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351년 일본 남북조시대에 일본의 남조와 북조가 일시적으로 통합된 사건2. 내용
아시카카 일족 안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교토에서 다다요시파를 배제했지만, 다다요시는 관동·호쿠리쿠·산인을 억제해, 서국에서는 나오토가 세력을 늘리고 있었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남조의 분단을 도모하기 위해, 사사키 미치타카등의 진언을 받고 이번에는 남조로부터의 다다요시·나오후토의 윤지를 요청하기 위해, 남조에 화의를 제안했다. 남조은 북조에 있는 삼종의 신기를 전달하고 정권을 반납하는 것 등을 조건으로 했다. 분명 북조에 불리한 조건이었지만 간노 2년(1351년) 10월 24일 다카우지는 조건을 받아들여 남조에 항복하여 윤지를 얻었다. 이 화목에 따라 남조 칙사들이 입경하였고, 11월 7일 북조의 스코 덴노과 황태자 나오히토친왕은 폐하고 관백 니조 요시노리 등도 경질되었다. 또한 연호도 북조 간노 2년이 폐되고 남조 쇼헤이 6년에 통일되었다. 이를 쇼헤이 일통이라 부른다. 12월 23일에는 남조이 신기를 회수했다. 실질적으로 이는 북조의 남조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이 되었다.다카우지는 의전에 구체적인 교섭을 맡겼지만, 남조은, 북조에 의해서 맡겨진 천태좌주 초사사의 요직을 경질해 남조의 사람을 두는 것, 겐무의 신정에 있어서 공가나 사사에 주기 위해 몰수된 지두직을 아시카가 정권이 구주에게 반환한 것의 취소등을 요구해 북조과 대립한다. 의전은 양보의 확인을 위해 다카우지와 연락해, 만일의 경우의 퇴로를 확보하는 등 분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