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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는 우리를 위하겠다는 거룩한 하나의 뜻이 있어
역사를 창조하는 숭고한 순간이 여기 막을 올리다.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로를 한 팔에 안은
여기 원천동 산기슭.
꽃다운 젊음들이 구름같이 모여 청운의 꿈을 펼려는 장엄한 순간
고고(呱呱)의 소리 우렁찬 팡파레여 울려 퍼져라.
일찍 로고스에 굶주린 우리의 혈육들이
여기 이토록 가슴설레는 출항을 앞두고
저렇게 늠름한 젊음들이 대열을 지어 내일을 설계한다.
그대! 우리의 보람이며 희망들이여!
어질기 기린처럼, 용맹은 사자처럼, 그리고 슬기는 비둘기처럼
부디 몸을 닦고 마음을 갈아
슬픈 유산의 이땅에 번영의 씨뿌리는 역군이기를.
- 개교식 축시(1973년 4월 12일 홍승랑 읊음) -
역사를 창조하는 숭고한 순간이 여기 막을 올리다.
국토의 대동맥 경부고속로를 한 팔에 안은
여기 원천동 산기슭.
꽃다운 젊음들이 구름같이 모여 청운의 꿈을 펼려는 장엄한 순간
고고(呱呱)의 소리 우렁찬 팡파레여 울려 퍼져라.
일찍 로고스에 굶주린 우리의 혈육들이
여기 이토록 가슴설레는 출항을 앞두고
저렇게 늠름한 젊음들이 대열을 지어 내일을 설계한다.
그대! 우리의 보람이며 희망들이여!
어질기 기린처럼, 용맹은 사자처럼, 그리고 슬기는 비둘기처럼
부디 몸을 닦고 마음을 갈아
슬픈 유산의 이땅에 번영의 씨뿌리는 역군이기를.
- 개교식 축시(1973년 4월 12일 홍승랑 읊음) -
1. 연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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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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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초기 부임교수 인터뷰 |
1968년 7월 15일에 이 조약은 공포되었고[2] 대한민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는 이 협정을 지켜나가기 위하여 한·불 혼성위원회를 만들었다. 첫 번째 한·불 혼성위원회가 개최되기 전 1969년 1월에, 박희범 문교부 차관이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하고 양국 정부 당국에 각각 기술 초급대학 설립에 협력해줄 것을 제의했는데, 이것이 아주공업초급대학을 탄생하게 한 최초의 제의였다. 1969년 4월 19일에, 박충훈 부총리가 프랑스 파리에서 3일 동안 열린 대 한국경제협의체 회의에 참석하여, 대 프랑스회담에서 드브레 외무상과 베탕쿠트 공업 상을 만나 한국과 프랑스 간 통상, 기술 및 문화 협력관계를 증진하고, 프랑스의 차관을 7천만 달러에서 2억 달러로 증액함과 함께 '프랑원조계획에의한공과대학설립확약'을 받아냈다.
1969년 6월 16일과 17일 프랑스 파리에 열린 1차 한·불 혼성위원회’에서 양국 간 교수교환 및 강사파견, 문화기관 설치, 상호학위 인정, 기술 및 행정요원 교환, 문화 및 기술에 필요한 자료교환, 양국의 언어 보급, 장학금제도 설치, 과학정보의 교환 등에 관한 구체적인 안건들을 논의했다. 이때 한·불 기술초급대학 설치문제 또한 논의되었는데, 언어교육, 장학, 문화 및 예술교육, 문화 및 기술협력, 기타 문화 및 기술교류 등 다섯 가지가 주요 의제였으며, 특히 전자학과, 정밀기계학과, 발효화학과, 공업경영학과 등 4개 학과 560명을 선발한다는 사항을 결정했다.
이렇게 해서 기술 초급대학의 첫 번째 학교법인은 교하학원(交河學園)으로 정해졌다. 정부는 1969년, 부천산업주식회사의 사장인 김의준 씨를 이사장으로 하는 학교법인 교하학원의 설립을 인가했다. 이때 장차 세워질 학교의 명칭을 서양(프랑스)과 교류하여 설립한 대학이라는 의미로 '서교공과대학(西交工科大學)'으로 정하기도 했다. 기술 초급대학의 설립을 인가받은 김의준 교하학원 이사장에겐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기존 초급대학들이 도태되어 가는 과도기적인 상황에서 새롭게 초급대학을 설립해 과연 건실한 대학 운영을 기대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을 꾸준히 제안했지만, 번번이 프랑스 정부로부터 거절당했다. 프랑스의 고등교육 단기과정에는 2~3년에 준비하는 BTS와 DUT 2, 그리고 각종 전문학교들이 있었고 한국과 체결한 기술초급대학의 논의는 2년제 단기과정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는 우리나라의 공업초급대학에 해당하는 IUT(Institut Universitaire de Technologie) 제도를 만들어(1967년) 생나제르 시, 낭뜨 시, 낭씨 시 등 3개 도시에 이 IUT를 설치하고 이 새로운 학제의 정착을 위해 큰 노력을 쏟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에 설립하는 한·불 기술초급대학도 IUT를 모델로 했다. 그래서 한국 정부도 교하학원의 4년제 대학 안을 수용하지 않았다. 김의준 이사장이 교하학원을 이끌며 아주공업초급대학 설립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끝내 프랑스 정부의 동의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집념은 훗날 2년제 대학인 아주공업초급대학이 4년제 아주 공과대학으로 전환되는 데 큰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3]
1971년 12월 '한·불기술 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고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다.
- 제2조 대학의 위치는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4]으로 하며, 이의 설립 및 운영은 한국정부의 책임 하에 사립학교 법인이 행한다.
- 제3조 입학시험 과목과 방법 등은 한국내 다른 기술초급 대학과 같이한다. 그러나 입학시험에는 불어가 필수과목으로 포함된다.
- 제5조 정밀기계과(2학급, 학년당 정원 80명), 전자과(2학급, 학년당 정원 80명), 발효 화학과(2학급, 학년당 정원 80명), 응용기업 경영학과(1학급, 학년당 정원 40명).
- 제8조 불어교육은 학생들이 교수가 불어로 하는 기계기구 용법에 관한 해설을 해독할 수 있도록 함을 목표로 한다.
- 제21조 한국정부는 한국인 직원의 인건비와 학교운영비를 부담한다.
1973년 3월 개교일을 채 1년도 남겨 놓지 않은 즈음, 교하학원의 대학 설립이 난관에 부딪혔다. 교하학원의 모기업인 부천산업주식회사의 경영부실과 김의준 이사장의 신병, 2년제 초급대학에 대한 불만과 불안 등이 겹쳐 더 이상 대학설립 추진이 어려워진 것이다. 이에 1972년 3월 한·불기술초급대학의 설립책임 포기각서를 문교부에 전달하고 김의준 이사장은 완전히 물러났다. 문교부는 교하학원을 인수할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 나섰고, 유신고속관광주식회사의 박창원 사장과 교섭을 벌였다.[5] 박창원 사장도 초급대학의 성공 가능성에 회의적이라 4년제 대학으로의 전환이나 4년제 대학의 병설 인가를 문교부에 요청했다. 이 요청은 즉각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박창원 사장은 추후 전폭적인 협조 노력을 다하겠다는 문교부의 약속을 믿고 교하학원 인수를 결정했다. 그는 1972년 7월 20일에 교하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였고 학교법인의 명칭을 교하학원에서 유신고속관광회사의 이름을 따서 유신학원(裕信學園)으로 변경하였으며 서교공과대학도 아주대학(亞洲大學)으로 변경하였다.[6]
캠퍼스 건설과 더불어 학사계획에 대한 준비도 함께 진행했다. 무엇보다 학장 인선에 큰 정성을 들였다. 불어 구사 능력을 포함해 프랑스에 정통한 사람으로, 기술계 대학교육을 빠른 시일 안에 일류대학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을 찾아야 했다. 여러 정보를 토대로 천거 받은 김현남 박사가 초대 학장으로 결정되었다. 김현남 박사는 프랑스 낭뜨대학에서 이학박사를 취득한 사람이었다.
개교일이 6개월 정도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아직 설계도도 완성되지 않았지만, 8월 24일에 임야와 전답으로 된 부지의 정지공사가 착공되었다. 프랑스의 랑디 대사는 불과 1주일 전에 찾았을 땐 첩첩산중이었던 곳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엄청나게 파헤쳐져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며 한국 사람이 지닌 무서운 추진력에 새삼 감탄하였다는 후문이다. 9월 20일에는 교사 본관이 착공되었다. 1973년 3월 15일 오전 11시에 본관 4층 건물, 학생회관, 동관 1층, 서관 1-3층, 실험동 1층, 프랑스인 숙소 등 완공된 건물과 건설 중인 건물이 혼재한 상태에서 학장 취임식과 겸해 입학식이 조촐히 거행되었다. 이때 김현남 학장은 입학 식사에서 한·불 우호 협력의 정신 아래 프랑스의 솔본느대학과 같은 세계적 수준의 대학으로 발전해나갈 것을 천명했다.[7]
대학개교 1주년인 1974년은 아주대학이 초급대학에서 4년제 공과대학으로 새롭게 탄생하는 의미 깊은 해였다. 1972년 9월에 있었던 한·불 간 추가 교섭 자리에서 우리 정부와 유신학원은 학교 설립 후에도 대학이 건실하게 발전할 수 있도록, 프랑스 정부에 이른 시일 내에 대학의 4년제 전환이 필요하단 점을 지속해서 설득했다. 프랑스 측은 현 협정대로 초급대학설립을 추진하되 향후 4년제 대학으로의 변경 논의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며 대학이 추후 4년제 대학으로 승격할 전망이 밝아졌다. 이후 1973년 10월에 박창원 이사장과 김현남 학장이 프랑스를 전격 방문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프랑스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프랑스 정부는 한국의 사회경제적 여건과 공과대학의 편성구조 등을 고려하여, 기존의 학과와 수는 기존 협정대로 유지하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늘리고 1학년 모집 정원을 최대 480명으로 증원한다는 데 동의했다. 마침내 1973년 11월 대한민국 정부 대표와 프랑스 정부 대표들이 서울에서 한·불회담을 하고, 4년제로의 전환을 추구한다는 합의각서를 교환했다. 이에 문교부는 1973년 12월 22일 아주공업초급대학의 아주공과대학으로의 개편을 인가하여 4년제 대학으로의 승격을 허가했다. 설립 9개월 만에 4년제 아주공과대학으로 승격한 것이다. 아주공과대학의 개교식은 1974년 4월 26일 오전 11시에 가졌으며 이때 김종필 국무총리와 민관식 문교부 장관, 피에르 랑디 주한 프랑스 대사가 참석했다. 아주공과대학 초대 학장은 초급대학 학장이던 김현남 박사가 맡았다. 그와 함께 13명의 교수가 충원됐다.
당시 한·불 간의 협력을 상징하는 뜻에서 대학 명칭의 외국어 표기를 불어(Institut Superieur de Technologie Franco-Coreen Ajou)[8]로 정했으며, 이때 발효화학과를 화학공학과로, 정밀기계과는 기계공학과로 명칭을 변경했다. 여기에 전자공학과 공업경영학을 포함한 4개 학과 10개 전공에 정원은 480명이었다. 1974년 5월 1일에는 아주대학보가 월간으로 첫 발행 되었고, 총학생회가 구성되었고, 학군단도 창설되었다. 프랑스 단기연수가 실시되었고, 방학 중에 학생 봉사활동을 진행하는 등 대학의 기본 틀에 해당하는 조직과 활동들이 속속 이루어져 갔다.[9]
아주공과대학은 1974년 7월 30일 자로 문교부에 실험대학을 신청했는데, 이를 통해 학교의 인재양성 목표와 교육 개선안을 제시했다. 이때 아주공과대학이 밝힌 인재양성 목표는 '국가관이 확립된 엔지니어, 창의력과 응용력을 갖춘 엔지니어,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하는 엔지니어의 양성'이었다. 또 그 목표를 위해 제시된 교육 개선안은 계열별 모집과 졸업학점 감소, 부전공제 도입, 조기졸업제도 도입, 현장 학습 강화 등이었다. 실험대학으로서 학생 교육을 하고 교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대폭적인 교수충원이 이뤄졌는데, 1975년에 10명, 1976년에 16명의 교수가 확충되었다. 한편 한·불 혼성위원회는 1971년의 제1차 회의 후 1979년까지 2년마다 총 5차례 걸쳐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프랑스 정부의 지원은 지속해서 이루어졌다.[10]
아주공과대학은 1970년대 후반 '외국어에 능한 엔지니어와 매니저를 양성하는 아시아의 MIT'라는 대학 발전 비전을 세웠다. 이를 위해 기존 공학 계열의 학과에다 경영학과, 불어학과, 영어학과 등 인문, 사회계열의 학과를 신설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특별장학생제도’를 도입해 우수 학생을 유치하고 이들을 엄격하게 교육하기로 유명했다. 그 결과 당시 학생들이 졸업하던 때,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하는 학생 수가 서울대학교에 이어 전국 2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78년에는 한, 불 문화협정의 일환으로 9명의 장학생을 프랑스로 유학 보내기도 했다.
1977년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무렵, 유신학원의 지속적인 후원이 어려운 상황을 맞게 되었다. 유신고속의 이윤만으로 대학 재정을 뒷받침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박창원 이사장의 사재와 일부 부동산을 정리하여 초기 투자금을 마련한 유신학원으로서는 지속적인 투자가 어려웠다. 아주공과대학은 아직 개교 초기 단계라 교수 초빙이나 시설 투자 등에 많은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대학의 재정 상황이 계속 나빠졌다. 하지만 김우중 당시 대우실업㈜ 사장은 '교육 사업을 통해 기업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시대가 요구하는 고급인력을 키우겠다'라는 뜻을 두고 있었고,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움하고 있던 대우 또한 국가, 사회적 요청에 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11] 이렇게 해서 1977년 3월 21일에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당시 대우실업 사장)이 사재 53억원을 직접 출연하여 학교법인 대우학원을 설립하고 아주공과대학을 인수했다.[12]
1977년 4월 20일 제3대 이한빈 학장이 취임하면서 아주공대가 학교법인 대우학원 설립을 계기로 국내 산학협동의 표본이 되고 한국의 국제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되자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주인상(亞洲人象)'을 제시하고, 프랑스 정부와의 유대를 긴밀히 유지할 것도 강조했다. 그가 제시한 아주인상은 '창조하는 인간상, 개척하는 인간상, 봉사하는 인간상'인데 이를 바탕으로 대학의 발전계획이 수립되고 이념이 확정되었다. 1978년 3월 학교법인 대우학원은 우수학생 유치를 위한 획기적 조치로서 1978년도 신입생부터 4년간 신입생의 20%에 해당하는 우수신입생에게 특별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는 재정지원을 하였고 4월에는 제139 학생군사교육단을 창설했다. 이어 개교 7년 만인 1980년 10월 공과대학, 경영대학, 인문사회대학과 대학원을 가진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었고 교명을 아주대학교로 바꿨다.[13]
1981년 3월 2일 종합대학교로 첫발을 떼며 지응업 학장서리가 임명된 뒤, 1981년 8월 24일 이용희 초대 총장이 선임되었다. 이용희 총장은 종합대학교의 걸맞은 체제 정비와 경영개선을 위한 노력을 추진했다. 우선 종합대학으로서의 원활한 경영을 위해 학교 규모를 확대하여 문교부에 자연과학대학과 8개 학과 증, 신설을 요청했다. 또한 체제 정비의 일환으로 교수 직위의 정상화 조치도 이뤄졌다. 1981년에 대우학원의 지원으로 대학 본관(현재의 도서관), 인문사회관(현재의 성호관), 화공실험동이 기공되어 1982년에 인문사회관과 화학실험동이 완공되었다.
문제는 이용희 당시 총장이 아주대학교와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가 소원해지게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대우학원 설립 이후 프랑스 정부의 지원이 점차 줄었고,[14] 교육방침도 엇갈리면서 갈등이 불거지게 했다. 1982년 영어교육 강화를 위해 프랑스어 필수 이수 학기를 4학기제에서 2학기로 줄이는 정책을 폈고,[15] 기존 교수충원계획에 따라 프랑스에 파견되어 학위 과정을 이수하던 교수요원들을 선별적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히며, 프랑스인 교수들과 프랑스 대사관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이용희 총장은 물러났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프랑스인 교수들도 1982년 12월 모두 철수했다.
이후 1982년 9월 28일 나웅배 재무부 장관을 2대 총장으로 선임하며 지금과 비슷한 모습의 단과대학을 설립해 대학의 틀을 마련하고 연구 여건과 시설 확충에 큰 발전이 생겼다. 특히 대학원의 경우 1984년에 3개 학과에 박사과정이 설치되면서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대학원으로 대학이 발전되었다. 석사과정도 10개 과정이 추가되었다. 1983년 9월 이때 세워진 건물이 현재의 에너지센터인 전자계산소다. 나웅배 총장은 프랑스 정부와의 관계 복원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한·불관계의 재정립을 모색하기 위해 1983년 2월 프랑스를 방문하여 프랑스의 정부 관계자들과 면담하고 낭트 대학의 교육 기관들을 찾아가 교류 협력 문제를 협의했다. 그 결과 1983년 3월 대학 부설기관으로 한·불 기술협력센터(지금의 불어권협력센터)가 설립되었다.
나웅배 총장이 정계 복귀를 위해 물러난 후 1985년 2월 26일 김효규 박사가 제3대 총장으로 선임됐다. 김효규 박사의 최대 치적은 의과대학 설립과 병원 건립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16] 정부의 설립 인가를 받기 매우 어렵고, 막대한 설립자금도 필요한 의과대학 설립을 김효규 총장은 해냈다. 아주대학교 의과대학의 교수 상당수가 연세대 의대 출신인 이유. 하지만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에 집중 투자되면서 상대적으로 다른 단과대학의 투자에는 소홀하게 되어 불만이 고조되었고, 덩달아 1991년 대학입학정원 조정을 위한 대학평가에서까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자 김효규 총장은 임기가 끝나는 시점에 물러나고 김덕중 교수를 6대 총장으로 선임했다.
아주대는 1990년대 당시 현대그룹과 삼성그룹에 이어 재계 서열 3위인 대우그룹의 강력한 지원으로 유명 교수진들을 대거 포진시켰고, 거기다 당시 아주대학교 총장은 그 김우중 회장의 형이었던, 前 서강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김덕중[17]이었다.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재원과 인력을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위한 EMBI[18] 정책을 특성화 정책으로 밀었는데 공학에선 특히나 정보통신학이 집중적으로 육성되어 정보통신학에 관한 기틀이 이때 마련되었다.[19] 1996년에는 국내 최초로 교수업적 평가제를 시행했고 전국 최초로 학생 서비스센터를 설립했다. 그리고 학과제를 지양하고 국내 최초로 학부제를 도입, 다양한 학문을 수강할 수 있는 복수전공제를 실시하는 등 내부적 교육개혁을 단행하였으며, 특성화 학부를 신설하여 우수한 신입생들을 데리고 왔다. 무엇보다 포항제철과 포항공대가 하던 방법을 도입해 1997년부터 아주대학교 졸업생 중 일정 비율 이상은 대우에서 장학금 주고 무조건 특채라는 초특급 떡밥을 EBS 교재에 대대적으로 광고했다.[20] 그 영향으로 99학년도 입시에서 무려 연세대, 고려대, 한양대에 가까운 입학성적을 자랑했으며 총장이 입학식 때 직접 '우리 학교 신입생 평균성적이 고려대보다 높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1999년 대우그룹 해제와 함께 잦은 대학 총장의 교체로[21] 리더십이 부재하면서, 아주대학교는 다소 정체기에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존 가지고 있었던 연구 역량이 강했고 탄탄했던 대학재정 때문에[22] 다시 빠른 속도로 상승세로 전환했다. 지속적인 건물건축 투자[23]가 이루어졌고, 2006년 간호대학 설립도 이루어냈다. 2008년엔 로스쿨을, 2009년 WCU 사업 선정[24], 2010년 3월엔 약학대학 설립 인가를 받았고, 2012년엔 스프링어(Springer)를 통해 아시아 최초로 세계 유일 유전자 백과사전(Encyclopedia of Signaling Molecules)을 발간했다. 2016년엔 경기남부권역 외상센터를 개소했다.
2015년엔 짧은 임기였지만 굵은 행적을 남겼던 김동연 총장이 선임되었다. 잦은 총장의 교체와 교수들 사이의 반목으로 총장의 권한이 약해지자 이사회는 총장 적임자를 대학 내부에서가 아니라 대학 외부에서 찾았다. 그리하여 적합한 인재를 찾던 중 김동연 총장을 데려오게 된 것이다. 김동연 총장은 학교 내 행사에만 힘쓰던 다른 여러 총장과는 달리 파란사다리, Ajou GreatTurning, After You, Brown Bag Meeting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하여 대학 내 외부를 활발하게 오가는 파격적인 활동을 진행했고 이러한 활동은 대학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서도 많은 호응을 받았다. 대학이 본래 가져야 할 의미와 위치를 되새기게끔 했던 총장의 활동에 감명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25] 후엔 김동연 총장이 취약 계층 학생들을 위해 몰래 자신의 연봉을 모두 대학에 기부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지며 김동연 총장의 퇴임식 날 아주대학교 총동문회는 총장을 명예 동문으로 위촉하기도 했다.[26]
아주대학교 40주년지 중 연혁
2. 연표
2.1. 개교 전
- 1962. 03.: 국회에서 한·불문화협정 계획 수립
- 1965. 12.: 서울 외무부 제1회의실에서 이동원 외무부장관과 샹바르 주한 프랑스 대사가 한·불 문화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 체결
- 1968. 07.: 한·불 문화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 공포, 한·불 혼성위원회 창단
- 1969. 01.: 박희범 문교부차관이 프랑스를 방문해 기술초급대학 설립에 협력해줄 것을 제의
- 1969. 04.: 박충훈 부총리와 프랑스 드브레 외무상, 베탕쿠트 공업상과 만나 한국과 프랑스간 통상·기술 및 문화협력관계 증진, 프랑스 차관을 7천만달러에서 2억달러로 증액, 프랑스 원조계획에 의한 한·불 기술계대학 설립 확약을 받아냄. ORTOLI 프랑스 경제장관과 한·불 기술계 대학설립에 대한 기본 방침 합의
- 1969. 06.: 프랑스 파리에 열린 1차 한·불 혼성위원회에서 대학 설립을 위한 구체적 안건 논의. 대학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한·불 혼성위원회를 통하여 대학 운영에 관여키로 합의. 한·불혼성회의 회기때가 아닌때의 학교운영에 관하여 논의할 중요한 문제는 한국과 프랑스 대사관의 합의를 통하여 추진하기로 결정. 또한 대학 개교일을 1973년 3월 1일로 결정
- 1969. 09.: 대학 설립을 국립이 아닌 사립으로 하는데 의견이 모이며 부천산업주식회사 사장 김의준에 대학설립 의향 타진.
- 1969. 11.: 김의준 사장이 학교법인 이름을 교하학원(交河學園)으로 정하고 학교명을 서교공과대학(西交工科大學)으로 확정하며 대학설립 추진함. 문교부, 학교법인 교하학원 설립 인가
- 1970. 04.: 교하학원 김의준 이사장이 프랑스 정부가 요구한 대학설립 지정지인 수원에 교지조성사업 추진 (교하학원 1억5천, 프랑스정부 1억5천, 대한민국정부 1억 지원)
- 1971. 12.: 한·불 정부간의 기술초급대학 설립에 관한 협정체결
- 1972. 03.: 재정난으로 교하학원이 대학설립 책임포기 각서를 문교부에 전달
- 1972. 04.: 문교부, 유신고속관광 박창원 사장에게 대학 인수 의향 타진
- 1972. 07.: 박창원 사장, 학교법인 교하학원을 인수하고 재단명을 유신고속관광의 이름을 따 학교법인 유신학원으로 변경, 대학 이름도 서교공과대학에서 아주대학(亞洲大學)으로 변경
- 1972. 12.: 아주공업초급대학 설립인가
2.2. 1973 ~ 1980
- 1973. 02.: 초대 김현남 학장 취임
- 1973. 03.: 아주공업초급대학(2년제) 개교
- 1973. 10.: 박창원 이사장과 김현남 학장이 프랑스를 전격 방문하여 한국 경제발전에 필요한 엔지니어를 양성하기 위해 수업 연한을 4년으로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프랑스를 설득.
- 1973. 11.: 대한민국정부 대표와 프랑스정부 대표들이 서울에서 한·불회담을 갖고, 4년제로의 전환을 추구한다는 합의각서를 교환
- 1973. 12.: 문교부가 아주공업초급대학의 아주공과대학(4년제)으로 승격 인가
- 1974. 03.: 제101 학생군사교육단(아주분단) 창단
- 1975. 01.: 문교부로부터 실험대학 인가
- 1975. 08.: 노천극장 준공
- 1975. 11.: 기숙사(現 남제관) 준공
- 1976. 06.: 제2대 이민재 학장 취임
- 1977. 01.: 학교법인 유신학원의 재정난으로 문교부가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에 대학 인수의향 타진
- 1977. 02.: 제1회 졸업생 배출(학사 97명 배출), 동문회 결성
- 1977. 03.: 대우실업 김우중 사장이 사재 53억원 출연하여 학교법인 대우학원 설립(초대 박충훈 이사장 취임), 아주공과대학 인수
- 1977. 04.: 제3대 이한빈 학장 취임
- 1978. 04.: 제139 학생군사교육단 창설
- 1978. 11.: 한·불문화협정의 일환으로 장학생 9명 프랑스 파견
- 1979. 05.: 학생회관(現 학생회관1) 준공
- 1979. 12.: 제4대 지응업 학장서리 취임
- 1980. 10.: 종합대학 승격인가
2.3. 1981 ~ 1990
- 1981. 03.: 종합대학승격, 공과대학, 경영대학, 인문사회대학 신설, 대학원 설립(석사과정 신설), 학생생활연구소, 종합연구소, 중앙전산실 신설, 지응업 총장 직무대리 취임, 대학명을 아주공과대학교에서 아주대학교로 변경
- 1981. 08.: 초대 이용희 총장 취임
- 1981. 08.: 종합대학 승격 후 첫 졸업생 배출
- 1982. 04.: 축구부 창단
- 1982. 08.: 인문사회관(現 성호관), 화공실험동 준공
- 1982. 09.: 제2대 나웅배 총장 취임
- 1983. 03.: 한·불기술협력센터 신설
- 1983. 09.: 대우그룹과 산학연구협동 조인식 체결
- 1983. 09.: 전자계산소 승격
- 1984. 03.: 대학원 박사과정 신설
- 1984. 04.: 중앙도서관, 전자계산소 준공
- 1985. 02.: 제3대 김효규 총장 취임
- 1985. 03.: 산업대학원 설립
- 1985. 06.: 돼지감자 및 바이오에너지원에 관한 국제학술회의 개최
- 1985. 11.: 축구부 합숙소 준공
- 1986. 05.: 외국어연수원 신설
- 1986. 05.: 인문과학연구소 신설
- 1987. 03.: 문리과대학을 문과대학과 이과대학으로 분리개편
- 1987. 10.: 에너지문제연구소 신설
- 1988. 02.: 산업교육원 신설
- 1988. 03.: 의과대학 신설, 경영대학원 설립
- 1989. 02.: 제4대 김효규 총장 선임
- 1990. 10.: 공학연구소, 기초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소, 경영연구소 신설
2.4. 1991 ~ 2000
- 1991. 03.: 이과대학을 자연과학대학, 문과대학을 인문대학으로 명칭 변경
- 1991. 10.: 의학관(現 송재관) 준공 및 아주대학교병원 기공식
- 1993. 02.: 제5대 김효규 총장 연임
- 1993. 12.: 제2이공관(現 팔달관) 준공
- 1994. 02.: 아주대학교 UIP(이미지통일화 관리규정) 제정
- 1994. 08.: 에너지시스템연구센터, 전자계산소 준공
- 1994. 09.: 아주대학교병원 준공 및 개원
- 1995. 02.: 제6대 김덕중 총장 취임
- 1995. 06.: 상징물(선구자상) 제막식
- 1995. 08.: 경영관(現 다산관) 준공
- 1995. 09.: 중앙도서관 정보시스템(ALIS)개통
- 1995. 10.: 평생교육원 개원
- 1996. 03.: 학제개편(33개학과 → 11개학부), 국제대학원, 공공정책대학원, 교육대학원 설립
- 1996. 06.: 교육대학원 부설 중등교원연수원 설립인가
- 1996. 10.: 교육부 선정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으로 선정, 학생서비스센터 신설
- 1997. 02.: 정보통신연구소 신설
- 1997. 03.: 학제개편(7개 단과대학, 11개 학부), 정보통신대학 신설,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종합평가 최우수대학 평가 인정
- 1997. 04.: 아주대학교 종합정보시스템(AIMS) 총체적 운영
- 1997. 05.: 디지털조선일보와 원격강좌 협정체결
- 1997. 06.: 한국대학 위성교육 협정체결
- 1997. 07.: 대학헌장 제정
- 1997. 09.: 팀제 개편, 경기도와 국제교류협력 협약체결
- 1998. 03.: 정보통신대학원 설립
- 1998. 06.: 뇌질환연구센터(SRC) 개소
- 1998. 07.: 과학영재교육센터 설치
- 1998. 12.: 창업지원센터 개소
- 1999. 01.: 외교안보연구원과 지역 및 국제통상학술연구협동 협정 체결
- 1999. 02.: 제7대 김덕중 총장 연임
- 1999. 06.: 제8대 이호영 총장 취임, 체육관 준공
- 1999. 09.: 교육부 BK21사업 주관대학 선정, 정보통신전문대학원 설립
- 2000. 02.: 제9대 김덕중 총장 취임
- 2000. 03.: 디지털도서관 개막식
- 2000. 08.: 아주대학교 캠퍼스플라자 준공
2.5. 2001 ~ 2010
- 2001. 01.: 국제대학원 부설 한국학센터 신설, 교통연구센터 신설
- 2001. 03.: 교무처 내 사이버교육센터 신설
- 2001. 06.: 총장직무대행 김철 교학부총장 임명
- 2001. 08.: 경기개발연구원 학연협정 체결
- 2001. 10.: 호서대학교 학술교류협정 체결
- 2002. 02.: 산학협력원 준공
- 2002. 03.: 제10대 오명 총장 취임
- 2002. 09.: 사회교육센터 내 심리서비스센터 신설
- 2002. 11.: ITS대학원, 과학영재교육원 신설
- 2003. 01.: 수원발전연구센터 개소
- 2003. 02.: 해군사령부(해군. 해병대)와 학군(學軍) 협정협약 체결
- 2003. 03.: 아주비전 선포식, 분수대 기공식
- 2003. 04.: 개교 30주년 행사
- 2003. 05.: 공과대학 및 정보통신대학 편제 개편
- 2003. 06.: 보건대학원/여대생 커리어개발센터 신설, 에너지시스템연구센터를 에너지기후변화연구소로 명칭 변경
- 2003. 08.: 개교 30년사 자료발간 기념식
- 2004. 01.: 제11대 박재윤 총장 취임
- 2004. 03.: 산학협력단 신설, 축구부 후원회 발대식
- 2004. 04.: 아주대학교의료원 별관 증축 기공식
- 2004. 09.: 아주대학교의료원 개원 10주년 기념식 및 비전선포
- 2004. 10.: 세포사멸조절신약개발센터 신설
- 2004. 12.: 종합인력개발센터 설치
- 2005. 05.: 법과대학 신설
- 2006. 02.: 간호대학 신설
- 2006. 03.: 제12대 서문호총장 취임, 2단계 BK21사업 선정(2006.3~2013.2), 분자과학기술사업단, 전문서비스분야사업단
- 2006. 09.: 대학 IT 연구센터 선정
- 2006. 11.: 경기남부권역 응급의료센터 착공 준공
- 2007. 01.: 산학협력관 준공
- 2007. 03.: 의학전문대학원 신설
- 2007. 05.: 전자문서관리시스템 도입 및 전면 시행
- 2007. 07.: 신학생회관 준공
- 2007. 12.: 중점연구소 지원사업 선정
- 2008. 01.: 한국공학교육인증원의 공학교육 예비인증 획득(12개 전공)
- 2008. 02.: 법학전문대학원 예비인가(정원: 50명)
- 2008. 09.: 법학전문대학원 본인가(정원: 50명)
- 2008. 10.: 법무대학원, 기초교육대학(現 다산학부대학) 신설
- 2008. 11.: 아주비전 2023 선포식
- 2009. 01.: 한국경영교육인증 본인증 획득
- 2009. 02.: 입학사정센터 신설
- 2009. 04.: WCU사업 ‘금융공학과’ 선정
- 2009. 06.: 금융공학부 신설
- 2009. 07.: 평생학습중심대학추진본부 신설
- 2009. 09.: 종합관 기공식, 이공분야 대학중점연구소 지원사업 선정
- 2009. 12.: ABEEK(공학교육인증) 본인증 전과정 획득(12개 전공)
- 2010. 03.: 제13대 이수훈 총장 취임, 약학대학 신설
- 2010. 03.: 총장직무대행 박종구 임명
- 2010. 06.: 전국대학 최초 연구관리 원격지원시스템 가동, 교육과학기술부 입학사정관제 지원대학 선정
- 2010. 08.: 2010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ACE) 선정, 의학전문대학원의 의과대학 복귀 결정
- 2010. 09.: 선도연구센터육성사업(ERC) 선정
- 2010. 11.: 교직부 신설
2.6. 2011 ~
- 2011. 02.: 제14대 안재환 총장 취임
- 2011. 03.: 2011 학부교육 선진화 선도대학 지원사업(ACE) 선정
- 2011. 09.: 유전체불안정성 제어 연구센터(SRC) 개소
- 2011. 12.: 일자리창출 지원 유공기관 대통령 표창
- 2012. 04.: 교육역량강화사업 5년 연속 선정
- 2012. 05.: IT 융합대학원 신설
- 2012. 08.: 소프트웨어특성화대학원 신설
- 2012. 12.: 외국인 유학생 유치.관리 우수대학 인증 획득
- 2013. 04.: 역사전시실, 도구박물관 개관
- 2014. 05.: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선정
- 2014. 06.: 대학특성화사업(CK사업) 6개 사업단 선정
- 2015. 02.: 제15대 김동연 총장 취임
- 2015. 09.: 교육부 대학구조개혁평가 최우수등급 획득
- 2016. 01.: 신분당선 연장선 개통, 광교중앙(아주대)역 신설
- 2017. 04.: 2017 사회맞춤형 산학협력선도대학(LINC+) 육성사업 선정
- 2017. 06.: 총장직무대행 유희석 임명
- 2018. 02.: 제16대 박형주 총장 취임
- 2018. 06.: 간호대학 간호교육프로그램인증 획득(5년간)
- 2018. 09.: 간호대학 중앙일보 학과평가 전국 top 2
- 2022. 02. : 제17대 최기주 총장 취임
- 2022. 03. : 일신관(신축 기숙사) 준공
3. 역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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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학교 역대총장 |
[1]
18개 조약 중 문화협정은 한·불문화협정, 한·중문화협정, 한·이 문화협정 총 3개가 있었는데 모두 협정 서명은 했으나 실질적으로 진행된 건 한·불문화협정 하나다.
[2]
조약이 공포되며 서울에는 주한 프랑스문화원이 세워졌고 12년 뒤엔 파리에 주불 한국문화원이 설립된다.
[3]
원래는 71년 학생모집을 계획으로 학교법인 교하학원이 당시 1억 5천만 원, 프랑스 정부가 1억 5천만 원, 대한민국 정부가 1억을 각각 투자해 수원시 우만, 원천동 지구에 11만 평의 규모로 1967년 6월 12일 착공해서 1970년 8월 30일 준공하기로 계획했었다.
[4]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정부는
수도권의 인구집중을 우려해 수도권 내에 더 이상의 대학 신설을 억제했고, 그래서
울산이나
여수 등 대학이 없는 지방의 중소도시에 설립할 것을 주장했다. 이번에도 프랑스 대표단의 반대가 있었다. 대표단의 한 사람이었던 민선식 박사(낭뜨대 물리학)는 질적으로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서울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수많은 논의 끝에 정부는 서울 근교로 위치를 합의하고
한국전쟁 당시
프랑스군 전적기념비가 위치한
수원으로 프랑스와의 국가 관계를 반영해 교지를 확정했다. 수원에 교지를 마련한 이유는 서울과의 접근성을 첫 번째 조건으로 삼은 프랑스 정부의 의중에 가장 부합한 서울과 가장 근접한 도시였기 때문이다. 1968년 1월 12일
경부고속도로 서울, 대전 구간이 확정되고, 그 후 제1공구는 서울과 수원 구간으로 정해진 뒤, 1968년 12월 21일 이 구간이 개통되어 수원과 서울의 접근성이 획기적으로 상승하였다. 덕분에 서울과의 접근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했던 대표단에 큰 점수를 받았다. 1973년 1월 10일 자 경향신문 학생모집 광고에도 서울에서 40분 거리를 명시한 것으로 보아 서울과의 접근성 문제는 그 당시에도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27] 두 번째 이유는 수원이
6.25 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최초 숙영지였다는 것이다. 1951년 11월 29일 부산을 거쳐 派韓(파한)된 프랑스군이 처음으로 숙영지를 건설한 곳이 수원이었고, 현재 지지대 고개 근처에 프랑스군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 접근성, 프랑스와 연관된 상징성 모두를 충족한
수원이 대학 부지로 확정되었다.
[5]
대학부지로 수원을 결정한 쪽은 프랑스 정부였다. 대학이 수원에 설립되기로 확정됐기 때문에 수원 근교에서 기업활동을 하는 사람을 찾았다.
[6]
1973년 2월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신문광고엔 아주공업초급대학으로 학생을 모집했지만, 광고 아래에 금년 중 4년제 대학 전환이라 쓰고 아주대학(건설중)을 별도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4년제 전환을 개교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박창원 이사장의 담화문에도 아주대학과 아주공업초급대학은 별개로 적혀있다.
[7]
당시 프랑스 정부로부터 미화 50만 달러 상당의 과학용 실험기재와 6명의 프랑스인 교수를 지원받았다. 2명은
프랑스어 교육을 담당하고 4명은 전공 분야 전문교육을 담당했다.
[8]
Asie였다 Ajou로 바꿨다.
[9]
4년제로 승격된 이후 프랑스 정부의 아주대학 투자 규모가 더욱 확대되었는데 1976년까지 미화 150만 달러를 추가 지원하고 프랑스인 교수 17명을 추가 파견하여 대학의 규모가 매우 확장되었다. 프랑스의 지원은 대한민국 국내 투자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한국에서 유능한 인재가 있다면 프랑스로 데려가 박사학위 취득까지 도울 정도로 열성이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전
KAIST 교수이자 아주대학교 1대 총동문회장이며 전 재산을 대학에 기부하고 시신은 아주대병원에 기증까지 한 황필상 박사. 황필상 박사는 1977년 학교 졸업 후 다음해 프랑스 초청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연구소에 유학해 1983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0]
아주대학교의 초기 입학정원이 적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주대학은 학생을 모집해 돈을 버는 게 아니라, 학생을 모집하면 프랑스 정부가 지원해주는 방식이라 프랑스 입장에선 학생을 많이 모집할수록 손해였다. 지금보다 대학 정원이 훨씬 적은 시대였다.
[11]
대우실업㈜은 1968년 수출 성과로 대통령 표창을 받으며 급성장 가도를 달렸다.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해외 지사(
호주 시드니)를 세웠다. 1974년 대우전자 인수, 1976년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으며 1976년
에콰도르, 1977년
수단, 1978년
리비아 등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통해 해외사업의 터를 마련해왔다.
[12]
1977년은 대우그룹 창립 10주년이 되는 해로 회사 창립을 기념하는 행사 겸 문화행사의 자리에서 대학설립을 논의하다 아주공대를 인수하기로 했다.
[13]
이때 Institut Superieur de Technologie Franco-Coreen Ajou이었던 대학명도 Ajou University로 바꿨다.
[14]
원래 계획은 한국에 IUT체계의 대학을 세우는 것이었으나 초급대학이던 대학이 어느새 종합대학이 되면서 소요되는 경비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15]
처음부터
프랑스어 보급을 위해 대학을 설립했는데 영어교육을 강화한다고 하니 이후
프랑스 측에선 협정을 틀어버렸다.
[16]
왜 대학 총장에 의사가 있나 생각할 수 있는데 김효규 박사는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을 설립하셨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에
김우중 회장은 아주대 의대 설립에 큰 힘이 될 거로 생각했고 연세대에서 아주대로 데려왔다.
[17]
김대중 정부 때 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18]
Engineering, Medicine, Business, International Studies
[19]
아주대학교 AIMS가 이때 만들어졌다.
[20]
이게 사실
대우그룹이 고꾸라지지만 않았다면 허위 과장 광고가 아닌데 아주대학교에 개설된 학과들을 꾸려보면 졸업 후 진로가 대우 계열사들과 충분히 연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우자동차,
대우중공업,
대우조선은 기계공학과에서,
대우건설은 토목공학과와 건축공학과에서,
대우전자는 전자공학과와 화학공학과에서,
대우증권과
대우인터내셔널은 경영학과에서 사원들을 수급받는다고 본다면 이해할 수 있다.
[21]
1999년부터 2012년 동안 무려 7번이나 총장이 바뀌었다. 총장의 잦은 교체와 권한 약화로 리더십이 부재하면서 광교신도시 조성 전, 신도시 개발계획이 대학에도 도움이 되게끔 만드는 대학 여론을 조성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광교중앙역과 아주대 사이의 교통로 조성에 힘을 집중하지 못했다. 또한, 광교신도시 방향의 대학 경계도 조정하지 못해 광교 주민들과 갈등이 불거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22]
대우그룹과 대우학원은 재정이 분리된 상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23]
산학협력원, 원천정보관, 홍재관, 연암관 등
[24]
WCU 사업 선정으로 금융공학부를 신설했다.
[25]
아주대학교의 약점은 홍보 부족과 인지도 약화에 관한 것인데, 총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다양한 외부활동을 진행하고 권위주의를 타파한 여러 미팅을 주최하면서 덩달아 아주대학의 인지도 상승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
[26]
2년 동안 장학금 등으로 1억4000만 원을 기부했었고 2년 동안 연봉 3억5000만 원을 받았는데, 이중 40.6% 가량을 여건의 문제로 학업에 소외된 취약 계층 학생들을 위해 기부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