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문 배경
잔혹하고 무자비한 전쟁의 어머니, 세주아니가 이끄는 겨울 발톱 부족은 프렐요드에서도 가장 두려운 부족 중 하나로 꼽힌다. 세주아니의 부족은 자연과의 필사적인 투쟁을 통해 생존하고 녹서스와 데마시아, 아바로사를 약탈하면서 혹독한 겨울을 난다. 세주아니는 아무리 위험한 전투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드류바스크 멧돼지 브리슬을 타고 공격을 진두지휘하며 얼음 정수 철퇴를 휘둘러 적을 얼리고 산산조각 낸다. |
2. 장문 배경
세주아니의 부모를 이어준 정략결혼의 끝은 그 시작만큼이나 차가웠다. 세주아니의 어머니, 칼키아는 겨울 발톱 부족의 전사이자 냉기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수년 전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를 쫓아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 젊은 전쟁의 어머니가 떠나자 부족은 혼란과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어머니 대신 세주아니를 돌본 사람은 세주아니의 할머니 헤지안이었다. 세주아니는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려고 부단히도 노력했지만, 결코 할머니의 높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해가 지나면서 겨울 발톱 부족이 처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헤지안은 세주아니를 신경 쓸 여력이 더욱 없어졌다. 풍요, 사랑, 안전. 세주아니는 이 모든 것을 자매 부족이었던 아바로사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이름난 여전사였던 아바로사 부족의 그레나는 여름이 되면 세주아니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레나가 자신의 어머니 칼키아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주아니는 그레나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다. 그리고 그레나의 딸 애쉬는 세주아니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레나가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세주아니의 상황을 문제 삼자, 모욕감을 느낀 헤지안은 아바로사 부족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고 겨울 발톱 부족은 칼키아가 떠나기 전의 영광과 영토를 되찾기 위해 주변 부족과 갈등을 벌였다.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전략은 부족을 파멸로 이끌었다. 그리고 칼키아는 이러한 부족의 상황을 전해 듣게 되었다. 자신이 이끌던 부족이 어려움에 부닥쳤다는 소식을 들은 칼키아는 겨울 발톱 부족으로 돌아와 또다시 전쟁의 어머니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주변 부족들과의 갈등을 해소하고 난 뒤, 겨울 발톱 부족에게 남은 것은 척박한 땅과 소량의 자원뿐이었고, 결국 그들은 음침한 서리방패 부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분개한 세주아니는 칼키아로부터 전쟁의 어머니 자리를 빼앗기로 했다. 세주아니는 녹서스군 전함을 급습하는 위험한 작전을 이끌겠노라고 엄숙하게 맹세했다. 이 맹세를 지켜서 부족민들의 마음을 얻은 후 그들의 지원을 받아 칼키아와 서리 사제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속셈이었다. 전함을 공격하는 와중에 세주아니는 도살장에 갇혀 있던 새끼 드류바스크를 구출했다. 짧고 뻣뻣한 털이 난 드류바스크의 모습을 보고 그녀는 브리슬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훗날 브리슬은 당시에 상상도 못 했을 정도로 몸집이 커졌으며 충직하게 세주아니의 옆을 지키게 되었다. 군함 공격 작전을 성공으로 이끈 세주아니는 부족장 자리를 놓고 어머니 칼키아에게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옛 관습에 따르면 어머니와 딸 사이의 결투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세주아니는 개의치 않았다. 이에 격분한 서리 사제들은 둘 사이에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칼키아는 세주아니와 결투를 하기도 전에 죽고 말았다. 겨울 발톱 부족을 이끌게 된 세주아니는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의 권력은 점차 강화되었고 충직한 추종자 무리도 생겨났다. 그리고 서리방패 부족에 저항하는 세주아니의 모습에 감복한 자들이 프렐요드 전역에서 그녀를 찾아왔다. 그중에는 떠돌이 주술사, 정령 주술사, 냉기의 화신과 폭풍의 화신, 심지어 고대 신을 섬기는 자들도 있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주변 부족들에게 착취와 치욕을 당했던 겨울 발톱 부족은 이제 북방을 호령하는 빠르고 잔혹한 전사들로 변했고, 전쟁의 어머니인 세주아니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했다. 이제 세주아니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프렐요드 남부의 부족들, 녹서스 침입자들, 심지어 데마시아의 국경 지대까지 가리지 않고 습격하며 약탈을 일삼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들을 모두 굴복시킨다. 세주아니의 궁극적인 목표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애쉬가 결성한 부족 동맹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세주아니의 눈에 애쉬는 어린 시절 우정을 저버린 것도 모자라 그레나가 남긴 유산마저 더럽힌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주아니는 오직 '자신'만이 프렐요드를 이끌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낼 것이다. |
3. 저주받은 이들을 위한 묵념
해당 문서 참조 바람.4. 죽음의 매듭
세주아니는 도끼를 휘둘러 나무를 베었다. 다섯 번째 도끼질에 나무가 쓰러졌다. 십수 그루째가 되자 그녀는 숨이 찼다. 추울수록 강해지는 냉기의 화신이었기에 남부의 더위 속에서 세주아니는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지쳐 있던 약탈조 전사들이 함성을 질렀다. 비록 백 명밖에 안 됐지만, 그들의 포효는 주변 산을 타고 쩌렁쩌렁 울렸다. 더는 몰래 움직일 필요가 없었다. 수천 규모의 남부 병력이 한나절 거리에 있었고, 주변 언덕에서는 적군 정찰병들이 그들을 감시했다. 세주아니의 본대는 최북단 지역에서 여름을 맞아 가축을 먹이고 낚시와 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소규모 약탈조들을 편성해 데마시아 국경 지대로 보냈다. 약탈조는 마을과 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요새를 파괴했다. 그렇게 방어선을 약화시킨 후, 겨울이 오면 본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진군할 계획이었다. 그때 상흔의 자매 키엘크가 다가왔다. 다른 약탈조 병사들처럼 그녀 역시 황소보다 몸집이 크고 멧돼지처럼 생긴 드류바스크를 타고 있었다. "전쟁의 어머니시여, 강 너머로 적들이 집결했습니다!" 키엘크가 드류바스크의 고삐를 당기며 말했다. "안내해라." 세주아니가 드류바스크에 오르며 대답했다. 브리슬이라는 이름의 그 드류바스크는 보통보다 몸집이 두 배나 커서 마치 매머드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비탈을 따라 내려갔다. 통나무로 뗏목을 만드는 전사들을 지나 세주아니는 키엘크와 함께 강기슭을 달렸다. 드류바스크의 등이 땀으로 젖었다. 폭포를 지나자 강 건너편에 데마시아군 척후병들이 보였다. 약 300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은 숲에서 빠져나와 바위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측면을 공격하기 위해 수백 명의 궁수와 창병으로 구성된 전방 부대였다. 드류바스크를 탄 두 명의 프렐요드 여전사를 보고도 그들은 계속해서 전진했다. "얼어죽을!" 세주아니가 강물에 침을 뱉으며 외쳤다. 겨울이었다면 습지나 호수, 그리고 앞에 흐르는 강은 꽁꽁 얼어붙어 재빠른 그녀의 전사들에게 공격로를 제공했을 터였다. 그때 뿔나팔 소리가 들렸다. 적의 본대가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세주아니가 고개를 돌리자 언덕 위로 희미하게 빛나는 적들의 갑옷이 보였다. 데마시아군의 전략은 명백했다. 만약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너면 척후대 궁수들이 병력의 수를 줄이고, 강기슭에서 창병들이 고지의 이점을 활용해 시간을 끌면, 본대가 도착해 잔여 병력을 처리하려는 속셈이었다. 격노한 세주아니가 브리슬을 앞으로 몰았다. 그리고 우거진 덤불과 여울을 지나 뗏목이 준비된 곳으로 돌아왔다. 전사들 대부분은 이미 적군을 발견하고 강을 따라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두려워했다. 전투 때문이 아니라, 남부인들이 준비한 함정 때문이었다. "강을 통한 퇴로는 기병들에게 막힐 것이다. 언덕을 타고 내려오는 적과 맞설 수도 없다. 당장 강을 건너야 한다." 세주아니는 명령을 내린 다음 가죽으로 감싼 작은 나무 막대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감겨 있던 거대한 철퇴, 혹한의 분노를 풀었다. 쇠사슬의 고리는 성인 남성의 손만큼이나 컸으며, 끝에는 얼음 정수 조각이 달려 있었다. 얼음 정수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주변에서는 냉기 마력으로 인해 안개가 피어났다. 세주아니는 무기의 마력이 일으키는 고통을 가죽으로 감싼 나무 막대를 힘껏 물면서 견뎠다. 얼음 정수 무기를 사용하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철퇴를 쥔 팔은 서리로 뒤덮였고 그녀는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눈에 고인 눈물은 뺨을 타고 흐르다가 다이아몬드처럼 얼어붙었다. 하지만 전사들의 눈에 비친 그녀의 표정은 확신과 노여움으로 가득했다. 세주아니는 철퇴를 휘둘러 강물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강물 위로 얼음 다리가 만들어졌지만, 물이 너무 따뜻했던 나머지 곧바로 무너져 내렸다. 전사들이 건너기에는 턱없이 약했다. 강 건너편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궁수들이 사거리를 확인하는 듯 대부분은 강물에 빠졌다. 남부 병사들의 야유가 들렸다. 세주아니는 혹한의 분노를 거두고, 나무 막대를 뱉은 다음 투구를 벗었다. 그리고 늑대의 창자로 만든 끈을 손목에서 풀었다. 그 동작에 전사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두려움을 떨쳐 낸 전사들은 구호를 외쳤다. 특별한 의식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세주아니는 겨울 발톱 부족에게 가장 신성한 맹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죽음의 매듭이었다. 세주아니는 땋았던 머리를 풀고 능숙하게 늑대 창자로 머리를 묶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몇 번이나 죽음의 맹세를 했는지 기억해 보려고 했다. 아마 십수 회 정도. 세상의 어떤 전사보다도 많은 횟수였다. 언젠가는 그녀도 죽음을 피하지 못할 터였다. 과연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 세주아니는 궁금했다. 또다시 화살이 세주아니 주변으로 날아들었다. 전사들이 반격해 보려고 했지만, 맞바람이 불고 있었다. "나는 겨울 발톱 부족 전쟁의 어머니이자 혹한의 분노, 삭풍의 철퇴 세주아니다!" 마지막 삼각형 매듭을 묶으며 그녀가 소리쳤다. "너희가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죽어서라도 이 강기슭을 사수하겠다. 이것이 내 맹세다! 늑대가 보인다. 내 운명은 정해졌다!" 전사들이 환호했다. 목소리가 쉬어 가는데도 멈추지 않고 길게 울부짖었다.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세주아니의 맹세에 전사들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별다른 명령 없이도 전사들은 무기를 쥐고 뗏목에 올랐다. 최대한 빠르게 강을 건너 세주아니와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다시 가죽으로 감싼 나무 막대를 물고, 뻣뻣한 털이 난 브리슬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아무런 맹세나 명령을 하지 않아도 세주아니의 마음을 잘 아는 브리슬은 소리를 내더니 강 쪽으로 몸을 틀었다. 세주아니는 한 번 더 혹한의 분노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고통과 더위로 땀을 흘리며, 철퇴를 강물 속으로 처박았다. 동시에 브리슬이 돌진하면서 얼음 다리가 만들어졌다. 다리가 기울어지면서 갈라지는 소리가 났지만 브리슬은 멈추지 않고 달렸다. 그때 화살이 날아왔다. 사거리를 확인할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많은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세주아니는 방패를 들었지만, 어깨와 허벅지에 화살을 맞았다. 브리슬의 몸에도 수십 개의 화살이 날아들었다. 그렇게 강을 반쯤 건넜을 때 다리가 무너졌고, 브리슬과 세주아니는 물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브리슬은 수면 위로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쳤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강기슭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붉게 물든 강물만 세주아니의 눈에 들어왔다. 브리슬은 괴성을 냈다. 마치 천둥이 치고 아기가 통곡하는 소리 같았다. 그러더니 고통에 겨운 듯 거품을 물었다. 세주아니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브리슬을 감쌌다. 그리고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방패로 브리슬의 얼굴을 가렸다. 세주아니는 생각했다. '오늘이 마지막이군.' 그 순간 브리슬이 수심이 얕은 곳을 찾았는지, 발로 바닥을 박차며 강기슭으로 뛰쳐나왔다. 세주아니는 안장 위에 서서 철퇴를 전방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얼음이 폭발하며 갑옷을 걸치지 않았던 궁수 수십 명이 나가떨어졌다. 브리슬의 엄니와 발길질에 또 두 명이 쓰러지자, 나머지 궁수들은 언덕 위로 올라가 창병들의 방패 뒤로 숨었다. 창병들이 세주아니의 다음 공격에 대비하며 돌격을 준비하는 동안 궁수들은 화살을 쟀다. 하지만 궁수들이 공격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을 안 그녀는 미소 지었다. 고개를 돌리자 강을 건너는 전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주아니가 일제 사격을 막은 덕분에 병력 손실은 전혀 없었다. 전투에서 살아남을지 확신은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맹세를 지켰다. 맹세의 이행. 세주아니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
5. 혹독한 겨울
비록 먼 거리였지만, 세주아니의 눈에 매머드는 곧 죽을 듯 보였다. 하지만 프렐요드의 모든 생명이 그렇듯, 녀석은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대엿 개의 창과 그보다 두 배나 많은 화살이 거대한 몸통에 박히고, 적갈색 털은 피가 얼어붙어 엉켜 있었지만, 매머드는 쓰러지지 않았다. 분노에 찬 매머드가 포효하자 산비탈이 흔들렸다. 세주아니는 번개 치는 봉우리를 바라보며, 혹여 눈사태가 일어나지 않을지 걱정했다. 아니, 어쩌면 눈사태보다 더한 것이 올지도 몰랐다... 자줏빛 전광이 산맥 너머에서 번쩍이며, 치솟은 봉우리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마치 톱니 모양의 이빨로 하늘을 베어 문 듯했다. 세주아니와 겨울 발톱 부족 사냥꾼들은 일주일 동안 매머드를 쫓았다. 창과 도끼를 들고 얕은 협곡 쪽으로 몰아넣었지만, 그럴 때마다 매머드는 포위망을 뚫고 소나무로 덮인 산 위로 도망쳤다. 열 명의 전사와 함께 출발했지만, 이제 일곱 명밖에 남지 않았다. 먹여야 할 입이 셋이나 준 셈이다. 세주아니는 애써 위안을 찾는 자신이 싫었다. 전부 뛰어난 사냥꾼이자 용맹한 전사들이었다. 하지만 예언자 빌얄므르가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겨울을 예견한 데다가, 부족의 식량도 빠르게 줄어들었다. 엘누크 무리는 아바로사 몰이꾼들이 이미 풀이 많은 남쪽 저지대로 끌고 간 뒤였고, 얼음 바다의 물고기들은 두꺼운 얼음에 막혀 낚을 수 없었다. 세주아니는 브리슬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멈췄다. 브리슬은 짜증을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매머드의 진한 피 냄새가 코를 가득 채웠다. 다른 사냥꾼들이 탄 드류바스크들은 매머드에게 접근하면서 경계하는 듯했지만, 브리슬은 당장에라도 싸우고 싶어 했다. 가만히 있어. 입을 가렸던 천을 풀자 맹렬한 추위에 뺨이 얼얼했다. 네가 나설 싸움이 아니야. 창과 활로 상대해야지. "냉기의 화신도 이 지독한 추위를 느낀다니 재미있군요." 망토를 쓰고 세주아니 옆에서 나란히 가던 남자가 말했다. 충혈된 두 눈만 내놓고 얼굴을 감싼 탓에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털가죽으로 만든 복면은 포효하는 곰처럼 생겼으며, 두껍게 겹쳐 놓은 매듭은 마치 주둥이 같았다. 남자를 경계하는지 브리슬이 낮게 으르렁거리자, 세주아니는 손으로 거칠고 뻣뻣한 털이 난 옆구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추위는 느껴, 우르카스. 단지 구시렁거리지 않을 뿐이지." 우르카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산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얼마나 더 올라가야 멈출까요?" 약 300m 전방에 눈 쌓인 언덕을 느릿느릿 올라가는 매머드가 보였다. 매끈한 눈밭 위에 붉은 발자국을 찍으며 도망가는 모습이 꽤나 지쳐 보였다. "얼마 못 가 멈출 거다. 정상까지 가기에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어. 숲을 벗어나기 전에 돌아서겠지." "어떻게 아십니까?" 우르카스가 물었다. "나도 몰라. 다만 더 높이 올라가면 우리가 안 따라올 줄 알고 있겠지."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조금만 더 가면 견디는 자의 영역인데요." 세주아니는 볼리베어와 어사인족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입에서 피 맛이 느껴지고, 핏줄이 따끔거리는 듯했다. 괴로울 정도로 날카롭고 사실적인 광경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비록 직접 겪거나 느끼지 않은 기억과 감각이었지만, 얼마 전 일처럼 선명했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발톱... 텅 빈 눈구멍에서 피어오르는 차갑고 푸른 불꽃... 무시당한 약속과 잿더미가 된 도시... 메말라 버린 나뭇가지 위에 매달려 있는 시체들... "전쟁의 어머니시여?" 세주아니는 대답하려 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영혼 속 고대의 원초적인 존재, 벌거벗은 채 피와 진흙을 뒤집어쓰고 야수들과 함께 달리던 존재에게 사로잡힌 듯했다. 우르카스는 털가죽으로 감싼 세주아니의 팔에 손을 올렸다. "전쟁의 어머니시여?" 이번에는 더 다급한 목소리였다. 원치 않는 손길에 세주아니는 목덜미의 털이 곤두서고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우르카스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순간 세주아니는 뾰족한 안장머리에 손을 강하게 눌렀다. 고통에 머리가 맑아진 세주아니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현실로 돌아왔다. "그 손을 치우는 게 좋을걸." 두 눈은 차갑게 빛났고, 목소리는 산바람보다도 서늘했다. 우르카스는 곧바로 손을 들었다.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잊혀진 자들의 허락 없이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순간 어떤 그림자가 낮게 떠 있는 태양을 가렸다. 그림자의 주인은 록파르의 전사들이 애용하는 뿔 달린 투구를 쓰고 있었다. 반도에 자리 잡은 록파르는 프렐요드에서도 가장 혹독한 환경과 추위를 자랑했다. 오직 몸속에 불처럼 뜨거운 피가 흐르는 자들만이 그곳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록파르의 전사들은 보통 호리호리하고, 팔다리가 길었으며, 극기심이 강했다. 하지만 광전사 올라프는 전형적인 록파르의 전사들과 달랐다. 수년 동안 함께 싸워 온 세주아니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살면서 봤던 프렐요드인 중에 가장 거대했고, 키는 드류바스크를 탄 세주아니나 우르카스와 비슷했다. 인간과 트롤이 잠자리해 낳은 자식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올라프 앞에서는 감히 아무도 그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올라프는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눈보라를 뚫고 앞으로 걸어갔다. 근육질의 몸은 가슴과 팔에 두른 털가죽과 판금 갑옷 때문에 더욱 거대해 보였다. 땋아 놓은 주황색 수염은 마치 고드름처럼 얼어붙었고, 푸른 두 눈은 산 정상에서 마주할 위협에 기쁜 듯이 반짝였다. "자살행위라고 했나?" 올라프가 두 사람을 지나치며 말했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숲이 끝나는 지점, 낭떠러지 앞에서 매머드가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다. 창을 던지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붉게 물든 눈밭을 보며 세주아니는 매머드가 가엾게 느껴졌다. 섬뜩한 존재들이 지배하는 폭풍의 영역과 이 세계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였다. 그런 감상적인 생각은 사치였다. 이 정도 크기라면 겨울 발톱 부족이 일주일은 먹을 수 있었다. 프렐요드에서는 생존이 곧 승리였다. 세주아니는 브리슬의 등에서 내렸다. 다른 사냥꾼들이 길고 두꺼운 창으로 무장하는 동안, 세주아니는 등에 멘 자신의 철퇴 '혹한의 서릿발'을 손에 쥐었다.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며 가죽으로 감싼 손잡이를 잡고 철퇴를 돌렸다. 두꺼운 쇠사슬 끝에 박힌 얼음 정수의 지독한 냉기가 느껴졌다. 푸른 눈은 창백하게 빛나고 입에서는 차가운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혹한의 서릿발은 강력한 무기였지만, 다루려면 대가를 치러야 했다. 피부 아래에서 수정처럼 단단하고 푸른 무언가가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팔뚝의 혈관을 타고 올라갔다. 우르카스는 대검을 뽑았다. 칼자루는 서리송곳니 늑대의 턱뼈로 만들었으며, 날은 돌도 벨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로웠다. 올라프 역시 서리로 반짝이는 도끼 두 자루를 양손에 쥐었다. "도끼가 굶주려 있다." 다가올 전투에 흥분한 올라프가 이를 갈았다. 입안을 깨물었는지 입술이 피로 번들거렸다. "함께 처치한다. 영웅놀이는 안 돼." 올라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을 보니 정신은 이미 피의 안개에 사로잡힌 듯했다. 세주아니는 매머드에게 다가가며 얼음 정수가 박힌 철퇴를 들어 보였다. "일어나라. 넌 프렐요드의 왕이다. 일어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해라." 그 말에 매머드는 사납게 노려보더니, 힘을 짜내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엄니가 돋은 머리를 흔들며 저항의 포효를 내뱉었다. 마치 온 세상에 닿는다는 대장장이 신의 뿔피리처럼, 그 울음소리는 산골짜기에 메아리쳤다. 울림이 어찌나 컸는지, 나무에서 눈이 떨어지며 산 정상에서 휘몰아치는 폭풍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매머드는 고개를 떨구고 거대한 앞발을 굴렀다. 다리가 얼마나 굵은지 오른카알의 바위산을 에워싼 강철나무와 비슷해 보였다. 이내 머리도 좌우로 흔들었다. 삐죽삐죽하게 솟은 엄니는 검처럼 날카로웠다.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도 찔리면 즉사할 터였다. "고통 없이 죽여 주지. 약속하마." 세주아니가 말했다. "영광스러운 죽음..." 올라프가 피로 물든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지만, 세주아니는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무기를 쥔 겨울 발톱 전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창을 든 전사들은 매머드의 옆구리 쪽에 자리 잡았고, 세주아니와 올라프, 우르카스는 정면에 섰다. 이내 분노의 포효와 함께 상처 입은 야수가 돌진했다. 매머드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눈이 흩날리고, 시커먼 바윗덩어리들과 피로 물든 얼음이 사방으로 튀었다. 세주아니와 우르카스는 옆으로 몸을 던졌지만, 올라프는 매머드에 필적하는 함성을 지르며 뛰어올랐다. 도끼로 머리 정중앙을 강타했으나, 작은 상처만 냈을 뿐 두꺼운 두개골은 뚫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매머드는 가소롭다는 듯이 코를 휘둘러 뒤로 넘겨 버렸다. 바위 위로 떨어진 올라프는 하마터면 절벽 아래로 추락할 뻔했지만, 이내 미친 듯이 웃으며 곧장 몸을 일으켰다. 그때 세주아니가 혹한의 서릿발을 양손으로 쥐고 크게 휘둘렀다. 철퇴 끝에 달린 얼음 정수가 매머드의 무릎 뒤를 강타했다. 세주아니의 공격에 다리가 꺾인 매머드는 주저앉았다. 미끄러지며 바닥에 쓰러진 매머드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뒷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겨울 발톱 전사들은 거리를 좁히더니 능숙한 솜씨로 창을 내질렀다. 그리고 창자루를 비틀며 멀찍이 물러섰다. 괴성과 함께 매머드가 벌떡 일어섰다. 바닥이 붉게 물들었다. 성공적인 사냥은 영광스럽거나 명예로운 전투와 거리가 멀었다. 사냥감이 반격하지 못하도록 공격해 힘을 빼 놓는 과정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다음 숨통을 끊는다. 전사 한 명이 눈에 미끄러져 넘어지자, 매머드가 거대한 앞다리로 짓밟았다.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전사의 비명이 순식간에 멎었다. 그 광경에 다른 전사들이 물러서며 다시 공격할 빈틈을 찾았다. 매머드는 무시무시한 엄니를 좌우로 흔들며 낭떠러지 쪽으로 물러섰다. 세주아니는 철퇴를 돌리며 왼쪽으로, 우르카스는 대검을 어깨 위로 치켜든 채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때 올라프의 함성이 들렸다. 세주아니는 하마터면 사냥감에게서 눈을 떼고 고개를 돌릴 뻔했다. 석양에 은빛으로 반짝이는 도끼를 휘두르며 올라프가 돌진했다. 매머드는 머리를 숙여 엄니로 받아칠 준비를 했다. 피의 안개에 사로잡힌 올라프는 살육 전차나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죽음의 화신이었다. 매머드가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올라프가 위로 뛰어오르며 한 손으로 엄니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 탄력을 이용해 매머드의 등에 올라탔다. 그런 다음 벌목꾼처럼, 도끼를 마구잡이로 내리찍었다. 매머드가 몸을 일으켜 세차게 흔들었지만, 더 사나운 괴수들 위에 올라탄 적 있는 올라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손으로 털을 움켜쥔 채, 도끼로 매머드의 등을 쉴 새 없이 강타했다. 빈틈을 노리던 우르카스는 야수의 목을 향해 대검을 치켜들고 돌진했다. 이따금 야둘스크 해안에 떠밀려 오는 바다 괴물의 촉수처럼, 매머드는 코를 휘둘러 우르카스의 허리를 감싸더니 그대로 들었다가 바위 위에 내리꽂았다. 세주아니는 고통에 찬 비명을 들었다. 매머드는 우르카스를 두 번이나 더 바위에 내리친 다음 옆으로 던져 버렸다. 우르카스의 몸이 눈밭 위로 나뒹굴었다. 세주아니는 포효하며 돌진했고, 올라프는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매머드의 등을 도끼질했다.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힌 상태였지만, 매머드는 돌진하는 세주아니를 포착했다. 그리고 우렁찬 소리를 내지르며 엄니를 휘둘렀다. 가공할 속도에 자칫하면 몸이 꿰뚫릴 수도 있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세주아니는 몸을 숙여 매머드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졌다. 한 손으로는 혹한의 서릿발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사슬로 연결된 얼음 정수를 손에 쥐었다. 손이 닿는 순간 비명이 터져 나왔다. 마치 불구덩이에 손을 담근 듯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얼음 정수를 매머드의 가슴에 찔러 넣자 푸른 불꽃이 솟구쳤고, 세주아니는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미끄러져 나온 세주아니는 몸을 일으켰다. 얼음 정수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손가락은 동상에 걸려 이미 새카맣게 변한 뒤였다.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매머드는 휘청거렸다. 혈관을 타고 흐르던 피는 얼음으로 변했고, 눈은 눈보라가 치는 하늘처럼 흐릿해졌다. 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것처럼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올라프, 떨어져!" 세주아니가 소리쳤다. "올라프!" 세주아니의 외침은 단호했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피의 안개에 사로잡힌 올라프마저도 정신을 차리고 매머드의 등에서 뛰어내렸다. 세주아니 옆에 착지한 올라프는 눈을 부릅뜬 채 숨을 헐떡였다. 도끼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세주아니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고통이 너무 심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행이었다. 손이 완전히 망가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손가락이 끊어질 듯이 아팠지만, 세주아니는 손을 털가죽 옷 아래에 넣어 최대한 숨겼다. 매머드는 뒷다리를 질질 끌며 비틀거렸다. 피는 계속해서 얼어붙었다. 세주아니는 창을 쥐고 접근하려는 전사들을 멈춰 세웠다. 사냥은 끝났다. 낭떠러지에 몰린 야수는 이제 도망칠 곳이 없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매머드는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세주아니 역시 죽을 힘을 다해 싸운 상대를 예우하는 의미로 철퇴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매머드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세주아니를 내려보았다. 그리고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세주아니는 낭떠러지 끝에 주저앉아 눈밭 위로 추락하는 매머드를 바라봤다. "얼어죽을!"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동상에 걸린 손으로 바닥을 때렸다. 위태롭게 서서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던 올라프가 말했다. "내려가서 고기만 썰어 가면 돼. 덕분에 녀석을 산 아래로 끌고 가는 수고를 덜었군." 올라프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멀리서 뭔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프렐요드인이라면 젖먹이 때부터 경계하도록 가르치는 바로 그 소리였다. 얼음이 갈라지고 있었다. 추락한 매머드 주위로 검은 줄기가 뻗어 나갔다. 절벽 아래는 툰드라가 아니라 깊은 호수가 얼어붙으면서 생긴 빙판이었다. 세주아니가 아연실색한 채 바라보는 가운데, 얼음이 산산조각으로 갈라지며 매머드의 사체가 닿을 수 없는 깊고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얼어죽을!" 세주아니의 예상과 달리 우르카스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비록 처참한 몰골이었지만, 여전히 의식은 있었다. 놀랍게도 아직 힘이 남았는지, 우르카스는 숨을 헐떡이며 매머드가 자신을 내리꽂은 바로 그 바위에 몸을 기댔다. 세주아니와 올라프는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늑대가 저를 부르는군요..."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억지 미소를 지었지만, 얼굴에서 고통이 느껴졌다. "양은 널 데리러 올 생각도 없을 거다, 우르카스." 세주아니가 손을 잡으며 말했다. "우리는 겨울 발톱 부족이다. 순순히 저승으로 따라가는 법이 없지." 우르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 검은 어디 있죠?" 그 말에 올라프가 우르카스의 손에 검자루를 쥐여 주었다. "자네의 영웅담은 오랫동안 기억될 거야." 올라프의 목소리는 어쩐지 구슬펐다. "자네가 부럽군." 우르카스는 고통스럽게 기침을 했다. "그럼 저와 운명을 바꾸시죠... 기꺼이... 드릴게요." "말만 그러고 안 바꿔줄 것 같군." 올라프가 슬픈 듯 말했다. 우르카스는 고개를 돌렸다. 눈에서 생명력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신들께서... 마지막으로 멋진 광경을 선사해 주시는군요..." 우르카스의 시선을 따라가자, 번개가 멎은 밤하늘을 진홍색과 황색의 극광이 수놓고 있었다. 황홀하면서도 기이한 풍경이었다. 세주아니는 피로 얼룩진 복면을 집어 숨을 거둔 우르카스의 얼굴에 덮어 주었다. "늑대가 곧 오겠군. 나 대신 혼쭐을 내 줘." 우르카스는 필멸자와 잊혀진 자들의 경계 사이에서 잠들었다. 육체는 프렐요드로 돌아가고, 영혼은 동토의 부름을 받을 때까지 얼어붙은 바람을 타고 설원을 떠돌 것이다. 일행은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산 아래로 내려왔다. 더는 사냥을 계속할 의미가 없었다. 식량도 부족할뿐만 아니라, 서쪽의 부족 야영지까지 가려면 꼬박 이틀은 걸어야 했다. 브리슬에 탄 세주아니의 몸이 흔들렸다. 극심한 피로와 굶주림, 동상에 걸린 손의 통증 때문이었다. 올라프는 입을 꾹 다문 채, 음울한 표정으로 옆에서 걸었다. 어둠이 내릴 무렵, 산기슭까지 내려간 일행은 선돌 아래에서 야영 준비를 했다. 원래 산 위에 있던 환상 열석의 일부였지만, 오래전 지진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매끈한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기호가 새겨져 있고, 끝에는 서로 뒤엉킨 채 얼어붙은 유골 두 구와 검이 보였다. 연인 사이였을지, 철천지원수였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동이 트자 눈이 내리고 차가운 산바람이 불어 내려왔다. 마치 산이 불청객을 쫓아내려는 듯했다. 야영지로 돌아가던 일행은 폐허로 변해 버린 마을을 지나쳤다. 도로는 산길로 변했고, 건물들은 무덤이 되었다. 주민들은 죽거나 그곳을 떠난 지 오래였다. 그리고 둘째 날 해가 질 무렵, 겨울 발톱 부족 야영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몇 남지 않은 횃불이 야영지 경계를 밝히고 있었다. 세주아니는 마음이 무거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추종자의 수가 수천에 달했지만, 기아와 혹독한 추위 때문에 대부분 흩어지고 말았다. "좀 어떤가?" 불빛을 향해 걸어가던 중, 산에서 내려온 뒤로 줄곧 말이 없던 올라프가 물었다. "드디어 입을 여는군." 침울한 모습이 거슬렸던 세주아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느껴졌다. "난 신경 쓰지 말라고. 피의 안개에 사로잡힐 때면, 늘 희망에 부풀지. '드디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겠구나'하고 말이야. 그러다 목숨을 부지하면, 무병장수하다가 평온하게 죽는 운명에 더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에 슬퍼지거든." 세주아니는 어깨를 으쓱했다. "걱정하지 마, 올라프. 사방에 적들이 깔려 있으니까. 피와 전투의 날, 죽음과 분노의 밤은 앞으로 수도 없이 많을 거야." 올라프는 활짝 웃었다. 침울했던 표정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인가?" "정말이야. 그나저나 어떠냐고 물었지? 사냥에 나섰던 부족장이 빈손으로 돌아왔으니, 빌얄므르가 불길한 징조라며 날뛸 게 뻔해." "예언자들이란 몹쓸 것들이야. 알 수 없는 말로 불길한 소리만 지껄이니까. 차라리 남부 놈들을 믿고 말지." 남부라는 말에 세주아니가 물었다. "남부에 왜 갔는지는 말할 생각이 없나?" "그래. 어떤 이야기는 묻어 두는 편이 낫거든." 세주아니는 뻣뻣한 솔로 브리슬의 털을 빗었다. 천막에서 회의를 마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기 위해서였다. 예상했던 대로 예언자 빌얄므르는 사냥의 실패를 두고 큰 우려를 표했다. 까마귀 깃털로 만든 망토를 걸치고 화덕 주위를 돌며, 곧 역사상 가장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리라고 다른 지도자들에게 말했다. 다만 올라프는 그런 말은 꼬맹이도 할 수 있다며 비웃을 뿐이었다. 다른 사냥조 역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스발예크는 미처 남부로 떠나지 못한 아바로사 몰이꾼에게서 엘누크 여섯 마리를 노획했고, 헤프나르는 육지에 갇힌 뿔바다표범 몇 마리를 사냥했을 뿐이었다. 턱없이 부족했지만, 며칠은 배를 채울 수 있을 양이었다. 겁에 질린 부족민들은 흥분했다. 봄이 찾아올 때까지 어떻게 살아남을지 대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세주아니가 대답하지 못하자 성난 군중의 외침은 밤이 깊어지도록 이어졌다. 어떤 이들은 터무니없는 계획을 내놓기까지 했다. 남쪽의 오른카알 바위산까지 가서 아바로사 부족과 화친을 맺자는 말까지 나왔지만, 군나크의 호통에 이내 잠잠해졌다. 세주아니의 지휘관 중 가장 호전적이었던 군나크는 문신으로 가득한 가슴팍을 도끼로 두드리며, 아바로사 부족의 영토에 쳐들어가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고 소리쳤다. 세주아니는 솔깃했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남부 저지대를 공격하자는 제안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다시 사냥에 나서자는 이들도 있었다. 남은 식량이나 시간을 고려했을 때, 한 번 정도는 더 시도해 볼 만했다. 몇몇 부족민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사냥조 대장 바루키가 반대했다. 사냥조가 남은 식량을 가져가 버리면, 미처 돌아오기도 전에 야영지에 남은 모두가 굶어 죽을 것이라고 했다. 비록 소수였지만, 각자 흩어져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먹여야 할 입이 줄어들면 그만큼 생존하기 쉬운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세주아니는 그런 의견을 묵살했다. 지금 상태로도 봄에 부족을 규합하기 어려울 텐데, 하물며 더 분열된다면 많은 집단이 겨울 발톱 부족을 떠나 남쪽에서 새 삶을 꾸릴 것이 분명했다. 프렐요드에서 공동체는 곧 생명이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비록 겨울 발톱은 가혹하기로 악명 높지만, 하나의 부족으로 힘을 합쳐야만 생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남부로 가면 노예가 되어 밭을 일구거나 집을 짓고 가축을 돌봐야 했다. 겨울 발톱 부족은 절대로 남의 노예로 살 수 없었다. 손에 흙을 묻히며 비굴하게 살 바에, 무기를 손에 쥔 채 싸우다 죽는 편이 낫다고 세주아니는 생각했다. 결국 빌얄므르까지 세주아니의 권위에 도전하며 대책을 요구했다. 대체 어떻게 부족을 살릴 생각입니까? 평소라면 그 불경한 태도에 곧바로 몸이 반응했을 테지만, 빌얄므르의 의문은 정당했고 천막 내 모든 부족민이 그 해답을 궁금해했다. 부족장이라면 용감하게 부족의 사활이 걸린 결정을 내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 세주아니는 천막에 모인 지도자들에게 동이 트기 전까지 답을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브리슬의 털을 빗으며, 세주아니는 마침내 분노가 가라앉았다. 이 방법은 언제나 효과적이었다. 복잡할 게 없던 옛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부터 세주아니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추방당했던 애쉬를 겨울 발톱 부족으로 데리고 왔던 때를 생각했다.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애쉬는 세주아니를 알아보지 못하고 어사인족으로 착각했다. 세주아니의 빗질이 점점 거세졌다. 에브라탈 부족을 약탈하던 중, 애쉬가 자신을 배신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 다짐했다. 겨울 발톱 부족이 아바로사 부족과 화친을 맺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고. 브리슬이 성가셨는지 으르렁거리며 발을 굴렀다. "조심해, 아가씨. 녀석이 날뛰면 어쩌려고?"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세주아니는 허리에 찬 단검을 쥐며 몸을 돌렸다. 우리 안에서 작은 형체가 보였다. 그 형체는 마치 넝마처럼 힘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세주아니는 놀라며 단검을 쥔 손을 풀었다. 짚으로 대충 만든 침대 위에, 오래전 얼어 죽은 줄 알았던 한 노인이 누워 있었다. 무릎 아래는 절단되어 없었고, 앞을 볼 수 없는 두 눈은 갈매기 알처럼 희뿌연 색이었다. 노인의 이름은 크리크였다. 세주아니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올가바나 부족 농부들과 기술자들의 예언자였다. 결국 세주아니는 우르카스의 부대를 보내 부족을 말살하고 자원을 빼앗아 올 것을 명했다. 생존자들은 붉은 바위가 강처럼 흐르는 산으로 도망쳤다. 임무를 완수한 우르카스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크리크와 함께 돌아왔다. 식량만 축낼 텐데 왜 데리고 왔느냐고 묻자, 우르카스는 어사인족이 올가바나 부족을 산에서 몰아냈다고 주장했다. 몸에 칼이 꽂힌 거인들이 피로 물든 털가죽과 뿔, 두개골을 걸치고, 주먹으로 불을 내뿜었다고 말했다. 우르카스는 눈먼 노인을 마을 밖에 버리려고 할 때, 산의 목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세주아니는 프렐요드가 노인을 거두어 갈 수 있게 음식을 주지 말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예언자는 아직 죽지 않았다. 수개월이 지나고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여전히 겨울 발톱 부족과 함께 있었다. "산에서 잊혀진 자들의 영역을 보았다지? 끔찍했겠군, 아가씨. 너희를 피해 불꽃 대장간으로 갔을 때, 나도 본 적 있거든." 세주아니는 짜증을 겨우 억눌렀다. "보긴 뭘 봤다고. 장님 주제에." 크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봤고말고. 그 어떤 명사수보다도 똑똑히 봤지. 구름이 흰색과 황금색으로 빛나고, 피의 번개가 치고,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렸어. 확실히 봤다고." 세주아니는 뿌옇게 변해 버린 노인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은 오래전에 고장 난 것 같은데." "그렇지. 열 번째 겨울에 내 세상은 온통 하얗게 변했어. 하지만 어떤 것들은 눈 없이 더 제대로 볼 수 있거든, 아가씨!" 세주아니는 크리크의 목에 단검을 갖다 댔다. "한 번만 더 아가씨라고 하면 목이 달아날 줄 알아." "이런, 아가씨가 아니지. 무려 전쟁의 어머니잖나? 다음에 다른 예언자가 또 참견하거든, 꼭 잊지 말고 알려 주라고!" 크리크가 더럽고 쪼그라든 손을 휘저으며 웃었다. "그런데 있잖아. 전사들이 팔다리가 잘린 뒤에도 그 부위에 추위를 느낀다는 이야기, 들어 봤지? 내 눈도 마찬가지야. 눈이 멀쩡할 때보다 더 많은 것들, 더 끔찍한 것들을 볼 수 있거든. 자네가 봤다면 차라리 눈이 멀기를 바랐을 그런 것들 말이야." "나도 그동안 못 볼 꼴을 많이 봤는데." "그래. 그 정령 주술사와 함께 잊혀진 자들에게 공물을 바쳤을 때부터였을 거야... 서약을 하고, 죽음의 매듭 모양으로 장작을 태우고, 무기와 뼈를 갖다 바쳤지. 그래서 뭐가 보이던가? 피와 전투의 날, 죽음과 분노의 밤?" 강가 도시에서 벌어진 살육을 생각하니, 세주아니는 날고기와 골수가 먹고 싶다는 갈망에 사로잡혔다.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 정신을 다잡은 세주아니가 대답했다. "어떻게 아직 살아 있지? 굶어 죽도록 놔두라고 했는데." "오른이 날 살렸어. 불꽃 대장간에서 너희가 우리를 죽이러 오기 직전에 말이야. 날 아기처럼 들어 올리더니 가마솥에서 수프를 떠서 먹여 주었지. 그랬고말고!" 세주아니는 한숨을 쉬었다. 크리크는 미친 게 분명했지만, 겨울 발톱 부족의 누군가가 부족한 식량을 이 노인에게 먹였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노인이 놀라운 힘으로 손목을 붙잡았다. "맹세하건대, 자네 부하가 날 데려온 이후로 음식은 입에도 안 댔다네." 크리크가 생기 없이 뿌옇게 변해 버린 두 눈으로 노려봤다. 마치 무한한 지혜를 지닌 고대의 존재가 그 두 눈 뒤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음식은 물론 물도 안 마셨지! 오른의 위대한 가마솥이 지닌 힘 때문이라고! 누구든 그 수프 한 모금이면 해가 바뀔 때까지 배가 부르다니까!" "오른의 가마솥?" 세주아니는 비웃었다. "그건 전설이자 꿈과 같은 이야기지. 꼬마들이나 믿을까." "그 이야기가 어디서 나왔겠나? 전부 사실에서 비롯됐지!" 크리크가 몸을 덮고 있던 털가죽을 들추어 보이더니 덧붙였다. "이래도 꿈으로 치부할 텐가?" 크리크의 몸을 보고 세주아니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몸에는 혈색이 돌았으며 뱃집은 두둑했다. 반면 세주아니의 피부는 창백했으며, 고기를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했다. "대체 어떻게..." "말했잖나. 오른의 위대한 가마솥 덕분이라고. 잊혀진 자들이 불꽃 대장간에서 훔쳐 가긴 했지만. 오른은 너무 물러 터져서 굶주린 인간들이 마음껏 배를 채우게 놔둔다고, 그래서 우리가 나약해졌다고 말이야! 결국 추종자들을 죽이고, 자기네들 산 위에 모셔 두었지. 하늘이 붉게 빛나는 것도 가마솥의 힘 때문이야. 하지만 영원히 숨겨 두기에 가마솥에 깃든 오른의 힘은 너무도 강력해. 잊혀진 자들도 손을 쓸 수 없었던 거야! 그 정령 주술사에게 물어보라고. 아직 정신이 온전하다면, 내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잘 알겠지!" 세주아니는 고개를 저었다. "우디르는 떠났어.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지. 정령들에게서 벗어나 내면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하다더군. 의지를 단련하고 싶다나?" "그럼 직접 찾아야지, 전쟁의 어머니여. 어쩔 텐가? 옛날 방식으로 처리하려고? 여기서 얼어 죽든가, 남쪽 땅에서 피 흘리며 죽든가. 아니면 잊혀진 자들이 훔친 물건을 되찾을 텐가? 한 번 상대해 봤으니, 또 못 할 것도 없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미친 노인의 말만 믿고 어사인의 영역으로 쳐들어가자고 하면 과연 누가 세주아니를 따를 것인가? 프렐요드는 불가사의한 땅이었다. 얼음 위에는 전설이 깃들어 있고, 공기 중에는 마력이 흐르는 곳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애쉬가 아바로사의 활을 손에 넣었다고 한다. 심지어 냉기의 화신으로서 세주아니가 지닌 힘도 이 땅에 마법이 존재한다는 증거였다. 그렇지만... "왜 날 도와주려는 거지? 우리는 당신 부족을 말살했는데." "아직도 모르겠나?" 크리크가 깊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전 이야기지만, 우리는 본래 하나의 부족이었지. 자네는 시야가 너무 좁아. 눈앞의 적만 생각하는 전사에 불과하지. 이제 전쟁의 어머니, 여왕답게 생각하라고! 지도자는 언제 싸우고, 언제 부족을 이끌어야 하는지 알아야 해. 물론 그러다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프렐요드의 아들딸들이 전부 힘을 합쳐야 할 때야. 아니면 하나둘씩 쓰러지고 말겠지. 일단 명줄을 잇는 게 급선무야. 명심하게, 칼키아의 딸이여." 그 말에 세주아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았다." 세주아니는 크리크와 브리슬이 있는 우리에서 멀어졌다. 그리고 산맥 너머로 스며드는 여명을 보며 새로운 날의 시작을 받아들였다. 꺼져 가는 화롯불이 천막 안을 비추었다. 안에서는 부족민들이 세주아니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올라프는 천막 입구 옆에 쪼그리고 앉아 숫돌로 거대한 도끼를 갈고 있었다. 세주아니가 다가가자 고개를 들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쐐기풀이라도 씹은 표정이군." "결정을 내렸어. 하지만 다들 싫어할 거야." 올라프는 어깨를 으쓱했다. "싫어해도 상관없지. 너는 전쟁의 어머니다. 저들은 네 명령에 따를 뿐이야." "당신이 날 도와줘." 거구의 올라프는 몸을 일으키며 도끼를 어깨에 멨다. "아니, 도끼는 들고." 올라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뭔지 먼저 말해 주지 않겠나?" "피와 전투의 날, 죽음과 분노의 밤을 선사해 주겠다고 약속했잖아. 기억해?" "그럼, 기억하고말고!" 올라프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산을 다시 올라야 해. 어사인의 영역에 가서 볼리베어로부터 오른의 위대한 가마솥을 훔쳐야 하거든." "놈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어. 기대되는군!" |
6. 구 설정
6.1. 구 단문 배경
세주아니는 프렐요드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부족 중 하나로 꼽히는 얼음발톱 부족의 잔혹하고 무자비한 냉기의 화신이자 전쟁의 어머니이다. 세주아니의 부족은 생존을 위해 자연과 끊임 없이 절박한 싸움을 했고, 혹독한 겨울에서 살아남기 위해 녹서스, 데마시아, 아바로사를 침공해야 했다. 세주아니는 가장 위험한 공격의 선봉에서 앞장서서 멧돼지 브리슬의 안장에 타고 얼음 정수의 철퇴를 휘둘러 적을 얼리고 깨뜨린다. |
6.2. 구 장문 배경 1
세주아니가 태어났을 때, 부족의 점성술사들은 입을 모아 분단된 프렐요드 영토를 하나로 통일할 지도자가 되리라고 예언했다. 세주아니의 부족은 혹독한 프렐요드의 동토에서 계속 변방으로만 밀려나며 수백 년 동안 굶주림 속에 고통 받았고, 이런 고난은 타고난 운명을 따라 이 땅을 제패하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갈망에 불을 지폈다. 세주아니는 음식도 따뜻한 털옷도 사양한 채 눈보라 속으로 나아가, 살갗을 에는 매서운 바람을 그대로 견디며 극한의 수련에 정진했다. 부족에서 제일 강한 전사들과 한 명씩 차례로 대련을 펼치며, 다리가 풀릴 때까지 훈련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다른 이였다면 죽고도 남았을 부상을 입어도 오로지 의지력 하나로 다시 일어서고야 마는 그녀를 부족에서는 '눈보라의 심장'이라 불렀다. 스무 살 생일을 맞던 날, 세주아니는 동족을 이끌고 이 고립 무원을 벗어나 적들의 영토를 정복할 것을 선언했다. 수련을 끝마치고 이제 적대 부족의 지도자들과 맞설 준비가 된 것이다. 세주아니의 무예는 이미 전설의 반열에 올라 있었고, 휘하의 병사들 역시 새로운 힘과 결의로 한껏 사기가 올라 있었다. 그러나 대정벌에 나서기도 전에 애쉬가 프렐요드 땅에 평화를 선언하며 리그 오브 레전드에 들어가 전쟁을 종식시키고 말았다. 세주아니의 눈에는 전통을 무시하고 비겁하게도 프렐요드의 귀한 자원을 독차지하려는 계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대대로 겪어 온 고난을 드디어 벗어나리라 믿으며 벅차게 꿈꾸던 새로운 미래를 한 순간에 놓쳐버린 동족의 좌절을 목격하며, 세주아니는 자기야말로 프렐요드의 진정한 통치자임을 증명해 보이리라 다짐했다. 그러자면 리그 오브 레전드의 무대 위에서 재론의 여지 없이 애쉬를 완전히 꺾는 모습을 전 세계에 보여줘야만 할 것이다. "프렐요드는 선택 받은 소수만을 먹여 살릴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 '평화'란 죽음을 의미할 뿐이다." - 세주아니 |
6.3. 구 장문 배경 2
"나는 얼음에서 태어나
폭풍우 속에 빚어져 혹한으로 단련됐다." 대부분의 사람은 프렐요드의 척박한 환경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세주아니는 달랐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지금처럼 강인하고 용맹한 전사의 모습이었던 것은 아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 이 불모의 땅에선 오직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세주아니는 어려서부터 부족의 수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며 자랐다. 자신의 형제 중 유일하게 10살이 넘도록 살아남기는 했지만, 머지않아 주변 사람이 그래 왔듯 비참한 죽음을 맞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세주아니는 절망적인 마음이 되어 점성술사를 찾아갔고, 놀랍게도 그녀에게 주어진 운명은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분단된 프렐요드 영토를 하나로 통일할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신탁을 받게 된다. 그녀는 이 운명을 굳게 믿었고,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 혹독한 추위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 가차 없이 냉정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세주아니는 다른 사람이라면 죽고도 남았을 고통을 견디며 극한의 수련에 돌입했다. 음식도 털옷도 마다한 채 눈보라와 정면으로 맞서 살갗을 에는 매서운 바람을 그대로 견뎌냈고, 이 혹독한 환경에서 야만적인 전투 기술을 몸에 익히며 고통이 힘으로, 배고픔이 용기로, 추위가 약자를 걸러내는 아군으로 바뀔 때까지 수련을 거듭했다. 세주아니 휘하의 병사들 역시 패기 있게 견뎌내거나 아니면 깨끗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도록 단련되어 갔다. 동시에 부족에서 제일 강한 전사들과 한 명씩 차례로 대련을 펼치며, 다리가 풀려 더 이상 서 있지 못할 지경까지 훈련하는 나날이 계속됐다. 그리고 마침내 세주아니는 부족의 지도자 자리를 물려받게 된다. 그녀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부족 전사들에게 자신을 본보기로 삼을 것을 명령했고, 세주아니의 통치 아래 부족은 전에 없이 강성해졌다. 언젠가 그녀가 프렐요드를 정복하는 날이 오면, 살아남은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막강한 왕국을 건설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리라. 그러나 세주아니가 계획했던 대정벌은 피 튀기는 전쟁의 모습이 아닌 느닷없는 평화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겨울이 시작되는 첫날, 세주아니의 진영에 애쉬가 보낸 사절단이 곡식을 선물로 들고 줄줄이 찾아들었다. 애쉬의 의도는 불 보듯 뻔했다. 두 부족이 결합하게 되면 겨울 발톱 부족은 다시는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세주아니에게 이것은 선물이 아니라 모욕이었다. 전투 대신 농사를 선호하는 애쉬 부족의 생활은 실로 경멸스러운 삶 그 자체였고,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마르고 약해빠진 그들을 보며 그녀는 코웃음 쳤다. 이윽고 세주아니는 부족민을 한데 모으고서 애쉬가 보낸 곡물에 불을 질렀다. 그녀는 연단 위에 올라서서 애쉬의 이런 자선행위는 우리 부족을 나약하게 만들고 결국엔 괴멸시키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 선포했다. 세주아니는 사절단이 들고 온 보급품을 갈기갈기 찢어서 그들의 품에 돌려보냈다. 오직 강자만이 프렐요드에서 살아남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아바로사 부족에게 똑똑히 보여주어야 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뒤로 한 채 세주아니는 자신의 부대를 소환했다. 그리고는 오늘의 뼈아픈 교훈을 널리 알리기 위한 대원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