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1] 신화 Le Mythe de Sisyph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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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 철학서 |
작가 | 알베르 카뮈 |
번역가 | ○○ |
출판사 | ○○ |
발매일 |
20○○. ○○. ○○. 20○○. ○○. ○○. |
쪽수 | ○○ |
ISBN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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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베르 카뮈가 1942년에 쓴 에세이. 그의 철학전반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대표작으로 여겨진다.특히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이 유명하다.
Il n'y a qu'un problème philosophique vraiment sérieux: c'est le suicide.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La lutte elle-même vers les sommets suffit à remplir un cœur d'homme;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
2. 내용
2.1. 서문
시지프 신화의 서문은 다음과 같은 노래와 함께 시작한다.오, 사랑하는 이여, 불멸의 삶을 갈망하지 마라, 다만 가능성의 들판을 끝까지 내달려라.
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3>
이 짧은 문구는 카뮈의 의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왜냐하면 위의 문구는 다름이 아니라
프리드리히 니체가 그의 작품에서 종종 사용했기 때문이다. 문구의 '불멸의 삶'이란 영원하고 유일한 진리를 추구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기독교의 유일신이라든가 자연은 수로 쓰여졌다고 주장했던 수학, 과학자들이나 유일한 정답을 찾아헤멘다는 점에서 니체가 보기엔 똑같다. 반면에 니체는 '가능성'과 '들판', 즉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감각적 경험 삶을 추구한다. 카뮈는 이러한 니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자신이 사는 20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적용하려고 한다.핀다로스 <아폴론 축제 경기의 축가3>
2.2. 부조리의 추론
카뮈는 자살에 관한 논의로부터 본문을 시작한다.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자살이다.
그가 굳이 자살로 글을 시작을 하는 이유는 다른 형이상학적인 철학 주제들이 매우 쓸데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어떤 철학적 질문(주제)이 인간을 자살에 이르게 하느냐를 기준으로 무엇이 참되고 중요한 문제인지 카뮈는 발굴하려고 한다. 그는 이것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유명한 일화에 빗대어서 다소 비아냥 거린다.
어떠한 물음이 다른 어떠한 물음보다 더 절박하다는 사실을 무엇으로 판단할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물음이 권고하는 행위들이 바로 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대답하겠다. 존재론적 논거를 관철시키기 위해 죽는 사람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갈릴레이는 중요한 과학적 진리를 알아냈지만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아주 쉽게 그 진리를 포기해버렸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잘한 일이었다. 그 진리가 화형을 감수해야 할 만큼의 가치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이러한 그의 비아냥 거림은 선배 철학자들도 벗어날 수 없다.
삶의 의미를 거부했던 사상가들 중에서 삶을 거부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논리를 밀어붙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가끔씩 농담 삼아서 쇼펜하우어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가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 앞에 앉아 자살을 찬미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반면에 카뮈가 생각하는 중요한 문제는 다음과 같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물음 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물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카뮈는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가 자살로 이어지고는 하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철학적 주제라고 말한다. 이 관점에서 자살이란 행위는 카뮈가 보기에 하나의 '수긍'이다. 삶이란 의미가 없다는 진리에 대한 수긍에서 나온 행위다.
'힘들게 살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
여기서 ' 부조리'가 논의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현대인이 삶을 무의미하게 느끼는 이유가 카뮈가 보기엔 부조리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부조리가 서양철학적으로 어떤 것인지에 관해서 카뮈는 설명한다.
말도 안 되는 이유들을 대서라도 해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친근한 세계이다. 그에 반해, 갑자기 빛과 환상이 사라진 우주 속에 있는 인간은
이방인이 되었다고 느낀다. 이런 추방이 절망적인 까닭은, 이젠 고향을 잃어버려 더 이상 고향을 추억할 수도, 약속된 땅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카뮈의 부조리는 말 그대로 조리가 없고 부당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완전한 인식"을 간절히 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완전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흄에게서도 확고히 나타나는 별 새로울 것은 없는 생각이다. 때문에 결국 인간이 가진 모든 인식들은 언젠가 세상이란 벽에 부딛혀서 깨져나갈 운명에 있다. 예를 들자면 뉴턴 역학이 빛의 움직임을 설명하지 못하고 폐기되는 것도 그런 것이다. 이렇게 인식이 깨져나갈 때 우리는 갑자기 세상을 설명하는 자신의 설명을 잃어버리는 것이 되고, 세상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세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너무나 혼란스럽고 괴로운 일이다. 그런데 완전한 인식의 불가능함은 이 괴로움에서 우리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절망적인 인식을 안겨준다.
그래서 우리는 한가지 강한 유혹을 받는다. 니체가 말한 "신"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카뮈가 기독교에 대해서 얼마만큼의 문제의식을 지녔느냐는 것이다. 본 문서의 이전 버전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큰 착오가 있었는데, 흔히 카뮈의 사상과 문제의식을 니체와 혼동한다든가, 사르트르와 혼동하는 것이 그것이다. 카뮈가 니체와 다른 점은 니체는 기독교의 세계관이 막 무너져나가던 시점에서 살았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말하는 바른 삶이 아니면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큰 문제로 여겼다. 소위 '유럽의 병'이라고 부르는 문제다. 반면에 카뮈와 사르트르가 활동하던 20세기 중반 무렵의 프랑스에서는 이미 기독교가 지배적인 도덕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한지 한참이 지난 시점이다. 때문에 카뮈의 작품이나 사르트르의 작품에서 기독교가 없어짐으로 인해생기는 문제의식은 그다지 찾아볼 수가 없다. 그보다 사르트르와 카뮈가 가졌던 문제의식은 모더니즘이 양차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종말을 고했다는 점이다. 이 점은 사르트르와 카뮈의 철학서를 모두보면 전반부에 '과학'에 대한 실망을 언급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확인 할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의 형벌을 인생에 대한 비유로 활용한 에세이다. 시지프는 신들을 기만한 죄로 죽어서 바위를 산꼭대기에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았는데, 산꼭대기가 뾰족해서 바위는 올려놓자마자 바로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지고, 시지프는 다시 반대편 골짜기부터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 올려야 한다. 시지프의 형벌이 괴로운 것은 이 형벌이 끝나지 않을 뿐더러, 그렇기에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카뮈는 이에 착안해 삶이 마치 시지프의 형벌 같다고 비유한다. 삶은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본적으로 의미없는 일 (밥을 먹고, 물을 마시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몸을 씻는 등)을 반복해야 하지만, 이는 (죽기 전까지는) 끝나지 않는 형벌과 같다는 것, 혹은 형벌과 같다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에세이에서 핵심적으로 묻고 있는 질문은 다음 두 개다. 1) 삶은 삶이라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가? 2) 만약 없다면, 자살하는 것이 옳은가? 이에 대한 카뮈의 답은 1번 질문에 “없다”고 대답하더라도 2번 질문에는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이다.
카뮈는 신의 대체재를 딱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물론 이 신이라는 것은 정말 기독교적인 신뿐 아니라, 삶이 그 자체로 의미 있다고 개인이 느끼는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신”에 해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가족이 행복함을 느끼는 데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면, 그 사람의 “신”은 가족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조리를 느끼지 못하고, 그냥 살아갈 수 있다. 다만 이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신”의 대체재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가족, 국가, 종교, 사랑 등이 모두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입버릇처럼 “왜 사는지 모르겠다~ 인생이 뭔 의미냐~”고 하는 게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고 행복하지 않고 삶이 너무 고통스럽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가족이 슬퍼할 것이고, 나는 가족의 슬픔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살아서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나의 유일한 삶의 의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신 대신에 가족이 삶의 근본적인 의미를 대신하고 있는 사람이며,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아니다. 이 사람이 부조리를 깨닫는다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의 안녕과 행복조차도 근본적으로 의미가 없으며, 내 삶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즉,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인생의 모든 부분이 결국 근본적으로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는다. 만약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그대로 살아가면 된다. 부조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카뮈의 에세이는 만약에 부조리를 느낀다면, 즉 1번 질문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에 대한 글이다.
카뮈는 부조리를 깨달은 사람은 자살하거나 회복 (극복)하거나 두 가지의 가능성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수렁에 빠진 이상, 이 문제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오래 지나지 않아 자살을 택하게 된다는 것. 카뮈가 제시한 해법은 간단히 말해 “삶에 대한 이유를 신이나 가족, 국가와 같은 외부적인 요인에서 찾지 말고 삶 그 자체로 받아들여라”다. 즉, 실존해서 얻는 것 (신앙, 사랑, 충성, 우정 등)을 살아갈 이유로 삼지 말고 실존 그 자체를 살아갈 이유로 삼으라는 것. 삶은 무의미한 작업의 반복이지만, 삶의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의미함을 사랑하고 유지하도록 노력하라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바위가 반대편 골짜기로 굴러떨어지는 상황에서 시지프는 다시 바위를 굴려 올릴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라야 하지 않겠냐고 하고, 이것이 유명한 마지막 문장 “il faut imaginer Sisyphe heureux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