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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0-12 20:37:06

안기석

1. 영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기석2.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안기석

1. 영주군 출신 독립운동가, 안기석

성명 안기석(安基錫)
생몰 1897년 3월 25일 ~ 1968년 10월 6일
출생지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금계동
사망지 경상북도 영주시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안기석은 1872년 3월 25일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읍 금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4년 2월 21일에 조직된 경북 영주군의 풍기청년회 간부로 활동하며 청년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생활 개선에 힘썼다. 1925년 5월 11일에는 영주에서 노농교육연구회(勞農敎育硏究會)를 창립해 노동자, 농민 교육과 복리 증진에 노력하고 이들의 결속을 견고히 했으며, 각 마을의 야학 교육의 상활을 관찰 및 장려하기 위해 순회교원을 두고 순회강의, 토론, 문예회 등을 개최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김준상(金俊相)과 함께 경상북도 내 각 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청년 단체원들을 선동하여 시위를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제작, 인쇄하여 반포했다. 1930년 1월 31일 김준상의 원고를 정정한 그는 <학생제군에 격함>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300매를 인쇄했다. 그는 그날 밤 풍기공립보통학교 각 교실에 격문을 살포했으며, 풍기농민조합 및 풍기청년동맹지부 사무소에 2매, 읍내 우진팔(禹鎭八)의 집에 2매, 노동야학당에 2매를 발송했다.

이후 인쇄한 격문을 1매 내지 6매씩 봉투에 넣었고, 2월 3일에 대구 사립복명학교 교사 최두한 앞으로 보냈으며 ,4일에는 김천, 안동, 순흥 각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에게 우편으로 발송했다. 그러나 이 일로 19명의 동지들과 함께 체포된 그는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을 거쳐 대구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약 4개월간 취조를 받았고, 1930년 7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주거침입, 출판법,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1년 5월 9일에 출옥했다. 이후 영주시에서 조용히 지내던 그는 1968년 10월 6일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안기석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2. 연해주의 독립운동가, 안기석

성명 안기석
생몰 1892년 ~ 1938년 4월 27일
출생지 미상
사망지 연해주
추서 건국포장

안기석은 1892년생으로 알려졌지만 태어난 곳은 알 수 없다. 그는 1918년 박병길(朴秉吉) 등과 함께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앞으로' 라는 제목의 신문을 등사판에 찍어 한인들에게 배포했다. 또한 1920년 3월 조선 빨치산 부대 연석회의가 개최되어 연합사령부가 설립되었을 때 제5부대 대장이 되었고, '사할린 조선인 빨치산 특립연합부대'의 간부가 되어 '자유대대'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이후 1921년 1월 초 소련군이 고려인 빨치산 부대를 소련 정규군으로 개편했을 때, 그는 여기에 찬성했다가 고려인 빨치산 지도자들로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1921년 9월, 안기석은 이르쿠츠크 사관학교에 파견되어 3학년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1922년 8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로-농 붉은 군대 군관'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 페트로그라드 붉은군대 사관학교 내에 조선과가 설치되었을 때 소대장으로 복무했으며, 제76연대 부연대장을 겸임했다. 1925년 7월 3일 국제통합군사학교 3중대 볼셰비키 세포당원과 후보 전체회의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극동노력자 공산대학 및 국제군사학교 학생 책임일꾼 통합대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8년 4월 27일 이오시프 스탈린 서기장의 대숙청에 휘말려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안기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