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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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보신각 동종 |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 안양 중초사지 당간지주 |
대한민국 보물 제3호 | |
서울 원각사지 대원각사비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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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탑골공원 |
분류 | 기록유산 / 서각류 / 금석각류 / 비 |
수량 | 1기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471년 |
1. 개요
서울 圓覺寺址 大圓覺寺碑. 조선 세조 13년인 1467년에 왕의 명으로 처음 조성을 시작하여 성종 2년인 1471년에 완성한 한국의 석비. 현재 탑골공원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보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2. 내용
높이 4.9m, 비신 너비 1.3m.
조선의 7대왕 세조가 원각사를 창건한 경위를 적어 세운 비석으로, 당시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는 양주 회암사에서 분신한 사리를 보고 감동하여 1465년(세조 11) 흥복사 터에다 원각사를 지은 후 1467년(세조 13)에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완성되자 연등회를 열고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그 전후사정을 적은 비석을 조성하게 하였고 성종 2년에 완공한 것이다.
세조가 간경도감에서 원각경(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여 십층석탑을 새운 뒤 그 내용을 새겼으며, 세조와 예종 때까지는 백제(百齊)를 원각사에서 지냈다. 연산군 10년에 왕의 명으로 기생들과 놀기 위하여 불상을 끌어내리고 공자의 입석을 세운 이후 쇠락하였고 중종 때 원각사를 불태우면서 내버려졌다.
비명인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는 강희맹이 썼고 비문은 김수온, 성임이 썼다.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썼다.
조선 전기 세련된 조각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한국 조형사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이다. 또한 조선 전기 화려하게 꽃 피웠던 불교 문화에 대해서도 유추해볼 수 있는 문화재이다.
3. 외부 링크
4. 보물 제3호
원각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로, 조선 성종 2년(1471)에 건립되었다. 원각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던 절로 조선시대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조계종의 본절로 세웠다. 조계종이 없어지자 관아로 사용되다가 세조가 간경도감에서『원각경 (圓覺經)』을 번역하고, 회암사 사리탑에서 사리를 나누어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다시 원각사를 짓고 10층 사리탑을 세웠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비는 머릿돌을 따로 얹지 않고 비몸돌 위를 두 마리의 용이 감싸듯 표현되어 있어 복고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비를 지고 있는 돌거북은 둔중한 몸체로 머리는 목을 표현하지 않고 앞으로 나와 있다. 등무늬는 육각형이 아닌 사다리꼴 평행세선을 새겼으며, 등 중앙에는 연잎조각을, 꼬리와 다리에는 물고기 비늘을 조각해 놓아 조선시대 조각미의 독특한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비몸돌 위로는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드는 두 마리의 용이 조각되었으며, 조각 아래의 가운데에는 ‘대원각사지비 (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이름이 강희맹의 글씨로 새겨져 있다.
비문은 당대 명신들이 짓고 썼는데, 앞면의 비문은 김수온, 성임, 뒷면의 추기는 서거정, 정난종이 각각 짓고 썼다.
5. 해석문
(앞면)조선국 대원각사 비명과 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 겸 지경연성균관사 신 김수온(金守溫) 왕명을 받들
어 지음.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신 성임(成任) 왕명을 받들어 씀.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靖難翊戴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행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 진산군(晋山
君) 신 강희맹(姜希孟) 왕명을 받들어 전액을 씀.
공손히 생각하건대, 우리 주상전하께서 재위하신지 10년인 갑신년(세조 10, 1464년)에 공이 이
루어져 정치는 안정되고 예는 질서를 갖추고 음악은 화평하여 국가가 한가하니, 드디어 전하께
서는 지도(至道)에 마음을 끌리게 하고 공손히 현교(玄敎)를 묵묵히 받들어, 억조의 창생과 함께
덕의 본을 세우고 같이 태평성대에 오르고자 생각하시어,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설법한 삼장(三
藏, 경 율 론의 불교의 모든 전적) 12부(部) 중에 오직 대원각경(大圓覺經)이 참으로 돈교(頓敎)
의 참된 도리이므로, 다스리는 여가에 해석하고 구결(口訣)을 달아 한문과 한글을 다 붙여서 장
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대승(大乘)의 도를 들을 수 있게 하였다.
이 해 여름 4월 경술일에 효령군(孝寧君) 보(補)께서 천보산(天寶山) 회암사(檜巖寺)에 석종(石
鍾)을 세워 석가여래의 사리(舍利)를 안치하고, 이에 법회(法會)를 열어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하
였다. 이날 저녁에 여래가 공중에서 모습을 나타내고 신승(神僧)이 단상(壇上)을 왔다 갔다 하
며, 서기(瑞氣)가 넘쳐흘러 방광(放光)하고, 감천(甘泉)이 널리 젖어 사리가 분신(分身)하여 8백
여 개가 되었다. 5월 갑인일에 효령군 보께서 영적(靈跡)을 갖추고 사리를 받들어 아뢰니, 전하
께서는 왕비전하와 더불어 함원전(含元殿)에서 예불(禮佛)을 드렸는데, 사리가 또 4백여 개를 분
신하였다. 조정의 백관이 전(箋)을 올려 하례를 하니, 이에 중외(中外)에 대사령을 내리고 의정
부(議政府)에 명을 내리시기를, “현겁(賢劫, 불교에서 말하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 중의 현재)의
천불(千佛) 중에 석가불(釋迦佛)이 넷째 번인데 도는 시방(十方)을 덮고 지혜는 이계(二界, 진
(眞) 속(俗)을 아우르는 모든 세계)에 두루 넘치며, 법을 설하여 중생을 제도하나니, 그 도에 관
한 책이 중국에 유입된 것이 8만 4천여 부인데, 원각경 한 경이 구경(究竟)의 결과를 일으킨 경
전이다. 나는 명구(名句)를 번역하고 그 의의를 떨쳐 나타내 장차 유포(流布)하려던 차에, 마침
백부 효령군이 법회(法會)를 열어 제불(諸佛) 여래(如來)가 신변(神變)을 나타냄이 이 경지에 이
르렀으니, 오탁(五濁, 시대, 부정한 사상, 번뇌, 사람, 인간의 수명 등 모든 것이 혼탁한 시대)의
상계(像季, 상법과 말법, 곧 부처의 정법이 힘을 다한 뒤 전개되는 바르지 못한 시대. 정법 5백
년, 상법 1천년, 말법 1만년이라 함)에 이런 드문 일을 만나니, 마땅히 복을 일으키는 옛 절을
중건하여 원각사라 이름하여 최상의 법문에 뜻을 깃들게 하는 것이 어떠한가.” 하시니, 여러 신
하가 머리를 조아리고, “감히 왕의 아름다운 명령을 받들지 아니하오리까.” 하였다.
절은 도성 안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주위는 2천여 보(步)였다. 처음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獻大王)께서 한양(漢陽)에 도읍을 정하자 절은 조계종(曹溪宗)의 본사가 되었는데, 조계종이
이미 폐지되어 절도 역시 곧 폐하여 관청이 된 지가 거의 40년이 되었다. 이듬해(세조 11,
1465년) 6월 을묘일에 전하께서 친히 그곳에 거둥하시어 백악산(白嶽山, 북악산)이 북쪽을 지키
고, 목멱산(木覔山)이 남쪽에서 껴안았으며, 그 위치는 양지가 되고 그 땅은 앞이 탁 틔어 밝아
대찰을 세우기에 알맞음을 두루 바라보시고, 곧 신 효령군 보 등에게 명하여 제조(提調)를 삼아
그 역사를 감독하게 하시었다. 그래서 먼저 집을 동북쪽에 가설하고 처음으로 불상을 만드는데,
문득 황색 구름이 일어 옥상을 덮고, 공중에서 꽃이 흩날려 떨어져서 오색이 모두 갖춘 것을 보
게 되었다. 효령군 보 등은 급히 장계를 아뢰니, 전하는 근정전(勤政殿, 조선왕조의 정궁 경복궁
의 정전)에 납시어 여러 신하의 하례를 받고 특사를 내렸으며 백관에게 관작 한 계급씩을 올려
주시었다.
9월 갑자일에 절의 정전(正殿) 위에서 서기가 솟아올라 창공을 가로질러 함원전(含元殿)에 이어
지므로, 여러 신하는 또 전(箋)을 올려 하례를 드리니, 전하는 대사(大赦)를 내렸다. 이에 역군들
이 모여들었는데, 너무 서둘지 말라고 해도 부지런히 일하고 사부대중(四部大衆, 불교의 네 부
류의 구성원들. 비구 비구니의 남녀 출가 대중과 우바새 우바이의 남녀 신도)은 서로 시주하여
오직 남보다 뒤질까 걱정하였다. 10월 을묘일에 이르러 낙성을 고하니, 칸으로 헤아려 모두 3백
여 칸이다. 불당(佛堂)이 한가운데 우뚝하여 대광명전(大光明殿)이란 액호(額號)를 내리고, 왼쪽
은 선당(禪堂)이라 하고 오른쪽은 운집(雲集)이라 하며, 문은 적광문(寂光門)이라 하고, 다음 바
깥문은 반야문(般若門)이라 하고, 다음 바깥문은 해탈문(解脫門)이라 하고, 종을 단 건물은 법뢰
각(法雷閣)이라 하고, 음식을 장만하는 곳은 향적료(香寂寮)라 하였다. 동편에는 못을 파서 연을
심고, 서편에는 동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정전 뒤에다 장경각(藏經閣)을 두어 해장전(海藏殿)
이라 하였다. 또 13층의 탑(窣覩婆, 스투파의 음역, 탑)를 세워 분신사리(分身舍利)와 새로 번역
한 원각경(圓覺經)을 안치하니, 전당(殿堂)과 요사(寮舍)와 창고(倉庫)와 주방[廚湢]이 각각 위치
에 맞고 순서 있게 되며 규모가 굉장하고 금벽(金碧)이 휘황하여, 장려(壯麗)한 건물의 아름다움
은 그에 짝할 만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건치(犍椎, 종과 소종 등 쳐서 소리내는 것)의 도구와
항시 사용하는 모든 집기까지도 다 풍부하게 갖추어졌다.
다음 해(세조 12, 1466년) 4월 8일에, 명하여 여러 절에 있는 운치 있는 스님들을 불러 크게 법
회(法會)를 개설하고,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읽으면서 낙성을 하고 전하께서는 친히 도량에 나
아가 시종(侍從)과 신료(臣僚) 및 외지에서 초빙해 온 자로 하여금 모두 들어와 예를 드리게 하
였다. 이 때에 오색구름이 떠돌고 하늘의 꽃이 비에 어울리며, 흰 용(龍)이 공중에서 꿈틀거리
고, 두마 리 학이 구름 사이에 오락가락하며 아름다운 상서가 밀려들어 만인이 모두 볼 수 있게
되었고, 특히 절의 스님에게 쌀과 포목을 내려 주었다.
또 그 이듬 해(세조 13, 1467년) 4월 8일에 탑이 완성되어 법회를 베풀고 전하께서 친히 거둥
하시니, 또 하늘꽃과 서기와 사리의 기적이 있고, 또 하얀 기운白氣이 치솟아 올라 여러 가닥
으로 나뉘어, 공중에 가로 골쳐 빙 돌아 바퀴가 되어 거듭 겹쳐 다함이 없고 햇빛이 노랗게 엷
어지니, 비구 비구니와 일반 신자들이 우러러 바라보며, 무릎 꿇고 절하는 자가 억만이나 되었
다. 궁궐로 돌아오시자 학생(學生) 기로소(耆老所) 교방(敎坊)에서 모두 노래를 올리며, 도성 안
의 남녀들이 이 골목 저 골목을 메우고 서로 뛰고 춤추니 환호하는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전하
께서 특사를 내리고 백관에게 관작 한 계급씩을 올려 주시니, 백관들이 입을 모아 청하기를,
“신들이 엎드려 보옵건대 큰 가람(伽藍, 절의 다른 이름)을 짓고 큰 법의 깃발을 세우고 큰 법
회를 열어서 기이한 상서가 한 가지만이 아니었으니, 실로 공전에 듣기 드문 일이옵니다. 오직
불보살이 아니면 불법의 교화를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며, 또한 우리 전하의 지극하신 덕이 도에
응축되어 묵묵히 최상승(最上乘)에 이르러 들어맞는 것이옵니다. 청컨대 돌에 새겨 영원히 보이
도록 하소서.” 하니, 이에 신 김수온(金守溫)을 불러 글을 지으라 하시므로, 저는 명령을 받들고
황송하여 감히 사양을 못하였사옵니다.
엎드려 생각하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이 내신 성지(聖智)로 역대의 제왕에 탁월하게 으뜸이
되시니, 지난 날 잠저(潛邸, 왕에 오르기 전에 살던 곳)에 계실 적에 기미를 미리 밝게 아시고
화란을 평정하는 큰 명령을 받았사옵니다. 즉위하신 이래로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기를 꾀하여
미처 한가롭게 식사할 겨를도 없었사오며, 덕을 닦고 선을 행하며 교화를 도탑게 하고 풍속을
바르게 하시니, 비와 햇볕이 때에 맞아 백성들은 화평하고 풍년 들어 지극한 치세에 올랐습니
다. 위엄이 해외에까지 떨치어, 궁벽하고 먼 나라에 산을 넘고 바다 건너 연락이 끊임없으니,
성한 덕과 훌륭한 공과 치세를 이룬 그 아름다움은, 삼황(三皇, 중국 고대의 이상적인 천자. 복
희씨 신농씨 수인씨) 오제(五帝, 삼활 다음의 이상적인 천자. 황제 전욱 제곡 요 순) 이래로 다
시 더할 이 없사옵니다. 거듭 생각건대 만 백성이 어둠 속을 헤매어 윤회(輪回)의 여러 길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으므로, 이에 요의경(了義經, 진실하고 국극적인 가르침을 분명하게 말한 경전)
에 의거하여 친히 부연하여 옮겨 알기 쉽도록 하여 중외에 반포하시고, 도성 안에 또 대찰(大
刹)을 세워 억만 백성으로 하여금 부처의 자비로운 교화에 가까이하며 삿된 것을 버리고 바른
데로 돌아가 모두 선속(善俗)이 되어 함께 여래의 넓은 지혜바다에 들어가게 하시니, 신민과 백
공(百工)이 즐거워하지 않는 자가 없어, 백성들이 몰려와 일을 따르며 북소리가 그치지 않아 수
개월이 안 되어 완성을 보았다.
아, 임금님의 슬기로운 정책이 위로 부처의 부탁에 부응하고 아래로 만 사람의 소망에 합하여,
온갖 신명이 순순히 협조하고 천지가 영검을 나타내어 경영한 이래로 아름다운 상서가 나란히
모이고 큰 복이 성하게 떨치니,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우리 부처의 보제(普濟) 신통(神通)의 교
화와 우리 임금의 지성(至誠)과 감통의 묘리를 어찌 신의 관견(管見)으로 이름을 지어 말하겠습
니까. 그러나 신이 법의 자리를 더럽히고 이러한 성대하고 아름다운 일을 보았으니, 감히 펴서
넓히고 찬양하여 이 큰 종으로 하여금 무궁한 장래에 메아리치게 하지 아니하겠습니까. 삼가 절
하고 이마를 조아려 명(銘)을 올려 이른다.
아름다우신 우리 임금이여
하늘이 주신 용기와 지혜로세
기미에 밝아 난리를 평정하여
막힌 운 열어주고 빠진 사람 건졌네
하늘이 함께하고 사람이 따르니
하늘의 큰 명이 여기 붙었도다
드디어 대동(大東)에 군림하사
정신을 가다듬고 다스리길 꾀하여
헌장(憲章)을 조술(祖述)하여
삼황오제(三皇五帝) 짝이 되었네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게을리 한 적이 없네
착한 정사 착한 교화, 열 해를 저절로 다스리니
풍속이 순박하고 두터워
태평성대 이루었도다
어리석은 중생(衆生)이여
성품과 형체 똑 같건만
혼미한 길에 떨어져서
벗어날 바를 모르나니
오직 이 원각(圓覺)만이
모든 법의 근본이라
번역하고 토를 달아서
장(章)을 나누고 구절을 분석하니
순순한 그 가르침이
부처 말씀과 같구나
종(鍾) 세우고 법회(法會) 여니
종실(宗室)의 우두머리시라
바른 법을 크게 선양하여
사자후(獅子吼)와 같이 하니
영험한 감응이 연달아 나타나
우리 임금께 바치도다
우리 임금 아름답다 하시고
오라, 나의 경사대부들이여
여래(如來)의 신성한 교화는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이런 좋은 일을 만났으니
기쁨을 어디에 비하리
옛날 절이 터만 남아
나라의 도성 안에 있으니
어찌 중수를 도모하여
현풍(玄風)을 드날리게 하지 않으리
규모와 계획 위치와 순서는
모두 친히 마련하셨네
이에 신 보(補, 효령대군)에 명하여
공사를 감동(監董)케 하시니
백성이 다투어 와서
하루가 못가서 이뤄졌네
전각이며 요사며 회랑이며
난간과 계단이며 방과 창이랑
꿩이 나는 듯 새가 솟는 듯
치밀하고 튼튼하도다
탑을 뜰에 세우니
다보(多寶)여래가 나타난 듯
방울 영탁(鈴鐸)이 공(空)을 말하니
중생이 듣고 깨우치네
성한 모임 두 번 열자
임금 행차 또 오셨네
기이한 모든 상서
겹치고 또 겹치니
귀 있고 눈 있는 자는
누가 기뻐하지 않으리오
이 나라 사민(四民, 사농공상(士農工商))들과
저 다른 나라까지도
만 개 입이 똑 같은 소리로
함께 외치고 함께 뛰네
우리 임금 신성하시와
오백 년의 기약에 응하여
무공(武功)과 문치(文治)가
천년 만에 한번 왔네
우리 임금 총명하시와
현교(玄敎)에 통달하시어
사지(四智, 부처가 갖춘 네 가지 지혜)의 교화에다
십선(十善, 열 가지 좋은 업)의 효험으로
우리 대중을 깨우치시어
꿈속에서 깨어난 듯하도다
우리 임금 인자하시와
이내 방편을 베풀어
탑과 묘(廟)를 세우시고
백성에게 알도록 하시니
정과(正果)를 얻어 이루고
사인(邪因)은 떠나갔네
선각(先覺)이 후각(後覺)을 깨우쳐
함께 원각에 오르게 하시니
법을 베풂은 다함이 없고
은혜와 이익은 이리 넓도다
무엇으로 그 미덕을 밝히랴
이 빗돌에 의지하노라
성화(成化) 7년(성종 2, 1471년) 4월에 세움
(뒷면)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음기(陰記)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우참찬 겸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신 서거
정(徐居正) 왕명을 받들어 지음
가정대부(嘉靖大夫) 예조참판 겸 동지춘추관사 예문관제학 신 정난종(鄭蘭宗) 왕명을 받들어
씀
대개 듣건대 옥호(玉毫, 부처 눈썹 사이의 흰 털. 백호. 곧 부처)가 모습을 보이어 영적을 서방
에 나타냈고, 불상이 꿈에 나타나 정법이 동방에 흘러들었다고 한다. ~ 결 ~ 지금에 이르기까지
천 수백 년 동안 상하에 받들지 않음이 없었지만 큰 깨달음의 오묘한 뜻은 작고 비밀스러워 말
로 하기 어렵다. 상법 말법 시대(불법이 오래 되어 믿지 않는 이가 생겨나고 많아지는 혼탁한
세상)가 되니 길잡이(부처의 중생 제도)에 미혹하기 쉬어져 진실로 대성(大聖)이 아니면 임금의
스승이 되어 깊이 공의 가르침에 부합하여 불교를 크게 드날리기 어려우니 ~ 결 ~ 큰 도를 듣
고 참된 근원을 깨닫는다. 오늘의 선의 근본으로 장래의 훌륭한 결과를 닦는다. 공손히 생각건
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惠莊大王)께서는 ~ 결 ~ 겸하여 경전에 통달하시어 정사를 돌보는 틈에
친히 원각경의 구결을 정하고 풀이하셨다. 또 도성 안에 대찰을 창건하시어 사부대중이 도성 문
을 나가지 않고도 불법을 받들 수 있게 하여 지혜의 광명을 크게 열도록 하셨으니 인천의 훌륭
한 스승이시다. 아아 지극하도다. 여러 신하들이 돌에 공적을 새기기를 청하니 판중추부사(判中
樞府事) 인 신 김수온(金守溫)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글로 짓도록 하시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임금께서 승하하시고 예종 양도대왕(襄悼大王)께서 즉위하시니 ~ 결 ~ 지금 우리 주상전하께서
는 선대의 길을 이으셔서 간경도감(刊經都監, 불경을 간행하는 관청)에 명하시기를 “우리 선대
왕들께서 이미 이룩하신 큰 덕과 큰 공을 백성을 제도하고 ~ 결 ~ 높은 교화를 다시 천명하시
어 후인에게 남기시었으니 그 사적의 자세한 것은 모두 비에 실려 있다. 아직 …하지 못해 ~ 결
~ 또 신 서거정(徐居正) 등 에게 명하시어 불사의 전말과 그에 더하여 비에 들어가지 않은 사실
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하도록 하라고 하시었다. 이에 도제조(都提調)인 신 한명회(韓明澮) 등이
감독하여 몇 달 동안 새기고 이내 해탈문 안의 동쪽에 비를 세웠다. 신이 엎드려 생각건대 부처
가 중생을 제도하는 것과 성왕께서 세상을 다스리심은 그 법도가 한가지이다. 우리 세조 혜장대
왕께서는 이미 능히 ~ 결 ~ 또 능히 불교의 대도를 체득하시어 도로 삼아 그 성대한 자취는 ~
결 ~ 신은 문장이 거칠고 졸렬하여 얻을 바를 다하여 겨우 그 대강을 엮어 비석의 뒷면에 적는
다.
조성도감(造成都監)
도제조(都提調)
효령군(孝寧君, 태종의 제2왕자) 신 보(補)
임영군(臨瀛君, 세종의 제4왕자) 신 구(璆)
영응군(永膺君, 세종의 제8왕자) 신 염(琰)
수충위사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
의정부사겸춘추관서운관사(領議政府事兼春秋館書雲觀事) 세자사(世子師) 고령부원군(高靈府院
君) 신 신숙주(申叔舟)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
大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겸 판병조사 강원황해평안함길도도체찰사(判兵曹事江原黃海平安
咸吉道都體察使) 신 한명회(韓明澮)
수충좌익공신(輸忠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세자부(世子傅)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신 구치관(具致寬)
흥록대부(興祿大夫) 영순군(永順君) 신 부(溥)
제조(提調)
수충▨▨좌리좌익공신(輸忠▨▨佐理佐翼功臣)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
예조사(判禮曹事) 세자이사(世子貳師) 인산군(仁山君) 신 홍윤성(洪允成)
숭덕대부(崇德大夫) 청성위(靑城尉) 신 심안의(沈安義)
숭정대부(崇政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 김▨(金
▨)
숭헌대부(崇憲大夫) 은천군(銀川君) 신 ▨(▨)
숭헌대부(崇憲大夫) 옥산군(玉山君) 신 ▨(▨)
▨▨좌익공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무송군(茂松君)
신 윤자운(尹子雲)
정헌대부(正憲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신 김국광(金國光)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상산군(商山君) 신 황효원(黃孝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원성군(原城君) 신 원효연
(元孝然)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정헌대부(正憲大夫) 서원군(西原君) 신 한계미(韓繼美)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신 노사신(盧思愼)
집사(執事)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충좌위상호군(行忠佐衛上護軍) 신 정자원(鄭
自源)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의흥위상호군(行義興衛上護軍) 신 홍▨손(洪
▨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충좌위상호군(行忠佐衛上護軍) 신 강윤▨(姜
允▨)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충무위상호군(行忠武衛上護軍) 신 안도(安道)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신 권량(權良)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신 안극사(安
克思)
통정대부(通政大夫)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 신 임극기(任克己)
통정대부(通政大夫) 판군자감사(判軍資監事) 신 유계▨(柳季▨)
절충장군(折衝將軍) ▨▨위상호군(▨▨衛上護軍) 신 김▨▨(金▨▨)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상호군(行龍驤衛上護軍) 신 김자성(金子省)
중직대부(中直大夫) 선공감정(繕工監正) 신 이▨(李▨)
보공장군(保功將軍) 행충무위부호군(行忠武衛副護軍) 겸 선전관(宣傳官) 신 이약동(李約東)
소위장군(昭威將軍) 행의흥위우부사직(行義興衛右部司直) 신 목▨▨(睦▨▨)
▨▨장군(▨▨將軍) 행의흥위중부부사직(行義興衛中部副司直) 신 ▨▨로(▨▨老)
충의교위(忠毅校尉) ▨▨▨▨우부부사직(▨▨▨▨右部副司直) 신 조▨(趙▨)
봉훈랑(奉訓郞) 행동부령(行東部令) 신 안후도(安後道)
간경도감(刊經都監)
도제조(都提調)
수충위사협찬정난동덕좌익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衛社協贊靖難同德佐翼保社炳幾定難翊戴功
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영경연춘추관사(領經筵春秋館
事) 겸 판병조사(兼判兵曹事) 신 한명회(韓明澮)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영경
연예문관홍문관관상감사(領經筵藝文館弘交館觀象監事) 무송부원군(茂松府院君) 신 윤자운(尹子
雲)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행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겸 지경연성균관사(知經筵成均館事)
신 김수온(金守溫)
제조(提調)
숭록대부(崇祿大夫) 행▨▨▨호군(行▨▨▨護軍) 신 김개(金漑)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서평군(西平君) 겸 지경연사(知經筵事)
신 한계희(韓繼禧)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 지경연사(知經筵事) 홍문관대제학(弘交館大提學) 판이조사(判吏曹事) 선성군
(宣城君) 신 노사신(盧思愼)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자헌대부(資憲大夫) 화천군(花川君)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五衛都摠府都摠管) 신 권감(權瑊)
추충정난익대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 가정대부(嘉靖大夫) 행승정원도승지(行承政院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상서원정(尙瑞院正) 홍문관직제학(弘文館直提學)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
撰官) 계림군(鷄林君) 신 정효상(鄭孝常)
가정대부(嘉靖大夫) 파성군(坡城君) 신 윤찬(尹贊)
부제조(副提調)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사직(行龍驤衛司直) 신 조지(趙祉)
집사(執事)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용양위사맹(行龍驤衛司猛) 신 김맹린(金孟鏻)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호분위사맹(行虎賁衛司猛) 신 ▨▨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호분위부사직(行虎賁衛副司直) 신 임▨창(林▨昌)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의흥위사맹(行義興衛司猛) 신 조금(趙嶔)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위사맹(行▨▨衛司猛) 신 이▨(李▨)
어모장군(禦侮將軍) 행호분위사정(行虎賁衛司正) 신 이유인(李有仁)
보공장군(保功將軍) 행호분위부사과(行虎賁衛副司果) 신 성계성(成繼性)
▨▨장군(▨▨將軍) 행호분위부사과(行虎賁衛副司果) 신 이▨▨(李▨▨)
해석자:정병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