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여동생이다.1881년 ~ 1954년 4월 8일 (향년 73세)
2. 생애
1881년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진사 안태훈과 조마리아 사이에서 3남 1녀중 외동딸로 태어났다. 오빠로 안중근이 있었고, 남동생으로 안정근, 안공근이 있었다. 그녀는 부친의 뜻에 따라 가족과 함께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권승복과 결혼해 외아들 권헌을 낳았다.안성녀는 1900년경부터 오빠 안중근과 함께 하얼빈에서 살다가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이듬해에 어머니 조마리아, 남동생 안정근, 안공근과 함께 연해주를 거쳐 중국 지린성 왕청현 석두하자로 이주했다. 이후 곤궁하게 살다 가족을 따라 중국 허베이성으로 이주했고, 다시 상하이로 이동했다. 중일전쟁 시기 안공근을 따라 충칭으로 피신했고, 8.15 광복 후 외아들 권헌, 며느리 오항선과 함께 국내로 귀국했다.[1]
안성녀는 귀국 후 서울 청파동과 쌍림동 일대로 거처를 옮겨다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녀는 부산에서 부산시장이 마련해 준 영도 봉래동의 두칸짜리 가옥에서 살았다. 하지만 같은 집에서 살던 다른 피난민이 불편해 하자 영도 신선동 2가 2번지 산비탈로 옮기고 그곳을 새 본적지로 등록했다. 당시엔 부산시 직원이 매일 그녀의 거처를 방문해 안부를 물을 정도로 신경썼다고 한다.
1954년 4월 8일, 안성녀는 부산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당시 육군 소장이었던 당조카아들 안춘생은 이 소식을 듣고 헌병 2명을 앞세워 군용 지프차로 달려와 고인의 명복을 빌고, 유족에게 쌀 한 가마니와 생활비가 든 봉투를 유족에게 바쳤다고 한다.
안성녀의 유해는 부산 남구 용호동 천주교 묘지에 안장되었고, 1973년 묘비가 세워졌으며, 2016년에 재정비되었다.
3. 독립운동 행적
안성녀에 대한 기록은 지극히 소략해서 세간에는 안중근의 여동생으로만 알려졌지만, 최근 그녀 역시 독립운동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안춘생이 제출한 '안성녀 공적신청서'에 따르면, 안성녀는 안중근이 사형당하기 전에 면회를 다녀왔다가 기차 안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된 뒤 9일간 고문을 당했으며, 또 한 번은 독립군의 은신처를 말하라고 강요당하며 15일간 고문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양복 기술을 활용하여 군복 수선과 제작, 그리고 독립자금과 문서를 전달했다고 한다.안성녀의 자필 진술에 따르면, 그녀는 1900년부터 1904년까지 남편 권승복과 함께 양복점을 운영하며 중국 하얼빈을 통해 러시아에 있는 독립군의 군복을 조달했다고 한다.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어 러시아에 있는 독립군에게 군복을 전달하러 중국 하얼빈 서강(송화강)이라는 강을 건너려 하였으나, 강이 얼어 배가 움직이지 목하게 되자 삼성이라는 곳에서 강이 녹기를 기다리다 강을 건너 군복을 전달하기도 하였다.
안성녀 공적신청서
안성녀 공적신청서
또한 며느리 오항선은 2005년 8월 4일 <국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시어머니와 함께) 자경단 옷 기워주고 그랬지. 독립군들 모아 놓아서 지키고 그런 겁니다. 한국인들로 구성된 자경단 말입니다.
국제신문, 2005년 8월 4일 기사.
국제신문, 2005년 8월 4일 기사.
오항선은 안성녀가 일본 경찰에게 두번 체포되어 한 번은 9일, 또 한 번은 15일 조사받고 귀가하는 걸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2]
2019년 3월 26일, 안성녀의 친손자인 권혁우 광복회 부산 남부연합 회장과 '안성녀 여사 독립유공자 수훈추진위원회' 회원 20여 명은 안성녀의 묘소를 참배한 뒤 정부에 독립유공자 서훈을 촉구했다. 권혁우 회장은 독립유공자 서훈이 확정될 경우 할머니의 유해를 현충원에 모실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안성녀의 독립운동 행적을 입증할 공식 서류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