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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3 00:02:17

아이신기오로 지르가랑



愛新覺羅濟爾哈朗
(1599 ~ 1655)

1. 개요2. 행적

1. 개요

청나라의 황족. 태조 천명제 누르하치의 동생이었던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의 6남이자 태종 숭덕제 홍타이지의 사촌 동생이었다.

2. 행적

백부인 누르하치가 어릴 때부터 길렀고, 호쇼이 버일러에 봉해졌으며, 1626년에 동몽골의 할하(칼카) 바린부 및 자루트부 정벌에 참전해 공을 세웠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에 참전했을 때 인조가 사신을 보내 동맹을 요청하자 아민이 한양을 공격하려 했는데, 지르가랑은 깊이 들어가지 않고 평산에 주둔하며 대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과의 동맹이 체결되자 돌아갔고 5월에는 홍타이지를 따라 명군을 공격해 금주를 포위한 후 망구르타이와 함께 명군을 격파했으며, 영원으로 가서 명군의 총병 만계와 조우하자 힘껏 싸워 격파했다. 1628년에는 아이신기오로 호오거와 함께 몽골의 구터이 타부낭을 토벌해 죽였다.

1629년 8월에는 명나라를 공격해 금주와 영원을 공격해 곡식을 불태웠으며, 10월에 홍타이지가 군을 인솔해 홍산구로 들어가자 지르가랑은 아이신기오로 요토와 함께 대안구를 공격하고 마란영의 명나라 구원군을 격파했다. 이후 마란영, 마란구, 대안구 등 3개의 명군 영채를 투항시키고 석문채로 가서 명나라의 구원군을 공격해 격파했다.

준화에서 군을 합쳐 북경에 육박했고, 통주의 장가만을 순행했다가 1630년 1월에 홍타이지를 따라 영평을 포위했으며, 배반한 장수 유흥조를 공격해 죽이고 유흥조의 동생인 유흥현을 붙잡았다. 영평을 함락한 후에는 격문을 보내 난주와 천안 등을 항복시켰고 3월에 아민이 교대하자 군을 이끌고 돌아갔다.

1631년 7월에 태종 홍타이지가 6부를 설치할 때 형부를 관장했고 황제를 따라 대릉하성을 포위했으며, 1632년 5월에는 동몽골 차하르부(찰합이부)에 대한 정벌전에 종군해 귀화성으로 달려가 무리 1,000여 명을 거뒀다. 1633년 3월에는 수암에 축성을 했고, 이전인 1629년에 명장 원숭환에게 참수당한 모문룡 휘하의 공유덕과 경중명이 5월, 산동성의 등주에서 항복하려 할 때 명나라의 황룡이 수군을 이끌고 조선과 연합해 이를 공격하려 하자 지르가랑은 아이신기오로 아지거와 함께 진강으로부터 맞이해 황룡 등을 퇴각시켰다.

1636년 4월에 호쇼이 우전 친왕에 봉해졌고, 1638년 5월에 영원을 공격했으며, 군을 옮겨 모룡관과 오리보의 둔과 대를 함락했다. 1639년 5월에 금주와 송산을 공략해 승리하고 명군 2,000명을 사로잡았으며, 1640년 3월에는 의주성을 수리했고 9월에는 금주를 포위했다가 성 남쪽에 매복을 설치하고 명군이 진군하지 않자 추격해서 격파했다.

1641년에는 금주를 포위한 뒤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포위를 했고 1642년 조대수를 투항시켰으며, 송산, 탑산, 행산 등을 함락시켰다. 1643년에 세조 순치제가 즉위하자 친왕 도르곤과 함께 보정했지만 사실상 도르곤이 국사를 모두 맡았다. 9월에 영원을 공격했고 1647년에는 왕부의 저택이 정해진 제도를 만든다고 해서 보정을 멈추게 되었다.

1648년 3월에는 친왕 호오거가 황제 옹립을 모의하고 지르가랑을 불러 성취하고자 한 것을 고발하지 않았다면서 체포당해 군왕으로 강등되었다가 4월에 친왕의 작위를 회복했다. 9월에는 정원대장군이 되어 호광을 함락했고 10월에 산동에 머물던 유택청이 배반하자 주살했다.

1649년 1월 장사에 머물렀는데 명나라의 하등교, 마진충, 도양용이 이자성의 잔당인 일척호와 함께 호남에 근거하자 청군을 나누어 진격해 하등교를 붙잡았으며, 4월에 진주에 머무르다가 일척호가 도주하자 보경을 함락하고 남산파, 대수, 홍강 등 여러 지역의 명군을 격파했다. 7월에 정주를 함락하고 형주를 공격해 양용을 죽였으며, 도주, 여평, 오살토사 등 60여 개 성을 함락했다.

1651년 2월에는 손친왕 만다하이, 단중친왕 보로, 경근친왕 니칸과 함께 친왕 도르곤의 작위를 삭제해달라고 청했으며, 1652년에는 숙 호쇼이 우전 친왕이 되었고, 1655년에 57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