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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7:23:49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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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2세 조지 3세 조지 4세 윌리엄 4세
안스바흐의 카롤리네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작센마이닝겐의 아델하이트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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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6D9C2><colcolor=#000000> 영국 조지 4세의 왕비
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Caroline von Braunschweig
파일:Dupont_-_Caroline_of_Brunswick_Princess_of_Wales.jpg
이름 독일어 카롤리네 아말리 엘리자베트
(Caroline Amalie Elisabeth)
영어 캐롤라인 아멜리아 엘리자베스
(Caroline Amelia Elizabeth)
출생 1768년 5월 17일
신성 로마 제국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브라운슈바이크
사망 1821년 8월 7일 (향년 53세)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미들섹스 해머스미스
장례식 1821년 8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배우자 조지 4세 (1795년 결혼)
자녀 샬럿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어머니 영국의 오거스타 공주
형제 아우구스테,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게오르크 빌헬름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투스,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멜리
서명
파일:브라운슈바이크의 카롤리네 서명.svg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유년기3.2. 결혼3.3. 별거3.4. 망명 생활3.5. 왕비와 재판3.6.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clearfix]

1. 개요

영국의 국왕 조지 4세의 왕비.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캐롤라인이라고도 불린다.

2. 작위

파일:Coat_of_Arms_of_Caroline_of_Brunswick.svg.png
문장

3. 생애

3.1. 유년기

파일:Duke_Karl_Wilhelm_Ferdinand_of_Brunswick-Wolfenbuettel.jpg
아버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1768년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조지 3세의 누나 오거스타 공주의 차녀로 태어났다.

캐롤라인은 활동적이고 장난스러운 성격에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는 딸을 좋은 집안에 시집보낼 수 있을 정도만 교육시켰다. 캐롤라인은 음악을 배웠으며 프랑스어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3.2. 결혼

파일:George_prince_of_Wales_and_Caroline_of_Brunswick_wedding.jpg
웨일스 공 조지와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의 결혼식
1794년에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촌 웨일스 공 조지와 약혼했다. 당시 탕아로 유명했던 웨일스 공은 많은 빚을 지고 있었는데, 영국 왕실은 적절한 신붓감을 맞이하는 조건으로 그의 빚을 탕감해주기로 했다. 웨일스 공은 이에 동의했고 영국 국왕의 조카에 프로이센 왕실과도 친척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이 웨일스 공비로 낙점되었다. 1795년 4월 5일에 캐롤라인은 맘즈베리 백작의 안내를 받아 영국에 도착했다.

1795년 4월 8일에 웨일스 공과 캐롤라인은 세인트 제임스 궁전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두 사람의 궁합은 최악이었다. 웨일스 공은 결혼식 날 내내 브랜디를 마시며 신부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불평했다. 캐롤라인은 남편이 초상화에서 본 것처럼 잘생기지 않았으며 뚱뚱하다고 조롱했다. 캐롤라인의 수석 시녀로는 저지 백작부인 프랜시스 빌리어스가 임명되었다. 그녀는 웨일스 공의 정부였으며 캐롤라인이 궁중에서 지내는 동안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결혼식 이후로 두 사람은 거의 부부로 생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캐롤라인은 기적적으로 임신해 1796년에 딸 샬럿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났음에도 조지는 캐롤라인을 아내로 대하지 않고 그녀가 딸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마리아 피츠허버트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주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피츠허버트는 조지가 캐롤라인 이전에 몰래 결혼한 여인으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캐롤라인은 아이를 낳고 조지와 사실상 별거 상태에 들어갔다. 그녀는 계속해서 자신의 아이를 보려고 노력했지만 거절당했다. 분통이 터진 캐롤라인은 친정에 시댁을 욕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캐롤라인은 왕실의 빈축을 샀다. 한편 국민들 사이에서는 웨일스 공이 일부러 편지 내용을 유출시켰다는 소문이 퍼졌다.

영국의 대중들은 캐롤라인을 동정했다. 웨일스 공은 품행이 나쁘고 사치스러워 일찍이 인기가 없었다. 반면 캐롤라인은 털털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인기를 끌었다. 게다가 멀리서 시집온 여성이 남편에게 박대당하며 자신의 딸조차 잘 만나지 못한다는 상황은 대중의 눈에 캐롤라인을 가련한 여인으로 비추기 충분했다. 웨일스 공은 자신과 달리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아내를 불편해했고, 헤어지고 싶어했다.

3.3. 별거

1797년부터 캐롤라인은 궁을 나와 런던의 개인 거주지에서 생활했다. 이때부터 캐롤라인이 여러 남자와 사귀고 있다는 풍문이 돌기 시작했다. 당시 샬럿은 블랙히스의 저택에서 가정교사의 보호 아래 살고 있었다. 딸의 가까이에서 지내고 싶었던 캐롤라인은 블랙히스의 몬태규 하우스에서 거주했다. 그리고 몇명의 고아들을 거두어 키웠다. 1805년, 이웃에 살던 더글라스 부부가 캐롤라인이 사생아를 낳았으며 자신들을 괴롭혔다고 고발하면서 평온한 생활은 깨지게 되었다.

1806년에 캐롤라인의 부정을 조사하기 위한 비밀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더글라스 부인은 캐롤라인이 여러 남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으며 1802년에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1802년에 캐롤라인이 데려다 키운 윌리엄 오스틴이라는 아이로 밝혀졌다. 윌리엄의 어머니인 소피아 어거스틴은 위원회에 자신이 아이의 어머니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아이는 캐롤라인이 낳은 게 아니어도 바람을 피우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다고 하며 조사를 계속했다.

조사 중에 캐롤라인은 샬럿을 만나지 못했으며 악질적인 소문에 시달려야 했다. 정신적으로 지친 캐롤라인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1806년 예나 전투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프랑스가 고향을 공격하면서 되려 가족들이 영국으로 피난을 오게 되었다.

1811년 조지 3세의 정신질환이 심해지면서 웨일스 공이 섭정이 되었다. 권력을 잡은 웨일스 공은 캐롤라인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국가 행사에도 참석시키지 않았다. 대중들은 곤경에 빠진 캐롤라인을 지지했다. 캐롤라인은 웨일스 공이 섭정이 된 후 사이가 멀어진 휘그당 인사들과 손을 잡으며 남편의 압박에 대응했다.

그럼에도 영국에서의 생활은 점점 힘들어져 갔다. 1814년, 캐롤라인은 연금을 받는 조건으로 영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3.4. 망명 생활

파일:The_Long_and_Short_of_the_Tale_by_George_Cruikshank.jpg
파일:Modesty_1821.jpg
캐롤라인과 페르가미를 묘사한 풍자화

고향으로 돌아간 후 캐롤라인은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이때 바르톨로메오 페르가미라는 남자 시종을 들이게 되었다. 페르가미는 여행을 하는 동안 캐롤라인의 생활을 책임졌으며 캐롤라인은 그에게 의지했다. 그리고 캐롤라인과 페르가미가 연인 사이라는 소문이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웨일스 공은 캐롤라인과 이혼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간통의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1817년에 캐롤라인은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레오폴트 공자와 결혼한 샬럿이 아이를 낳다가 사망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는 캐롤라인에게 있어 유일한 자식의 죽음인 동시에 왕위계승자의 어머니로써의 지위 상실을 의미했다. 웨일스 공이 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뒤늦게 딸의 죽음을 알게 된 캐롤라인은 충격으로 혼절하였다.

1819년에 캐롤라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1820년 1월, 웨일스 공 조지는 조지 4세로 즉위했다. 법적으로 왕비가 된 캐롤라인은 영국으로 돌아갈 게획을 세웠다.

3.5. 왕비와 재판

파일:Head_and_Brains.jpg
대관식 이전에 어떻게든 캐롤라인을 치우려는 조지 4세를 풍자한 그림

조지 4세는 캐롤라인을 왕비로 세우고 싶지 않았기에 이혼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나 안 그래도 인기가 없는 새로운 왕이 즉위 후 바로 대중의 동정을 받고있는 왕비와 이혼하는 것은 무리수였다. 고민하던 의회는 캐롤라인에게 연금을 올려주는 대신 계속 해외에서 체류할 것을 제안했다. 캐롤라인은 제안을 거절하고 1820년 6월에 영국에 돌아왔다.

조지 4세는 굴하지 않고 아내의 간통을 사유로 대며 이혼승인안을 제출했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캐롤라인의 왕비 자격을 박탈하는 법안을 발안했다. 캐롤라인은 법안의 증인으로 재판에 출두하게 되었다. 그녀는 혐의를 부정하며 공정한 재판을 요구했다. 1820년 8월에 재판이 시작되었다. 캐롤라인은 페르가미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그간의 생활에 대한 심문을 받게 되었다.[1]

재판은 굉장한 화제가 되었으며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캐롤라인은 국왕의 반대파를 중심으로 영국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왕비의 무죄를 위한 증인을 자처했다. 결국 세간의 시선을 의식한 의회가 법안을 폐기하면서 캐롤라인은 왕비의 신분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파일:The_Trial_of_Queen_Caroline_1820_by_Sir_George_Hayter.jpg
캐롤라인 왕비의 재판, 1820년

우여곡절 끝에 캐롤라인은 영국의 왕비 지위를 유지했으나, 그녀를 아내 취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조지 4세는 여전히 그녀를 냉대했다. 그리고 신하를 통해 대관식에 참석하지 말 것을 전달했다. 그럼에도 캐롤라인은 대관식이 거행되는 1821년 7월 19일에 식장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캐롤라인은 사원 입구에서 명령을 받은 근위병의 저지를 받게 되었다. 어떻게든 안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이를 목격한 사람들의 조소를 받았다.

3.6. 말년

파일:Queen Caroline of Brunswick.jpg
말년의 캐롤라인

대관식 날의 망신 이후 캐롤라인은 몇 주 동안 앓았다. 캐롤라인은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하고 유언장을 작성했다. 1821년 8월 7일, 53세의 나이에 시녀이자 친구인 앤 해밀턴의 곁에서 숨을 거두었다. 캐롤라인의 유해는 고향 브라운슈바이크로 옮겨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브라운슈바이크의 캐롤라인
(Caroline of Brunswick)
<colbgcolor=#fff3e4,#331c0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Charles William Ferdinand,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colbgcolor=#ffffe4,#323300>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1세
(Charles I,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베베른 공작
페르디난트 알베르트 1세
(Ferdinand Albert I,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Bevern)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안토이네테 여공작
(Duchess Antoinette of Brunswick-Wolfenbüttel)
프로이센의 필리피네 샤를로트 공주
(Princess Philippine Charlott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Frederick William I)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
(Princess Sophia Dorothea of Hanover)
영국의 오거스타 공주
(Princess Augusta of Great Britain)
웨일스 공 프레더릭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조지 2세
(George II)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작센고타의 아우구스타
(Princess Augusta of Saxe-Gotha-Altenburg)
작센고타알텐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Frederick II, Duke of Saxe-Gotha-Altenburg)
안할트체르프스트의 막달레나 아우구스타 공녀
(Princess Magdalena Augusta of Anhalt-Zerbst)

4.2. 자녀

파일:Princess_Charlotte_of_Wales_by_Dawe_(1817).jpg
딸 샬럿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웨일스의 샬럿 공녀
(Princess Charlotte of Wales)
1796년 1월 7일 1817년 11월 6일 레오폴드 1세


[1] 재판 도중 캐롤라인은 자기가 간통을 한 번 한 적이 있긴 한데 상대는 마리아 피츠허버트 부인의 남편, 즉, 조지 4세라는 대범한 농담을 했다. 조지 4세는 법적으로만 남편일 뿐 자신을 아내 취급도 하지 않으며 정부 마리아를 아내로 여기는 판국이니 간통을 저지른 건 오히려 국왕 조지 4세라는 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