만 순흥안씨대동보에 안확의 조부로 기재된 사람은 안은필(安恩弼)인데, 이름에 쓰인 필()자가 겹치는 점, 그리고 안확의 증조부 안복형(安福亨, 초명 안이형安履亨, 1774 ~ 1821)과 안확의 둘째 큰할아버지 안은난(安恩暖, 1803 ~ 1881)의 생몰연대를 볼 때 안은필과 안필주는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5] 한편, 안확이 1932년 잡지 『조선』에 게재한 「모범의 고시조」에 내세운 작자 중에 안사필(安思弼)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는 이전의 고시가집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인물이다. 승정원일기에 1875년( 고종 12) 경복궁 위장(衛將),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종2품), 1876년 창덕궁 위장, 1880년( 고종 17) 경희궁 위장 등을 지낸 안사필(安思弼)이라는 인물이 있는데, 동일인물이라면 어쩌면 안사필을 안은필로 족보에서 오기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