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씨 | 사(士) |
휘 | 사(賜) |
베트남어 | 시 트(Sĩ Tứ)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역임관직 | 일남태수 |
1. 개요
후한의 관료. 사섭, 사일, 사유, 사무 형제의 아버지.2. 생애
본래 사사는 예주 노국 문양현이 본관이었다. 전한이 멸망하고 왕망의 신나라가 세워지는 혼란이 벌어지자, 그의 조상은 교주로 피난가면서 정착했다고 한다.[1]교주로 피난간 사씨의 6대손인 사사는 환제(후한) 시기(142~167) 교주 최남단 군현인 일남군(日南郡) 태수를 지냈다. 사망 시기는 불명이나, 아들인 사섭이 아버지의 상을 치른 후 187년 교지태수로 부임한 것으로 늦어도 184년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기타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가 논문을 통해 사섭과 교주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섭이 지배하지 못한 창오군, 일남군, 울림군이라며 그 중 일남군에 대해 사사의 영향력 때문인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고 했으며, 사사는 일남군의 태수가 된 것이 고향 땅의 태수가 된 것이라 원칙적으로는 불가능한데도 부임한 것으로 사씨 일족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과 중앙에 얼마나 이 지역을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보여준다고 했다.
[1]
그의 아들들이 전부 창오군 광신현 출신인 것으로 보아, 교주로 피난간 사씨들은 창오군 광신현(오늘날 광시좡족자치구 우저우시)에 정착한 걸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