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육은(高麗六隱) | ||
목은 이색 | 포은 정몽주 | 도은 이숭인 |
야은 길재 | 농은 조원길 | 순은 신덕린 |
1. 개요
고려 말의 문신. 서예가. 자는 불고(不孤). 호는 순은(醇隱). 본관은 고령(高靈). 보한재 신숙주의 증조부.문과 급제자이며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친하게 지냈다. 신덕린은 아들 신포시와 손자 신장이 결국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인정하고 관직에 진출한 것과는 반대로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갔다가 낙향하여 죽는 날까지 관직에 진출하지 않았다. 신숙주의 증조부인데 증손자보다도 생육신과 비슷한 인생을 살았다.
2. 생애
신덕린(申德隣)은 1330년(충숙왕 17)에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감문위 대호군으로 치사(致仕)한 신사경(申思敬)이다.율정 윤택(尹澤)[1]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목은(牧隱) 이색, 포은(圃隱) 정몽주, 도은(陶隱) 이숭인, 야은(冶隱) 길재, 농은(農隱) 조원길 등과 더불어 고려말 육은(六隱)이라 칭하였다.
충목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충정왕 때 시학, 전교령을 역임하였다. 1351년(충정왕 3) 10월 충정왕이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江華)로 유배되자 신덕린은 왕을 따라 나섰는데 순군(巡軍)에 잡혔다. 이듬해 3월 충정왕이 강화에서 독살되자 사직하였다.
1366년(공민왕 15)에 좌사의대부로 임명되어 출사했는데, 이듬해 11월 신돈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파직되어 전라도 광주로 은퇴하였다. 1371년(공민왕17) 신돈이 처형되자 좌간의대부로 다시 출사하여 우왕(禑王) 때 보문각 제학, 봉익대부 예의판서를 역임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두문동에 들어갔다가 전라도 남원으로 내려가서 망국의 한을 시로 달래면서 여생을 보냈다. 해서(楷書), 초서(草書), 예서(隸書)에 모두 능하여 당대에 이름이 높았으며, 특히 예서의 일종인 팔분체(八分體)에 능하여 덕린체(德隣體)라고 불렸다. 서체의 모간(模刊)은 《고금법첩(古今法帖)》에 전하며 필적은 《해동명적(海東名蹟)》에 실려있다.
1402년(태종 2)에 세상을 떠났으며, 훗날 증손 신숙주의 귀(貴)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