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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9-01 23:17:24

블라디미르(리그 오브 레전드)/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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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문 배경2. 삶은 예술이다3. 고독4. 구 설정
4.1. 구 단문 배경4.2. 구 배경4.3. 리그의 심판

1. 장문 배경

금지된 고대 마법의 대가 블라디미르는 녹서스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인물 중 하나다. 그는 제국의 여명기부터 존재했으며, 지금까지 제국의 기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제 지난날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다. 그의 정신은 영원하지 않으며, 비정상적으로 연장된 수명은 기억이 아닌 연대기를 통해 지속된다.

역사는 자주 블라디미르의 행적을 놓치곤 했다. 비록 그는 다양한 사건 속에서 여러 인물로 그려지지만, 이는 추측일 뿐이었다. 악명높은 다르킨들의 대전쟁이 발로란으로 번졌을 때, 그들이 위협하던 한 왕국의 왕자에 얽힌 전설이 있다. 왕권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자신보다 먼저 왕권을 계승할 형제들이 많았기에 나이 어린 불쌍한 왕자는 타락한 신성전사들의 인질로 넘겨졌다.

다르킨의 폭정 아래 필멸자들은 가축과 다를 바 없었으니, 이는 그들의 우월한 마법 능력 때문이었다. 그들은 육체를 재생하고 피를 변형시키는 능력을 갖췄고, 생명 그 자체에 통달해 있었다.

인간보다 우월하기에 그러한 힘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던 블라디미르는 동족 중 최초로 다르킨의 무시무시한 마법을 연구할 수 있도록 허락받은 자였다. 부단한 노력 끝에 그는 다르킨 군대에서 입지를 다졌으며, 혈마법을 부리고 하찮은 존재들에게 다르킨의 뜻을 행할 권한이 주어지게 되었다. 이후 블라디미르가 다르킨 만큼이나 무자비한 방식으로 폭정을 이어가자 다르킨은 이를 흡족하게 지켜보았다.

이 잔혹한 존재들의 몰락 또한 전설로 남아있다. 지금은 사어가 된 고대 슈리마어로 쓰인 그들의 몰락에 대한 기록이 불멸의 요새에 숨겨져 있는데, 기록에 따르면 블라디미르의 주군은 그의 동족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투옥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군사들의 손에 죽은 것이라고 한다. 살아남은 소수의 필멸자들은 혈마법에 대한 불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피난을 떠났다.

사실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인물은 블라디미르였다. 이는 그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다르킨의 파멸에서 비롯된 빛으로 상처를 입고 눈이 멀어 미쳐버린 그는 넘지 말아야 할 유한한 생명의 한계를 넘어 육신을 재생할 충분한 힘을 흡수했다.

그 후 블라디미르는 입에 담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수명을 연장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모데카이저의 악의 통치가 절정에 달했을 때 피에 굶주린 신화적 악령이 발로란 동부 연안 절벽 지대에 나타나 현지 부족에게 어린 생명을 바치고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악령의 서식지에 접근했던 이들은 대부분 환영받지 못했으나, 어느 날 창백한 여마법사가 나타나 한 제안을 들고 야만적인 악령을 방문했다. 둘은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식사를 즐겼는데, 식사 도중 그들이 부린 흑마법으로 인해 식탁 위에 있던 와인이 상하고 장미가 시들었으며 빨갛던 색이 시커멓게 변해버렸다.

블라디미르와 르블랑은 이렇게 동맹 관계를 맺게 되었다. 비록 의견 충돌, 정치와 전쟁의 권모술수가 가득한 동맹이었지만. 이후 수 세기 동안 강력한 권력을 가진 귀족과 고위 마법사, 그리고 어둠의 존재들이 동맹에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비밀 세력으로 성장하여 녹서스의 수많은 야심적인 활동을 통제하며 수천 년간 왕권을 좌지우지했다.

블라디미르는 검은 장미단의 지도자들 중 독특하게도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가장 '흥미로웠던' 시기에 마지못해 녹서스 귀족 궁정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수십 년 후 그의 마법이 파괴적인 힘을 가진 절정기에 종적을 감추었다. 이는 철저히 비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혈마법술은 블라디미르의 지도 아래 녹서스 군대를 비롯한 옛 귀족 가문의 후손들에게 전수되었다. 이들 혈마법 계승자 중 젊은 추종 집단인 진홍회는 혈마법 만큼이나 블라디미르의 인격까지도 숭배했다.

전대 대장군의 죽음 이후 제리코 스웨인이 힘을 얻으면서 녹서스 제국의 정세는 급격히 변화했고, 블라디미르는 다시금 자신의 힘을 발휘할 것을 종용받았다.

자애로운 사교계 명사의 탈을 쓴 그는 정권을 쥐고 있던 삼인체제 '트리파릭스'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며 대중 앞에 다시 등장했다. 이는 검은 장미단의 일원 중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 자들을 염려하게 했다. 사실 블라디미르의 등장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가 지난 삶을 살며 남겼던 흔적이 아직 충분히 사라지지 않았고, 스웨인은 블라디미르의 실체를 눈치채기 시작한 듯했다.

녹서스에 더욱 암울한 새로운 갈등의 기운이 드리우자 블라디미르는 과거의 영광을 상기하며 제국에 새로이 찾아온 활력으로부터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에게 있어 지금 이 삶은 하나의 유희이자 수 세기에 걸친 가장무도회며 위대함으로 가기 위한 여정에 불과하다. 종국에 다르킨들이 서로 전투를 벌이며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세상에 대한 지배권을 잃게 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혼자서도 가장 강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2. 삶은 예술이다

파일:블라디미르 삶은 예술이다.jpg

녹서스의 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제국 전역에서 온 수천 명의 사람을 한곳에 몰아넣고 조용하기를 바랄 수 없는 것.

물가에 있는 자가야 족의 거주지 천막에서 사막 행군 노래가 흘러나왔고, 근처에 있는 청산업자의 경기장에서는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철벽 울타리에 갇힌 용 사냥개들은 북쪽 도축장에서 도살된 가축의 냄새를 맡고 울부짖었다.

남편을 잃은 미망인, 비탄에 빠진 어머니, 악몽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들의 절규는 술 취한 병사들의 고성이나 어둠 속에서 물건을 쌓아놓고 파는 행상인들의 외침과 하나가 되어 매일 밤 울려 퍼졌다.

결코, 녹서스의 밤은 결코 조용하지 않았다.

이곳만 제외하고.

녹서스의 이 구역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우라는 소음이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붓과 물감, 목탄 꾸러미를 가슴 쪽으로 끌어안았다. 결코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거리 한복판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로 소음은 한순간에 잦아들었다.

이 거리는 모르토라 또는 철의 관문이라고 알려진 녹서스의 오래되고 부유한 구역에 있다는 것 말고는 특별할 게 없었다. 도로의 울퉁불퉁한 자갈에 비친 보름달 빛은 마치 수십 개의 눈이 쳐다보는 것 같았고, 길 양쪽에는 숙련공이나 어쩌면 전투석공의 솜씨로 보이는 석조 건물이 늘어서 있었다. 마우라는 골목길 끝에 있는 높은 신전을 바라봤다. 갑옷을 입은 세 명이 기둥으로 장식된 아치형 구조물 안에 있는 흑요석 늑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쳐다보자 마우라는 걸음을 재촉했다. 검을 지니고 어둠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의 이목을 끌어 좋을 건 없었다.

밤중에 나와서는 안 됐다.

타흐보가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마우라는 그의 눈에서 간악함을 봤고 그가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질투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알았다. 타흐보는 항상 자신이 동료들 중 가장 실력 있는 화가라고 믿었다. 이번 의뢰에 자신이 아닌 마우라가 선택되었다는 사실에 타흐보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빳빳하게 접힌 우아한 필체의 편지가 그들의 공동 화실에 도착했을 때 세리스와 콘라드는 신이 나서 마우라에게 가능한 한 모든 걸 기억해 오라고 애원했고, 주르카는 붓을 잘 씻어 두라고 했다.

"그분과 말을 나눠야 할까?" 세리스가 물었다. 마우라는 밤을 알리는 종소리가 항구에 울려 퍼지자 문을 열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밤중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은 마우라에게 두려움과 흥분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초상화를 그려야 할 테니 그래야겠지." 마우라는 어두워진 하늘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어떤 화풍을 원하는지 의논해야 할 거야. 더구나 자연광이 없을 테니까."

"한밤 중에 초상화라니, 참 이상하지?" 말똥말똥하게 눈을 뜬 콘라드가 담요를 망토처럼 두른 채 말했다.

"어떤 목소리일지 궁금하다." 세리스가 덧붙였다.

"다를 거 없어." 타흐보가 몸을 돌리고 낡아 떨어진 베개를 정리하며 쏘아붙였다. "그자는 신이 아니야. 그냥 사람이라고. 이제 다들 조용히 좀 할래? 잠 좀 자자."

세리스가 마우라에게 달려와 입을 맞췄다. "잘 다녀와." 세리스는 킬킬거렸다. "돌아와서 우리에게... 전부 다 말해 줘. 얼마나 무시무시한 이야기든지 간에."

마우라의 미소는 어딘가 불안해 보였지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새로운 후원자의 저택으로 가는 길은 유달리 구체적이었다. 단순히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 그곳까지 가는 정확한 경로가 말이다. 마우라는 수도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렸을 때 며칠 동안 거리를 떠돌았기 때문이다. 주문이 충분히 들어오지 않아 세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화실 주인이 그들을 쫓아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우라에게 이 구역은 갈수록 수수께끼였다. 물론 이곳에 그 저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가 본 이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모든 녹서스인은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고 있었다. 마우라는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정복지의 낯선 도시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거리는 낯설게 느껴졌고 갈수록 좁고 험했다. 그러다 결국 몸을 으스러뜨릴 때까지 좁아질 것 같았다. 마우라는 경계등 혹은 밤에 찾아오는 구혼자를 위해 위층 창가에 켜 둔 양초의 희미한 불빛이라도 간절히 바라며 불안한 정적 속을 서둘러 지나갔다.

하지만 달 이외에 빛은 없었다. 뒤에서 자박거리는 발소리나 가쁜 숨소리 같은 것이 들리자 마우라의 심장박동과 발걸음이 빨라졌다.

확 꺾이는 모퉁이를 돌자 원형 광장이 나왔다. 중앙에 물이 콸콸 쏟아지는 분수대가 있었다.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 정도로 비좁은 이 도시에서 이런 광경은 거의 들어 본 적도 없을 만큼 사치스러웠다.

마우라는 달빛에 은은하게 빛나는 분수대를 빙빙 돌며 중앙에 조각된 장식물의 사실성에 감탄했다. 조철을 두드려 만든 이 장식물은 두꺼운 갑옷을 입고 징이 박힌 철퇴를 쥔 머리 없는 전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조각상의 목에서 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우라는 조각상이 누구를 나타내는 것인지 깨닫고 오싹해졌다.

서둘러 분수대를 지난 마우라는 붉은 무늬의 검은 대리석 벽에 세워진, 잘 말린 은빛목으로 만든 대문으로 향했다. 편지에 쓰여 있듯이 대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마우라는 묵직한 대문 사이에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택은 마우라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옅은 색 돌로 지어져 있었다. 녹서스의 많은 웅장한 구조물이 종종 그렇듯 획일적이지 않으면서 인상적이었다. 오히려 자세히 살펴볼수록 하나의 특정한 양식을 고수한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나타났다 사라진 건축 유행을 한데 모아둔 듯했다.

그중 가장 특이한 건 본관 위에 솟아 있는 거친 석탑이었는데, 유일하게 이곳과 동떨어져 보였다. 석탑은 저택이 고대 주술사의 은신처를 둘러싸고 지어진 듯한 인상을 주었다. 부자연스러워 보일 수도 있었지만 마우라는 오히려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저택의 모든 곳에서 제국의 지난날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저택의 창문은 가려져 있어 아무런 빛이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마우라에게 보이는 유일한 빛은 탑의 꼭대기에서 빛나는 은은한 진홍색 빛뿐이었다.

마우라는 자갈길을 따라가며 정성스럽게 가꿔진 아름다운 정원과 잘 나 있는 수로, 이국적인 향과 놀라울 정도로 생생한 색을 지닌 낯선 꽃 사이를 지나쳤다. 바깥에 있는 널찍한 광장과 함께 엄청난 부가 엿보였다. 이번 의뢰에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생각에 마우라는 온몸에 기쁨의 전율을 느꼈다.

특이한 무늬의 날개를 지닌 알록달록한 나비 수백 마리가 꽃 사이를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한없이 가볍고 연약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존재로 탈바꿈하는 생명체. 마우라는 한 번도 밤에 나비를 본 적이 없었다. 나비 하나가 손바닥 위에 내려앉자 즐거움에 웃음을 터뜨렸다. 끝이 가는 나비의 몸체와 쭉 뻗은 날개의 무늬가 녹서스 깃발에 그려진 날개 모양의 도끼날 문장과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나비는 날개를 펄럭이며 날아갔다. 마우라는 나비가 빙빙 돌다가 다른 나비들과 함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며 희귀하고 아름다운 생물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마우라는 손가락으로 알록달록한 잎을 쓸고 지나가며 달빛에 반짝이는 먼지 속에서 손끝에 달라붙어 떠오르는 향기를 음미했다. 그녀는 그중 유난히 아름다운 꽃 옆에서 멈췄다. 불타는 듯한 붉은 꽃잎이 숨 막힐 정도로 밝은 빛을 내뿜었다.

슈리마의 진사 염료나 필트오버의 오커 염료를 섞어도 이런 광채를 지닌 붉은색은 얻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값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아이오니아의 주홍 염료도 이 꽃에 비하면 칙칙해 보일 정도였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듯 아랫입술을 깨문 마우라는 손을 뻗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꽃에서 꽃잎 몇 장을 떼어 냈다. 그 순간 남아 있는 꽃잎들이 안쪽으로 말려들었고, 줄기는 마치 겁에 질린 것처럼 마우라로부터 멀리 휘어졌다. 엄청난 죄책감을 느낀 마우라는 혹시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 몰라 저택을 올려다봤지만 창문은 여전히 어둡게 닫혀 있었다.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마우라는 문턱에서 멈춰 섰다. 편지에는 들어오라고 적혀 있었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이상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혹시 이건 자신을 어떤 끔찍한 운명에 빠뜨리기 위한 함정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기엔 함정은 쓸데없이 정교해 보였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마우라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두려움으로 망칠 수는 없다며 자책했다.

마우라는 숨을 들이쉬고 문턱을 가로질러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은 짙고 굵은 목재가 아치형 구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사이의 공간에는 제국 초기의 피비린내 나는 시절을 그린 색 바랜 벽화가 있었다. 마우라 양쪽의 넓은 통로 안으로 보이는 긴 화랑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누가 혹은 무엇이 전시되어 있는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길게 휜 계단은 중간층과 넓은 아치형 통로로 이어졌지만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아볼 수 없었다. 삼각대 위에 놓인, 천이 드리워진 큰 캔버스 같은 것을 제외하면 현관은 텅 비어 있었다. 마우라는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지 궁금해하며 조심스럽게 가려진 캔버스로 다가갔다.

마우라는 그렇지 않기를 바랐다. 이곳의 빛은 초상화를 그리기에 적절하지 않았다. 오늬무늬 바닥에 달빛이 고인 공간은 환했지만, 이를 제외한 구석은 마치 빛이 다가가기를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완전히 어두웠다.

"저기요?" 마우라의 목소리가 현관에 울려 퍼졌다. "편지를 받고 온…"

마우라의 말이 울렸다. 마우라는 한밤중에 이 기이한 저택에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여기 있다."

마우라는 움찔했다. 교양 있고 남자다우며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위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숨을 죽이고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마우라는 몸을 돌려 그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블라디미르 님이신가요?"

"그렇다." 그는 그 이름 자체가 고통의 근원이기라도 한 듯 깊은 우울에 잠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대가 그 화가로군."

"네, 맞아요." 마우라는 덧붙였다. "화가, 마우라 베체니아라고 해요."

그녀는 그의 마지막 말이 질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자신을 꾸짖었다.

"좋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아, 죄송해요. 편지에 항구의 종이 울릴 때까지는 출발하지 말라고 적혀 있어서요."

"그랬지. 하지만 정확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이번에 마우라는 그림자의 깊은 어둠 속에서 은빛을 본 것만 같았다. "잘못은 그대 같은 이를 찾느라 오랜 시간을 허비한 내게 있겠군. 허영심은 우리 모두를 바보로 만들지, 안 그런가?"

"허영심이라뇨?" 마우라가 물었다. 그녀는 부유한 후원자들이 아첨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님의 진실한 모습을 담을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신 것이 아니라요?"

위쪽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내려 왔다. 마우라는 그가 자신의 말이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지 혹은 자신을 조롱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매번 그와 비슷한 말을 듣곤 하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사실 그런 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아. 그래, 내 정원은 마음에 들던가?"

그 질문에 놓인 함정을 감지한 마우라는 잠시 망설인 후 대답했다.

"네, 녹서스 땅에서 그렇게 아름다운 꽃들이 자랄 수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겠지." 블라디미르가 씁쓸하게 말했다. "이렇게 메마른 땅에서는 널리 퍼져나가 다른 것들을 몰아낼 만큼 억센 종자밖에 자라지 않아. 그것들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지. 그 붉은 꽃은 밤맞이꽃이었다."

마우라는 입이 바싹 마르는 것을 느꼈지만 블라디미르는 그녀가 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밤맞이꽃은 한때 보기 드문 아름다움과 계몽의 축복을 받은 동쪽 열도에 자생했지. 난 모든 필멸의 운명이 그렇듯 그곳이 멸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네. 한때 타고난 자연의 원기를 받으며 자라던 숲에서 발로란으로 씨앗을 가져온 나는 피와 눈물을 섞어 밤맞이꽃을 피울 수 있었지."

"피라면... 그 정도로 땀 흘려 길렀다는 말씀이시지요?"

"그대는 꽃을 기르는 데 땀이 무슨 쓸모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마우라는 답하지 못했지만 듣기 좋은 그의 억양은 매혹적이었다. 밤새도록 들을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마우라는 비단결 같은 블라디미르의 목소리를 머릿속에서 떨치고 가려진 캔버스를 향해 고갯짓했다.

"저기에 그리면 될까요?"

"아니."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저건 내 첫 번째야."

"무슨 첫 번째요?"

"내 첫 번째 삶." 마우라가 천의 가장자리를 들어 올리자 그가 말했다.
그림은 시간이 지나 희미해져 있었다. 색은 빛에 바랬고 붓 자국은 밋밋해졌다. 하지만 그 상은 여전히 강렬했다. 막 성년에 들어선 듯한 젊은이가 예스러운 청동 갑옷을 입고 무시무시한 낫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었다. 세부적인 묘사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소년의 파란 눈만큼은 아직도 날카롭게 빛났다. 대칭을 이루는 뛰어난 외모, 살짝 고개를 기울인 모습이 마우라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마우라는 몸을 숙여 그 뒤에 있는 군대의 모습을 살펴봤다. 거대한 전사 무리는 인간이라기엔 너무 컸고 진짜라기엔 너무 괴물 같았다. 전사들의 윤곽과 특징은 세월이 흘러 희미해져 있었고, 마우라는 세월의 작은 배려에 감사했다.

"블라디미르 님인가요?" 마우라는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내 초상화를 설명해 주길 바라며 물었다.

"한때, 아주 오래전 일이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마우라는 그의 말이 차가워 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 사라진 왕국의 버림받은 후계자였다. 신들이 서로 전쟁을 일으키던 시대였지. 필멸자들은 전 세계에 걸쳐 벌어지는 신들의 싸움에서 노리개에 불과했고 내 아버지는 살아 있는 신에게 무릎을 꿇을 때가 되자 나를 왕족 인질로 넘겼다. 내 목숨이 위태로울수록 아버지의 충성이 보장될 테니까. 아버지가 새로운 주군의 신뢰를 깨면 난 죽을 운명이었지. 하지만 아버지의 약속이 항상 그랬듯이 그것도 헛된 약속이었어. 아버지는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바로 그해에 신과의 서약을 어겼다."

블라디미르의 이야기는 한밤중 화실 지붕 위에서 다 함께 무서운 이야기를 나눴을 때 콘라드가 들려줬던 슈리마 신화처럼 기이하고 신비로웠다. 콘라드의 이야기는 은근한 교훈극이었지만 이건… 진실의 무게가 담긴, 감상에 젖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 새로운 주군은 날 죽이는 대신 더 재미있는 걸 생각해 냈지. 적어도 그에게는 재미있었을 거야. 그는 내게 그의 군대를 이끌고 아버지의 왕국에 대항할 기회를 주었고 난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난 아버지의 도시를 파괴하고 아버지의 머리를 주군에게 바쳤지. 나는 끈에 묶인 훌륭하고 충직한 사냥개였다."

"당신의 백성을 직접 파멸시켰다고요? 어째서죠?"

블라디미르는 마우라가 진지하게 묻는 것인지 가늠이라도 하듯 잠시 말을 멈췄다.

"신성전사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왕국은 절대 나의 것이 되지 않았을 테니까. 아버지에게는 아들과 후계자가 넘쳐났지. 내가 죽을 때까지 내 차례가 돌아 오지 않을 만큼."

"그 주군이라는 자는 왜 그랬던 거죠?"

"난 그가 내 안에서 번득이는 위대함이나 단순한 필멸자 이상의 잠재력을 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곤 했지." 블라디미르가 부드러운 한숨을 내쉬자 마우라의 등줄기에 따스한 전율이 일었다. "하지만 그저 자신의 사냥개 중 하나에게 재주를 가르치면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 사기꾼이 아둔한 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원숭이에게 좌판 주변을 돌며 춤추는 법을 가르치는 것처럼."

마우라는 그림 속에 있는 젊은이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이제는 그 눈의 깊은 곳에서 뭔가 어두운 것이 도사리는 게 보였다. 잔인함 혹은 지독한 쓰라림이 번득이는 것도 같았다.

"그가 뭘 가르쳤죠?" 마우라가 물었다. 마우라는 자신이 그의 대답을 원하는지 확신하지 못하는 만큼 왠지 꼭 알아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군의 종족에게는 죽음을 거역할 힘이 있었다. 살과 피, 뼈를 가장 경이로운 형태로 빚을 수 있었지." 블라디미르는 말을 이었다. "내게 그들의 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쉽게 휘두르던 마법이었지. 하지만 나는 가장 간단한 주문을 숙달하는 데도 내 지성과 의지를 전부 끌어모아야 했다. 나중에 그들의 비밀을 필멸자에게 가르치는 것이 금지된 행위이며 이를 어기면 사형에 처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종족의 관습을 무시하는 것을 즐기는 자였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블라디미르의 웃음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울렸지만 그 소리에 즐거운 기색은 없었다.

"관습에 저항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던 거야. 결국 그로 인해 파멸하고 말았지만."

"죽었나요?" 마우라가 물었다.

"그렇다. 그의 종족 중 하나가 배신하자 이 세계를 지배하던 그들의 힘이 무너졌다. 적들이 단결해 그에게 맞서자 내가 군대를 이끌어 자신을 지켜주길 바랐지. 하지만 난 그를 죽이고 그 힘을 들이켰다. 그가 수년간 내게 가한 수많은 가혹 행위를 잊을 수 없었으니까. 그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난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긴 여정에 첫걸음을 내디뎠다. 빌어먹을 능력 하나에 축복과 저주가 모두 깃들어 있었지."

마우라는 블라디미르의 어조에서 기쁨과 함께 슬픔을 느꼈다. 마치 그 일이 그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처럼. 그는 죄책감을 느꼈을까? 아니면 단순히 마우라의 감정을 조종하려는 것일까?

그를 볼 수 없는 만큼 그의 의도를 가늠하기가 훨씬 더 어려웠다.

"이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아주 중요한 그림이긴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의 한 조각일 뿐이라네. 그림을 통해 '이 몸'을 영원히 남기려면 지금껏 지나온 다른 삶들도 미리 알아야 하지 않겠나."

마우라가 계단을 향해 돌아서자 그 위를 덮고 있던 그림자가 검은 조류처럼 부드럽게 물러났다. 이 거대한 저택에서 방금 자신의 아버지와 괴물 같은 스승을 살해했다고 인정한 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떠올랐다. 마우라는 마른 입술에 침을 발랐다.

"지금 망설이는 건가? 그대는 이곳까지 왔다. 그리고 난 이미 내 영혼의 많은 부분을 그대에게 드러냈지."

마우라는 그가 자신이 계단을 올라가도록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만으로 이곳을 떠나 친구들에게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두려운 만큼,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의 관심과 시선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짜릿했다.

"이리 오도록." 그는 말을 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도록 해. 그래도 부담스러워 떠나고자 한다면 막지 않겠다."

"아니요." 마우라가 말했다. "모든 걸 알고 싶어요."
중간층에 있는 아치형 통로는 검은 석재로 지어진 넓은 복도로 이어졌다. 심장이 멎을 정도로 추운 곳이었다. 검은 벽에는 옻칠이 된 목판이 줄줄이 고정되어 있었다.

목판에는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 수천 마리가 박제되어 있었다.

슬픔이 마우라를 스쳤다. "이게 뭐죠?"

"내 수집품 중 하나지." 블라디미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 동시에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듯했다.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따라 마우라를 앞으로 이끌었다.

"왜 나비를 죽인 건가요?"

"연구하기 위해서지. 왜겠나? 나비의 생은 아주 짧지. 그 생을 조금 더 빨리 끝낸다고 해도 아쉬울 건 없어."

"나비도 같은 생각일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 죽음으로 얻은 결실을 보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대가 정원에서 본 나비들. 그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내가 빚어냈기 때문이지. 내 뜻과 지식으로 종 자체를 창조한 것이라네."

"그게 어떻게 가능하죠?"

"나는 신들처럼 어느 것을 죽이고 살릴지 선택할 수 있으니까."

마우라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나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커다란 날개 부분에 선명한 진홍색 원들이 그려진 나비였다. 마우라의 손가락이 나비의 몸체에 닿자 날개가 산산조각이 나더니 나머지 몸체도 아주 오래되어 벗겨지는 칠감처럼 바스러졌다.

차가운 바람이 살랑이며 마우라를 지나쳤다. 고정된 표본들이 폭포가 휩쓰는 것처럼 차례로 바스러지자 놀란 마우라는 뒤로 물러섰다. 수십, 수백 마리의 나비가 바스러져 땔감을 쌓은 모닥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씨와 재처럼 공중에 흩날렸다. 마우라는 얼굴에서 가루를 털어 내기 위해 미친 듯이 손을 흔들고 비명을 지르며 내달렸다. 가루가 옷 안으로 들어가자 따가웠다. 입에서 곤충의 잔해가 느껴져 침을 뱉었다. 귓속에도 가루가 들어간 것 같았다.

소리와 빛이 달라진 것을 느낀 마우라는 멈춰서 눈을 떴다. 얼굴에서 가루를 털어내자 넓고 둥근 방이 눈에 들어왔다.

마우라는 얼굴과 옷에 남은 가루를 털어내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평정을 되찾았다. 방의 벽은 원시적으로 잘린 돌로 지어져 있었다. 마우라는 자신이 그 오래된 탑 아래에 서 있을 것으로 추측했다. 울퉁불퉁한 계단이 안쪽 벽을 따라 나선형으로 휘감겨 올라갔고 높은 곳 어딘가에서는 이상한 붉은빛이 아른거리는 막이 되어 내리비쳤다. 공기는 마치 제국의 갑옷과 무기를 쉴새 없이 만들어내는 대규모 대장간에서 불어오는 듯한 뜨거운 금속 맛이 났다.

둥근 벽에는 초상화들이 걸려 있었다. 마우라는 화랑을 조심스럽게 돌며 차례대로 그림을 살펴보았다. 투박한 추상화부터 캔버스에 진짜 얼굴을 가두기라도 한 듯한 사실적인 표현까지, 구성이나 양식이 비슷한 게 하나도 없었다. 마우라는 그중 일부가 몇 세기 전에 활동했던 대가들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아봤다.

현관에 걸린 그림 속 젊은 남자는 아주 다양한 나이대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

한 그림에는 중년에 들어선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여전히 강건하고 활기 넘치지만 눈에서 씁쓸함이 엿보였다. 또 다른 그림은 대상이 살아 있는 동안 그린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늙고 피폐한 남자의 초상화였다. 또 다른 그림에는 거대한 상아색 석상 앞에 대전투 후 피투성이가 된 그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전부 당신일 수가 있죠?" 마우라가 물었다.

붉은빛의 장막을 타고 대답이 들려왔다.

"난 그대와 다르다. 주군의 피에 흐르던 능력이 날 영원히 바꾸어 놓았지. 내 말을 이해한 줄 알았는데?"

"이해했어요. 아니, 이해한 것 같아요."

"네 주변에 있는 그림들은 내 수많은 삶의 순간들이다. 전부는 아니어도 대부분의 위대한 순간을 장인들이 그려냈지. 처음에는 내 모든 행위를 기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난 오만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요?" 그가 말을 잇지 않자 마우라가 물었다.

"이제 난 세상의 전환점이 되는 사건 속에서 내 삶이 새롭게 부활하는 순간만을 화폭에 새기고 있다. 계단을 올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확인해 봐."

마우라는 자신이 화랑을 한 바퀴 돌아 계단 앞에 도착한 것을 깨달았다. 마치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우라를 이곳으로 인도한 것 같았다. 오늘 밤뿐만 아니라 마우라가 크렉소르에 있는 어머니의 농장에서 처음 붓을 들고 동물을 그렸던 때부터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말이다.

"왜 저였나요?" 마우라가 물었다. "왜 저를 부르신 거죠? 녹서스에는 저보다 나은 예술가도 많잖아요."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울렸다.

"참으로 겸손하군. 그래, 그대보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이들이 있는 건 사실이지. 질투심이 많은 타흐보는 그대가 결코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의 원근감을 타고났다. 세리스는 색을 사용하는 방식이 뛰어나고, 절제심이 강한 주르카는 섬세한 눈으로 작품에 끝없는 매력을 더하지. 취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콘라드는 예외지만 말이야. 그대도 알고 있지 않은가."

"제 친구들을 아시나요?"

"물론. 내가 별 뜻 없이 그대를 선택했을 거라 생각하나?"

"모르겠어요. 어떤 이유로 저를 선택하신 거죠?"

"그런 변화의 순간을 담으려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는 자가 필요했지. 예술가라는 이름에 진정으로 어울리는 자가 말이야. 그래서 이곳에 있는 거다, 마우라 베체니아. 그대의 모든 붓놀림에 생각이 담겨 있고 화폭에 남기는 모든 흔적, 쓰는 색 하나하나마다 의미가 있어. 그림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것이 표현하는 생명의 힘을 담아내기 위해 기꺼이 영혼을 바쳐 헌신하지."

마우라는 전에도 후원자들이 치켜세우는 말과 동료 화가들의 말뿐인 칭찬을 들어 봤지만, 블라디미르의 말은 전적으로 진심이었다. 단어 하나하나에 진심이 담긴 블라디미르의 말에 마우라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왜 지금이죠? 이 순간의 무엇이 그렇게 특별하길래 초상화를 그리시려는 건가요? 아까 그러셨죠? 세상사의 전환점에서만 그림을 그리신다고…"

블라디미르가 말하자 그의 목소리가 마우라의 주변을 휘감는 듯했다.

"그런 순간이 다가왔으니까. 난 정말 오랫동안 이곳에 살았다, 마우라. 철의 망령을 불멸의 요새에서 몰아낼 만큼, 그를 뒤이은 통치자들이 힘을 얻기 위해 형제의 시체를 짓밟고, 나아가 배반자들의 야망으로 몰락하는 것을 수없이 봤을 만큼 오랫동안. 오래되고 부패한 땅에 깊게 뿌리내린 한밤의 꽃처럼 제국의 중심에 도사리는 병폐를 알 만큼 오랫동안 말이야. 그녀와 난 함께 춤을 췄지. 그래, 우리는 수 세기 동안 피의 춤을 췄지만 이제 음악의 박자가 바뀌고 춤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내가 함께 걸어가고 있는 어리석은 이들의 행렬, 이 삶은… 앞으로 다가올 일에 어울리지 않아."

"이해가 안 돼요. 앞으로 뭐가 다가오는 거죠?"

"예전이었다면 그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확실한 건 그것을 맞이하기 위해선 내가 변해야 한다는 것뿐이야. 난 너무 오랫동안 소극적이었고 아첨꾼과 간악한 자들이 매번 내 변덕에 비위를 맞추도록 내버려 뒀다. 하지만 이제는 내 것을 차지할 준비가 되었지. 아주 오랫동안 날 부정해 온, 나의 왕국을 말이야. 이것은 불멸이다, 마우라. 나와 그대의."

"불멸…?"

"그렇다. 전사와 예술가는 자신의 위업과 작품을 통해서 영원히 기억되지 않던가? 그들의 대업이 남긴 유산은 필멸자들의 짧은 생을 넘어 이어지지. 데마시아는 그들이 절대적으로 고수하는 군사적 신념에 따라 데마시아를 세운 전사들을 기리고 있다. 수천 년 전에 완성된 위대한 극작품은 아직도 상연되고 룬 전쟁 이전에 대리석 덩어리에서 탄생한 조각품은 그것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찬사를 받지."

마우라는 계단을 올라가면 무언가 되돌릴 수 없는, 마지막 결정을 내리게 된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얼마나 많은 예술가가 서 있었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첫 번째 계단에 발을 올려놓았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다시 내려왔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뒤로 돌아 걸어 나갔을까?

마우라는 떠날 수도 있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블라디미르는 마우라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마우라가 떠나고자 한다면 무사히 화실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용기가 부족해 일생일대의 역작을 그릴 단 한 번의 기회를 놓친다면 죽는 날까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마우라." 블라디미르가 말했다. 이번에는 그의 비단결 같은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려왔다.

마우라가 고개를 들자 그곳에 블라디미르가 있었다.

위에서 내리비치는 붉은빛을 등진 그의 모습은 늘씬하고 호리호리했다. 하얀 머리가 그의 뒤에서 물결쳤고, 진홍색 날개를 지닌 나비 떼가 위쪽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때 선명한 푸른색을 띠었던 그의 눈은 이제 붉게 이글거렸다.

그 눈은 마우라의 심장박동에 맞춰 고동쳤다.

블라디미르는 마우라에게 손을 뻗었다. 반짝이는 갈고리처럼 긴 손톱을 지닌 그의 늘씬한 손가락은 끝으로 갈수록 우아하게 가늘어졌다.

"그럼 불멸의 유산을 남기겠나?" 블라디미르가 물었다.

"네." 마우라가 말했다. "그럴게요."

마우라는 그의 손을 잡았다. 둘은 함께 진홍빛 장막 속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3.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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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가 겨우 잠이 들었을 때, 빛이 보였다.

고아원에서 보낸 첫 밤은 이상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낯설면서도 동시에 익숙했다. 삶은 리비아로부터 신뢰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앗아 갔지만, 안전한 지붕 아래로 들어오니 긴장이 풀어졌다. 비록 침대는 좁아도 수도의 차가운 자갈밭보다는 훨씬 나았다. 따뜻하고 편안한 잠자리 속에서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그대로 잠들면 푹 쉴 수 있을 듯했다.

그때 문이 열렸다.

"일어나렴." 고아원장 신의 목소리였다. "가자."

다시 길거리로 나앉게 될까 두려웠지만, 리비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차가운 바닥에 발을 디디며 불 켜진 복도로 나갔다.

리비아는 눈을 껌뻑이면서 다른 아이들 옆에 섰다. 전부 오늘 고아원에 들어온 녹서스 거리의 부랑아들로 적게는 여덟 살, 많게는 열 살쯤 되어 보였다. 두 형제와 서로 손을 맞잡은 세 소년은 낯설어서인지 리비아에게서 멀어졌다.

아이들을 지나쳐 걸으며 신이 말했다. "늦은 시간이지만, 후원자님께서 오셔서 어쩔 수 없단다. 새로 온 아이들에게 인사하고 싶다고 하셨거든." 리비아는 신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광스러운 일이야."

그때 갑자기 느껴진 인기척에 아이들은 깜짝 놀랐다. 언제 나타났는지,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체형의 후원자는 생전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신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섰다.

남자는 차가운 눈으로 아이들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두 형제는 마음에 안 차는지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지나쳤다. 자신의 차례가 되자 리비아는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똘똘 뭉쳐 선 채로 경계하는 세 부랑아에게는 눈길을 주는 둥 마는 둥 했다.

"저 소녀로 하지." 남자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신에게 말했다.
신은 리비아의 어깨를 팔로 감싸고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안에는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겁내지 말거라." 신이 떨고 있는 리비아에게 말하며 문을 닫았다.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이야."

리비아는 의자에 앉아 유일한 출입구인 문을 바라봤다. 잠시 후, 문 뒤에서 그림자가 길게 뻗어 나왔다.

후원자였다.

리비아가 벌떡 일어나자 후원자가 말했다. "앉아 있으렴."

신이 했던 말을 기억하며, 리비아는 최대한 두려움을 억눌렀다.

"내가 해코지라도 할 것 같니?" 남자는 세련된 억양으로 느릿느릿하게 물었다.

리비아는 확신이 없었지만, 남자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후원자는 짐짓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얘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그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걸으며 덧붙였다. "걱정하지 마.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왔단다."

후원자가 의자를 가리키자, 리비아는 다시 앉은 다음 입을 열었다.

"전 드레칸에서 왔어요."

"그래?" 남자는 계속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전쟁 중에 돌아가셨어요." 리비아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런 다음 도시에 왔어요. 엄마는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셨는데, 나흘이 지나도 안 돌아오셨어요. 남은 건 저와 바이라뿐이었어요."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려 했지만, 리비아의 목소리는 흔들렸다. "그러다가 바이라도 아팠어요. 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죠. 결국..."

"혼자가 되었구나."

리비아는 가슴이 답답했다. 이별의 고통이 다시 몰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맞아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그거야!" 남자가 손을 뻗으며 나직이 말하자 리비아는 흠칫했다.

마치 홀린 듯이 그는 말을 이었다. "눈을 감고 그 감정, 그 '고통'에 집중해. 이 험악한 세상을 살며 네 안에 쌓인 그 아픔이 차오르는 걸 느껴 봐. 너를 집어삼키려고 하겠지.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다시 가라앉을 거야. 굴복하지 않고 맞서면, 그 고통은 네 안에서 빠져나가지. '그게' 바로 네 힘이야."

리비아는 훌쩍이면서 고통이 몸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했다. 그때 양쪽 눈 아래에 유리의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한바탕 감정을 쏟아 내고 심호흡을 하고 나자, 고통은 사라지고 없었다.

리비아는 눈을 떴다.

"말해 줘서 고맙구나." 남자가 말했다. 양손에는 유리병을 들고 있었다.

"아저씨." 후원자에게서 익숙함을 느낀 리비아가 물었다. "아저씨도 혼자예요?"

유리병을 바라보던 남자가 리비아에게 시선을 옮기며 대답했다. "그래. 그간 참 많은 일을 겪었지만, 대부분 혼자였지."

리비아는 코를 훌쩍이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시간이 지나면 덜 괴로워지나요?"

"너 말이니?" 남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눈이 슬프게 빛났다. "아니."
"아이는 멀쩡한가요?" 신이 복도로 나오는 블라디미르에게 물었다.

"너도 저 자리에 앉아 봤으니 알겠지. 내가 널 해쳤던가?"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더니, 뭔가를 꺼내 보였다. 긴 손가락 사이에는 가느다란 병이 들려 있었다.

신의 시선이 병에 고정되었다. 유리가 반투명한 탓에 내용물이 연한 루비색으로 보였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며 유리병을 낚아채 소매 안으로 숨겼다.

"그럼 다음에 보자고." 그 모습에 블라디미르는 웃더니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하늘에 뜬 보름달이 녹서스 거리를 은빛으로 물들였다. 블라디미르는 고아원 마당에 덩그러니 자리 잡은 분수 앞에 서서 물에 손가락을 담갔다. 그러자 손가락에서 붉은색 소용돌이가 일더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얕게 고여 있던 물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붉은 심연으로 변했다. 블라디미르는 분수 위로 올라가 그 심연 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수면에는 조금의 일렁임도 없었다.
블라디미르는 어두운 저택의 다른 웅덩이에서 솟아났다. 몸이나 옷에는 물기 하나 없었다. 냉기가 저택 내부에 드리운 그림자와 석조 아치를 통과해, 덧문을 댄 창문과 영겁의 세월 동안 수집한 값진 예술품들을 훑고 지나갔다. 블라디미르는 두꺼운 양탄자 위로 걸어가더니, 계단을 올라 위층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어찌나 가벼운지 위에 쌓인 먼지조차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 순간 블라디미르는 리비아를 생각했다. 오늘은 확실히 특별했다. 하지만 소녀의 삶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것을 그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았다. 다른 인간들처럼 살다가 때가 되면 죽을 것이다. 소녀의 이름이나 얼굴, 그와 나누었던 대화는 언제나처럼 잊히리라. 결국은 그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 터였다.

블라디미르는 인간들 사이에서 살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있었다. 그들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덧없는 존재였다. 그는 눈물이 담긴 유리병을 만지작거리며 우울감에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다 블라디미르는 작업실로 향했다.

그는 감상에 젖었다. 블라디미르는 그동안 만났던 수많은 인간들 중 특별했던 소수의 인연을 잊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래전에 두 삶이 교차했던 그 짧은 시간을 기억하려고 했다. 지금 간직하려는 기억은 약 천 년 전에 만났던 인간의 것이었다. 마지막 만남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갑자기 그때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가 택한 방식은 그림이었다.

그림은 거의 완성되었다. 벽을 장식하고 있는 다른 걸작들에 못지않은 수준이었다. 실력을 닦을 시간은 블라디미르에게 충분했다. 세부 묘사는 모두 끝난 상태였다. 살짝 흐트러진 적갈색 머리와 그을린 피부, 평범한 이목구비까지 하나도 특별할 것이 없었지만, 전체적으로 위압적이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표정에는 끔찍한 상실을 겪은 아픔까지 담겨 있었다. 남은 부분은 눈의 흰자위뿐이었다.

블라디미르는 유리병을 열어 통에 부었다. 순결한 눈물이 물감과 섞였고, 붓을 적셔 캔버스에 옮기자 그림이 생기를 띠었다. 그조차도 지금껏 보지 못했던 멋진 색이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블라디미르는 기억하지 못했다. 마음이 아팠지만, 적어도 얼굴은 남겼다는 점에서 위안을 삼았다. 그림 속 눈의 흰자위가 기억을 지켜주리라.

'고독한 영혼과 같이 그는 먼 곳에서 나를 찾았네.' 블라디미르는 미소를 지으며 생각했다. 우울감이 더 깊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 세상에서 슬픔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기에.

4. 구 설정

4.1. 구 단문 배경

"네 몸에 흐르는 그것이 결국에는 내 몸에 흐르게 될 것이다." ~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는 필멸자의 피를 갈구하고 탐닉하는 인물로, 녹서스 제국의 건국 초기 이래로 녹서스의 여러 사건에 영향을 끼쳤다. 자신의 수명을 비정상적으로 늘린 블라디미르는 피를 제어하는 능력을 이용해 다른 이들의 정신과 육체를 제 것인 것처럼 쉽게 통제한다. 블라디미르는 녹서스 귀족의 화려한 살롱에서는 피를 제어하는 능력으로 소수에게 광적인 인기를 얻었지만, 어두운 뒷골목에서는 적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말려 버린다.

4.2. 구 배경

인적이 드문 산기슭에서 피가 완전히 빠져나가 말라비틀어진 시체를 목격한다면, 그처럼 기괴한 시신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면, 당신은 아마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러나 녹서스 출신의 블라디미르에게 그 끔찍한 시체들은 감탄과 호기심을 자아낼 뿐이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어릴 적부터 피와 시체에 대한 이유 모를 갈망을 품고 있던 그는 급기야 자기 또래의 소년 둘을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저 사람의 몸에서 붉은 피가 콸콸 뿜어져 나올 때의 환희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신의 첫 번째 살인 행위를 끝마친 블라디미르는 곧 깨달았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살인 충동을 결코 억제할 수 없으리란 사실을. 영민했던 그는 이대로 녹서스에서 살아가다간 언젠가 꼬리가 밟힐 것임을 직감하고 바로 다음 날 고향을 떠나 곧장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녹서스와 폭풍 평원 사이의 산기슭에 이르자 기괴한 풍경이 펼쳐졌다. 땅 위에 시체가 수없이 나뒹굴고 있었는데 한결같이 피가 몽땅 빠져나가 있었다. 그 끔찍한 풍경에 도리어 한껏 들뜬 채 시체들을 따라 걷던 블라디미르의 앞에, 숨겨진 사원이 나타났다. 폐허처럼 보이는 그 신비한 사원에서 그는 늙은 수도승 하나와 마주쳤다.
수도승은 붉게 빛나는 눈으로 블라디미르를 유심히 살펴보았고,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사악한 데에 놀랐다. 이 소년은 흐르는 피에 대한 선천적인 갈망을 타고난 것이다! 블라디미르의 위험한 욕망을 간파해낸 이 늙은이는 그에게 이 붉고 뜨거운 생명의 액체를 제어하고 조종하는 법을 가르쳐주기로 결심했다. 사원 앞을 멋모르고 지나다니는 수많은 여행객이 그들의 수업재료로 희생되었다.
시간이 흘러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수도승은 블라디미르에게 이번에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물론 블라디미르는 실패하지 않았고, 소름 끼치도록 놀라운 선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도승의 몸에서 빠져나온 피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블라디미르의 체내로 흡수되었던 것이다. 수도승 한 명의 마력뿐만 아니라 이전 전승자들의 힘의 정수까지 모두 담은 붉은 액체가 한 방울도 남김없이 블라디미르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아무 계획도 목적도 없이 홀로 남겨진 블라디미르는 불현듯 녹서스로 돌아가 자신의 우월한 힘을 선보이기로 결심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궁성 경비들의 끔찍한 죽음을 목격한 녹서스 사령부는 블라디미르의 사악한 능력을 후원하기로 결정한다.

4.3.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

후보: 블라디미르
날짜: CLE 20년 7월 27일

관찰

블라디미르가 등 뒤로 긴 머리카락과 로브 자락을 멋들어지게 휘날리며, 신속하게 목적지로 단호한 발걸음을 옮긴다. 반짝반짝 윤기 나는 부츠의 뒷굽이 대리석 복도에 부딪치는 소리가 전쟁 학회의 숨막힐 듯한 정적을 가르며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그가 은밀한 눈으로 저 앞의 돌로 된 거대한 문을 살핀다.

이 방문객의 위엄 있는 태도는 그저 번드르르한 겉모습에 숨은 본질을 간파하지 못할 멍청이들을 속여 넘기려는 방편일 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하며 사치스러운 옷차림, 잘 손질된 손톱 같은 귀족적인 외양은 전부 다 사기에 불과하다. 통찰력이 있는 자라면 가식적인 차림 따위에 속지 않을 터. 잔인한 생김새의 각진 얼굴형을 보나 손끝을 장식한 으리으리하지만 날카로운 보석으로 보나, 타고난 약탈자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문 앞에 다다르자 블라디미르는 잠시 멈춰 서서 이 순간을 음미한다. 그리고 변덕스럽고도 탐욕스런 눈길로, 정교하게 조각된 문의 장식을 감상한다. 대리석으로 된 아치를 지키고 있는 두 마리 표범의 유연한 몸매는 석공의 솜씨를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위에 새겨진 글귀는 이 곳이 목적지임을 웅변해 준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반들반들한 돌 문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데,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문이 양쪽으로 소리도 없이 스르르 열린다. 문 뒤편엔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 있다. 블라디미르는 얇은 입술을 혀로 한 번 쓱 축이고는 쏜살같이 안쪽으로 들어선다.

회고

블라디미르는 회고의 방 안, 침잠하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잠시 동안은 정적과 기대에 찬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리곤 속삭임이 들려왔다.

“블라디미르, 자네,”

어둠 속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의 주인을 단박에 알아채고는, 머리카락이 쭈뼛 곤두섰다. 어둠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키의 희끄무레한 사람 형체가 수수한 수도승의 로브를 걸치고 뚜벅뚜벅 걸어왔다. 잿빛 머리카락과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파리한 얼굴에서 짙은 선홍색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드미트리?”

블라디미르가 아연실색하여 물었다.

“하지만, 스승님은 돌아가셨잖습니까. 내가 분명히 죽였는데.”

희미한 형체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껄껄 웃어 제꼈다.

“난 죽지 않아, 블라디미르. 난 네 안에 있다.”

방금 한 말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수도승의 몸이 고운 붉은 색 연무로 녹아 흩어지며, 순식간에 주위가 피비린내로 가득 찼다. 블라디미르가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자, 따뜻한 증기가 반갑게 끌어안듯 그의 몸을 감쌌다.

힘겹게 몰아 쉬는 날카로운 숨소리에 블라디미르는 문득 몽상에서 깨어났다. 두 눈을 번쩍 뜨자 평화로운 숲 속 공터였다. 흥분한 심장이 마구 고동쳤다. 발치에는 난도질 당해 피에 흥건히 젖은 몸뚱어리 둘이 누워 있었다. 하나는 이미 움직임이 없었지만 하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너무 놀라서 자기 몸을 살펴봤다. 이제 갓 열다섯 소년으로 돌아간 그는 오른손에 사냥 칼을 단단히 틀어쥐고 있었는데, 손잡이를 너무 꽉 쥔 바람에 손바닥에 상처까지 나 있었다. 잘 차려 입은 옷은 여기저기 찢기고 시뻘건 피가 배어 있었다.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있는 기억의 한 장면. 주변에 널부러진 이들은 소꿉친구들, 그가 최초로 살해한 녀석들이었다.

난도질 당한 몸뚱어리가 그를 향해 기어오며 슬픔과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그 표정은 혐오감으로 변했다. 녀석이 한 손을 쑥 내밀어 블라디미르의 부츠를 붙잡았다. 블라디미르는 튕기듯 몸을 움츠리며 죽어가는 아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가 비명이라도 지르려는 듯 입을 벌렸지만, 그 입에서는 아무 말도 흘러나오지 못하고 대신 피가 솟구쳐 나와 흙바닥에 쏟아졌다. 아이는 살인자를 지목하려는 듯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블라디미르의 손에서 힘없이 칼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다시금 어둠이 그를 감쌌다.

이제 그는 산길 아래, 거대한 구조물의 그림자 속에 서 있었다. 앞쪽에는 백랍처럼 핏기가 가셔버린 시체가 꼬챙이 위에 걸쳐져 있고, 밑에는 원시적인 도구로 바위를 파내 만든 피를 받는 주발이 놓여 있었다. 블라디미르는 위를 올려다보며 풍상에 거칠어진 얼굴 위로 한 손을 들어 햇빛을 가렸다. 저 앞쪽 산길엔 비슷한 시신 여남은 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누워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맥박이 점차 빨라지는 감각이 그를 덮쳤다. 원초적 두려움마저 압도하는 황홀경에 취해, 블라디미르는 이끌리듯 계단을 올랐다.

피가 죄다 빨려나간 시체들을 따라 고대의 건물 안 복도를 헤맬수록 흥분감은 점점 고조됐다. 그러던 그의 발길이 드디어 대회랑 앞에 멈춰 섰다. 온 몸의 감각은 생명의 근원인 피가 흘러나와 밑에 고인 시신들에 쏠렸다. 이 소름 끼치는 현장에, 흰 머리를 뒤로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로브를 걸친 수도승이 서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시뻘겋게 핏발 선 두 눈이 살기등등하게 빛나는 수도승은 인정사정 없는 표정으로 희열에 들뜬 방랑자를 손짓해 불렀다.

블라디미르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최면에 빠진 듯 눈 앞의 남자에게 시선을 못박힌 채 이끌려갔다. 수도승 역시 신기한 듯 그를 응시했다.

“두렵지 않느냐, 꼬마?”

그가 흥미로워하며 물었다. 블라디미르는 아무 말도 못하며, 남자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네가 어떤 녀석인 지 알겠구나,”

수도승이 말을 이었다.

“넌 선구자란다, 아가야. 피를 취하러 온 진홍빛 사신이지.”

수도승은 음산하게 미소 짓더니, 큰 소리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이 뭐냐, 꼬마?”

“블라디미르라고 해요.”

소년이 얼떨떨해서 더듬더듬 대답했다.

“넌 이제부터 내가 가르쳐야겠구나, 블라디미르.”

나이 지긋한 수도승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날 실망시키지 말거라.”

블라디미르가 스승의 눈 속을 깊이 응시했다. 그 안에서 엿본 광경에 온 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 했다. 이 남성을 자신이 살해했다. 그리고 그의 피를 마셨다. 드미트리가 스스로 자청한 일이었고, 만약 거절한다면 목숨을 뺏겠다고 협박까지 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둘러싼 방 안이 다시 한 번 깜깜해지며, 또다시 스승의 유령과 단둘만이 남았다. 드미트리는 팔짱을 끼며 기대하는 듯 물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서요.”

블라디미르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눈 앞의 유령이 어리둥절해 하며 미소를 지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유령이 거듭해 물었다.

“내 고향 녹서스의 영광을 위해 싸우기 위해서요.”

블라디미르가 조금 주저하며 대답했다.

드미트리는 더 이상 재미있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불쾌한 듯 보였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 블라디미르?”

그가 다시 한 번 물었다.

블라디미르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이번에는 천천히 다시 대답했다.

“난 피를 원해.”

늙은 수도승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또 물었다.

“속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니 기분이 어떤가?”

블라디미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쏘아붙였다.

“흥, 자유로워진 기분이군.”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등 뒤의 문이 활짝 열리며 환한 빛이 그를 감쌌다. 블라디미르는 홀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