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오(星五) / 문산(文山) |
본관 | 밀양 손씨[1] |
출생 | 1885년 2월 10일 |
함경도
북청도호부 대양화면 호만포리[2] (현 함경남도 금호지구 호만포리) |
|
사망 | 1950년 7월 5일 |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손규옹은 1885년 2월 10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대양화면 호만포리(현 함경남도 금호지구 호만포리)에서 아버지 손정국(孫政國)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문항(朴文恒)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용연학교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1919년 3월경 서울에 들렀다 온 손규철(孫奎哲)로부터 <독립신문>을 전달받고 서울에서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으니 이곳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자고 제안했다. 손규용은 이에 따르기로 결심하고 3월 16일 오전 10시 용연학교 학생 35명을 강당에 집합시키고 그동안 간직해 온 태극기를 강당에 걸어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국기는 구한국 건국 이래로 사용해 온 국가의 표증인데, 10년 전부터는 이것을 떼고 일본 국기를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그러나 머지않아 조선은 독립하여 다시 이 국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에 감격한 학생들은 손규용의 선창에 따라 독립만세를 부르고 운동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19년 5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자 상고했지만 7월 26일에 기각되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간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1920년 4월 28일에 출옥했다.
출옥 후에도 교육계에 종사하다가 1950년 7월 5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손규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