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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552 ~ 5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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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국 | ||||||||||||||||||||
이리가한 | 을식기가한 | 묵한가한 | 타발가한 | |||||||||||||||||
동돌궐 (583 ~ 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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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략가한 | 막하가한 | 도람가한 | 보가가한 | |||||||||||||||||
의리진두계민가한 | 시필가한 | 처라가한 | 힐리가한 | |||||||||||||||||
서돌궐 (583 ~ 6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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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두가한 | 아파가한 | 이리가한 | 이궐처라가한 | |||||||||||||||||
사궤가한 | 통엽호가한 | 을비발라사엽호가한 | 해리필돌육가한 | |||||||||||||||||
사발라질리실가한 | 을굴리실을비가한 | 을비사발라엽호가한 | 을비돌륙가한 | |||||||||||||||||
을비사궤가한 | 사발라가한 | |||||||||||||||||||
당 황제의 가한 겸직 (630 ~ 7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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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 고종 | 중종 | 예종 | |||||||||||||||||
측천황후 | 중종 | 상제 | 예종 | |||||||||||||||||
현종 | 숙종 | 대종 | 덕종 | |||||||||||||||||
돌궐 제2제국 | 동돌궐 (682 ~ 7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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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질리시가한 | 묵철가한 | 부구가한 | 비가가한 | |||||||||||||||||
이연가한 | 등리가한 | 판궐특근 | 오소미시가한 | |||||||||||||||||
백미가한 |
始畢可汗
(? ~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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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돌궐의 제9대 가한. 이름은 아사나돌길(阿史那咄吉). 의리진두계민가한의 아들.수나라에 복종했던 아버지 계민가한과는 달리, 자신을 사사건건 견제했던 수양제의 행동에 분노하여 그와 대적했다. 특히 수양제가 직접 북방을 시찰하러 오자 그를 공격하여 포위하기까지 했다. 마침 이 시기에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그 권위가 땅바닥에 떨어지고 수나라에도 망조가 들었기 때문에 시필가한의 치세를 기점으로 동돌궐은 수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2. 생애
609년에 의리진두계민가한이 죽자 수나라에 표문을 올려 의안공주를 아내로 모시기를 요청해 의안공주와 결혼했으며, 시필가한이 강성해지자 배구가 그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동생인 아사나질길에 시집을 보내 가한으로 임명하려 하자 시필가한은 이를 듣고 원망했다.또한 시필가한은 총애하는 사촉호실이 배구가 거짓으로 무역을 하자고 유인했다가 마읍에서 죽이자 이로 인해 수 조정에 조현하지 않았으며, 615년 8월 5일에 수양제가 북쪽 요새를 순시하자 8일에 기병 수십만을 인솔해 수양제를 습격하려 했지만 의성공주가 수양제에게 이를 알리면서 실패했다.
12일에 수양제가 안문으로 도망가자 13일에 기병을 인솔해 안문을 포위했는데, 수양제가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집하거나 운정흥 등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 또한 의성공주가 북방의 변방이 위험하다고 알리자 동도, 여러 군의 구원군이 흔구에 도착한 후에 9월 15일에 포위를 풀고 떠났다.
617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고 당나라가 이밀과 싸우고 있을 때 유문정이 파견되어 군사를 요청하자 원군을 보냈으며, 618년에 사신을 보냈고 당나라에 큰 도움을 주었기가 돌궐에서 보낸 사신은 공로를 믿고 거만해져서 횡포했지만 당고조가 그들을 우대하고 용납했다.
619년에 무리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하주에 도착했고 양사도가 그를 만나 500명의 기병을 얻고 구주에서부터 태원으로 들어가 노략질하려고 했지만 시필가한은 양사도와 만나기도 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