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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3 17:48:15

뷜렌트 에제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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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르키예 공화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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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 튀르키예 공화국 제16대 총리
무스타파 뷜렌트 에제비트
Mustafa Bülent Ecevit
파일:nOfHCqCac35ZQaz5lCiPq9rW4fJkLiuB-body.jpg
출생 1925년 5월 28일
튀르키예 이스탄불
사망 2006년 11월 5일 (향년 81세)
튀르키예 이스탄불
재임기간 제16대 총리
1차 1974년 1월 26일 ~ 1974년 11월 17일
2차 1977년 6월 21일 ~ 1977년 7월 21일
3차 1978년 1월 5일 ~ 1979년 11월 12일
4차 1999년 1월 11일 ~ 2002년 11월 18일
당적
[[공화인민당|]] (1943~1980)
[[민주좌파당(튀르키예)|
민주좌파당
]] (1985~2006)
학력 앙카라 대학교 (법학 / 중퇴)
종교 이슬람교
배우자 라흐샨 에제비트 (결혼:1946)
경력 대국민의회의원(1957~1980 / 1991~2002)
노동장관 (1961~1965)
공화인민당 대표 (1972~1980)
민주좌파당 대표 (1987~1988 / 1989~2004)
부총리 (1997~1999)
총리 (1974 / 1977 / 1978~1979 / 1999~2002)

1. 개요2. 생애
2.1. 정계 입문2.2. 이뇌뉘와의 싸움, 공화인민당 대표2.3. 케난 에브렌의 쿠데타와 정치 활동 금지2.4. 정치적 재기, 민주좌파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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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튀르키예의 작가, 언론인이자 정치인으로 제16대 총리를 지냈다. 2024년을 기준으로 정의개발당 출신이 아닌 마지막 총리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1950년부터 공화인민당 기관지 역할을 했던 울루스(Ulus) 신문에서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 정계와 가까워진 에제비트는 결국 1954년 공화인민당에 입당해 청년위원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민주당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의 언론 탄압 정책에 의해 울루스 신문이 정간 조치되자 부총리를 역임한 바 있던 니하트 에림[1]이 대안으로 만든 개인 언론사의 편집자 활동을 하다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언론사에서 1955년 잠시 객원 기자 생활을 하게되는데 당시 남부 백인들의 심각한 인종차별을 직접 접하고는 이에 반대하는 기고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때 미국과 맺은 인연을 바탕으로 1957년에는 국무부 장학금을 통해 하버드 대학교에 8개월간 유학하며 올로프 팔메, 버트런드 러셀 등과 교유했고, 헨리 키신저의 국제 세미나에 참석하기도 했다.

이후 귀국하여 맞이한 1957년 총선, 처음으로 앙카라 선거구에서 당선되어 대국민의회의원이 되어 선출직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이스메트 이뇌뉘 전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공화인민당은 민주당의 야당 탄압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고난의 야당 시절을 겪고 있던 에제비트의 정치 행보가 풀리기 시작한건 1960년부터였다. 멘데레스 총리가 이뇌뉘 전 대통령과 군부를 묶어 숙청 및 탄압을 시도하자 대중의 반정부 시위가 거세졌고, 이 틈을 노려 세속주의 성향 소장파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멘데레스의 민주당 정권을 전복시켜버린 것.

소장파 군부의 요청을 받아 제말 귀르셀이 대통령직에 올랐고, 귀르셀은 신헌법 제정을 위한 제헌회의를 소집했는데 여기 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고 케말주의, 인권, 3권분립, 양원제 및 대통령에게 무소속 강제를 명문화한 신헌법은 1961년 7월 국민투표를 통해 가결되었다.

1961년, 신헌법 제정 이후 치러진 총선에서 공화인민당이 승리하면서 이뇌뉘 전 대통령이 다시 총리 자리에 올랐고, 노동장관으로 발탁되어 1965년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때 에제비트 장관은 단체협약, 파업 및 직장폐쇄법을 제정해 노동운동권을 보장하고 사회보장권 확대에도 노력하며 지명도를 높였다. 하지만 1965년 총선에서 이뇌뉘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공화인민당이 쉴레이만 데미렐이 이끄는 정의당에 패하면서 정권을 내주자 장관 자리에서 내려와야 했다.

이후 공화인민당을 단순히 케말주의 정당에서 벗어나 중도좌파 정당으로 개혁하려던 이뇌뉘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43세의 나이로 당 사무총장직에 올라 각 지역을 일일이 방문하면서 당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에제비트는 이때 공화인민당을 중도좌파 정당으로 개혁하고 극좌와 대항하는 벽을 쌓고, 데미렐이 이끄는 정의당이 중도우파 정당으로 자리잡아 극우의 성장을 막는 방파제가 된다면 터키의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뇌뉘의 지지로 에제비트가 주도하는 좌클릭 노선에 대해 당내 반발이 적지 않아서 1967년 투르한 페이지올루가 이끄는 당내 우파가 분당을 선택해 공화신뢰당(CGP)으로 갈라져 나가기도 했다. 물론 이뇌뉘의 지지가 이때까지 견고했기 때문에 에제비트는 꺾이지 않고 사회민주주의 및 농촌 개발 노선을 추진해나갔다.

2.2. 이뇌뉘와의 싸움, 공화인민당 대표

하지만 1971년, 에제비트는 자신을 견실하게 지지해주던 종신 대표 이뇌뉘와 싸우게 된다. 에제비트의 기대와 달리 좌우파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대학 캠퍼스에서 학생들끼리 정치 갈등으로 서로 총격을 가하는 사태까지 벌어지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군부가 다시 정치에 개입한 것이 그 분기점.

1971년 3월 9일, 군사 쿠데타 시도가 제압되긴 했지만 터키군 명의로 3일 뒤인 12일 군부는 3대 요구사항을 주장하며 데미렐 총리의 사임과 과도내각 구성을 요청했다. 만약 이를 거부한다면 군사 반란을 막을 수 없다는 경고는 덤. 이뇌뉘는 군부를 지지했지만 에제비트는 민주적 통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외치며 사무총장 직에서 사임한 뒤 공개적으로 이뇌뉘와의 권력 투쟁에 나섰다.

1972년 5월 당 임시총회에서 이뇌뉘는 자신에 대한 신임투표를 주장하며 "내가 아니면 뷜렌트 중 하나를 선택해라!"라고 일갈했지만, 신임투표 결과 이뇌뉘가 에제비트에게 충격적으로 패하면서 종신대표직에서 사임했다. 이뇌뉘는 결국 공화인민당 역사상 최초로 당 내 투표로 자리를 잃은 대표가 되었고, 당수직은 에제비트에게 넘어갔다.

1973년, 정의당의 데미렐 대표와 면담해 군인 대통령 선출의 역사를 끊기로 합의하고 군부가 추천한 파루크 귈레르 전 참모총장의 대통령 선출안을 부결시켜버린다. 대신 군부 출신이긴 하지만 비교적 군에서 떠난지 오래됐고, 비주류인 해군 출신이었던 파흐리 코루튀르크를 후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드디어 이뇌뉘를 대신해 에제비트라는 신선한 인물을 내세운 덕분인지 1973년 10월에 열린 총선에서 공화인민당은 선거연패를 끊고 원내 1당 자리에 올랐다. 다만 단독 과반을 확보하진 못했기 때문에 이슬람주의 정당인 민족구국당과 연정을 구성해 드디어 에제비트는 총리직에 올랐다.

하지만 세속주의 중도좌파 정당인 공화인민당과 이슬람주의 성향 보수정당인 민족구국당은 본질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고, 에제비트 총리는 부총리이자 민족구국당 당수인 네지메틴 에르바칸과 첫 집권 기간 내내 갈등할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에르바칸 부총리가 이스탄불 카라쾨이 광장에 있는 아름다운 이스탄불 동상(Güzel İstanbul Heykeli)이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에제비트 총리에게 철거할 것을 요구한 건이 있다. 공화인민당은 세속주의, 민주주의의 입장에서 동상 제거를 거부하려했지만 민족구국당이 연정 와해까지 거론하자 결국 요구를 받아들이고 동상을 이전해야 했다.

이렇게 불안불안하게 유지되던 결국 이 연정은 진보진영 인사를 대거 포함한 일반사면안 발표와 키프로스 분쟁으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에르바칸 부총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에제비트 총리가 일반사면을 강행하고 키프로스 분쟁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면서 민족구국당에서 연정 해소를 선언했고 에제비트 총리는 이를 받아들이고 사임하고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그런데 쉴레이만 데미렐이 이끄는 정의당이 의회 해산을 거부하고 민족구국당, 민족주의행동당, 공화신뢰당과 손잡고 범우파 연정을 구성해 총리직에 올랐다. 이렇게 졸지에 힘겹게 탈환한 정권을 1년도 유지하지 못하고 에제비트 대표와 공화인민당은 제1야당 지위로 돌아왔다.

제1야당 대표로 치른 1977년 총선에서 공화인민당이 득표율을 41.4%까지 끌어올리며 213석을 확보하며 승리했는데, 튀르키예 역사상 좌파 성향 정당이 얻은 최다 득표율인 동시에 1950년 대국민의회 직선제 시작 이후 공화인민당의 역사상 최고 득표율이다. 하지만 공화인민당과 연정 대상이 되는 정당이 없는 상황에서 단독 과반(226석)에도 실패한지라 소수 정부를 구성했으나 오래가기 어려웠고, 결국 데미렐 총리가 이끄는 범우파 연정이 일시적으로 다시 한번 정권을 연장했다.

하지만 이번엔 쉽게 정권을 내줄 생각이 없었던 에제비트 대표는 뒤로 민주당과 범우파 연정에서 이탈한 공화신뢰당과 접촉해 지지를 확보한 뒤 데미렐 총리의 정의당 의원 11명을 설득해 전격적으로 공화인민당으로 입당시키는 대형 사건(귀네슈 모텔 사건)을 일으켜 드디어 내각 구성에 필요한 과반을 확보했고 1978년 1월 신 내각을 출범시키며 정권을 기어이 탈환했다.

하지만 에제비트의 3차 임기는 그야말로 재앙에 가까웠는데 극심해진 민족적·종교적 테러, 엄청난 수준의 물가 상승률, 만연한 파업으로 인해 그야말로 정권은 혼란에 빠졌고 튀르키예 사업가·산업가 협회(TÜSİAD)가 공개적으로 총리를 비판하는 광고를 언론에 내면서 사임을 요구했다.

결국 1979년 10월에 열린 대국민의회 보궐선거에서 5전 5패하자 사임을 선택했고, 데미렐이 다시 한번 민족구국당과 민족주의행동당의 손을 잡고 범우파 연정을 구성했다.

2.3. 케난 에브렌의 쿠데타와 정치 활동 금지

튀르키예의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2] 1980년 9월 12일, 케난 에브렌이 이끄는 세속주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군권을 장악한 뒤 무력으로 쉴레이만 데미렐 총리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후 에브렌은 국가안보평의회(NSC)를 세운 뒤 의장으로 취임해 2년간 국가원수 직을 대행하며 권력을 잡은 뒤 의회를 해산해버렸다.

이때 에제비트 역시 배우자 라흐샨 에제비트와 함께 군부에게 체포되어 겔리볼루에 연금되었다가 겨우 풀려났는데, 대신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다. 이 영향으로 1980년 10월 28일, 공화인민당 대표 직에서도 전격 사임했다. 이때 결국 공화인민당도 정당 활동이 중단되면서 해산당했다.

이후 반군부 활동을 이어갔으나 1981년 4월 이를 이유로 해외출국을 금지당한 뒤 다음해에 투옥되어 3개월간 수감되었고, 이후로도 수시로 군부에 의해 수감당하는 굴욕을 겪었다.

에브렌이 이끄는 군부가 1982년 11월 신 헌법을 제정하면서 에제비트는 데미렐 등과 함께 10년간 정치 활동을 금지당했고, 강제로 야인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그 사이 케난 에브렌은 헌법 특약 조항으로 선거 없이 7년 단임 대통령에 취임해 탄압을 이어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에제비트 전 총리는 1982년부터 배우자 라흐샨 에제비트를 대신 내세워 기존 공화인민당을 대신할 민주좌파당 창당 작업에 나섰다. 결국 1985년 민주좌파당을 창당했는데, 舊 공화인민당 세력 통합 차원으로 창당된 사회민주대중당 합류를 거부하면서 범진보 진영으로부터 큰 비판을 받았다.

2.4. 정치적 재기, 민주좌파당 대표

1987년, 개헌 국민투표가 가결되면서 에제비트의 정치활동 금지도 해제되었고, 같은 해 9월 13일 민주좌파당의 공식 대표로 취임했다. 이때 민주좌파당의 사당화에 반대하면서 젤랄 퀴르콜루(Celal Kürkoğlu) 등이 당내 민주주의를 주장했지만 결국 에제비트가 이끄는 지도부와 반대파들 사이에 법정 분쟁까지 갔다가 반대파들이 탈당해 사회민주대중당으로 가면서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정작 승부처였던 1987년 11월 총선에서 9% 득표율로 봉쇄조항 기준(10%)을 넘지 못하며 참패,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당내에 별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1989년 성공적으로 당대표직에 복귀해 다시 당을 이끌었다.

1991년 총선에서는 사회민주대중당과 범좌파 진영의 주도권을 두고 대결을 펼치게 됐는데, 사회민주대중당에서 민주좌파당을 상대로 사표론을 펼치자 에제비트 대표는 사회민주대중당이 쿠르드계 정당인 인민노동당(HEP)과 연합한 것을 공격했고 결국 이번에는 10%를 넘기는데 성공해 7석을 확보하는데 성공하고 에제비트 본인도 당선되었다.

그리고 1992년 드디어 공화인민당 재창당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는데, 에제비트는 공화인민당의 당수 출신임에도 오히려 공화인민당이 민주좌파당으로 합류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별로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9월 9일 열린 공화인민당 재창당 대회에 초청받았음에도 불참하며 냉담한 모습을 드러냈다.

1995년 총선에서는 민주좌파당 의석을 76석으로 불리면서 좌파 진영 내 1당 자리를 차지했고, 조국당의 연정 제안을 받아들여 메수트 이을마즈 총리 아래서 부총리직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1999년 튀르크방크 스캔들이 터지고 공화인민당이 연정 탈퇴를 선언한 뒤 열린 재신임 투표가 부결되면서 이을마즈 총리가 직에서 물러나자 공화인민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의 신임 공급을 받아 차기 총선까지 이끌 과도정부를 구성하게 되면서 무려 20년만에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그리고 열린 1999년 4월 총선에서 민주좌파당이 136석을 획득하고 원내 1당에 오르게 되면서 에제비트 총리는 1970년대 이후 찾아온 두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됐다. 하지만 재집권 직후 8월 골추크 지진이 터지면서 이를 수습하는데 주력해야했다.

시작부터 위기를 맞았음에도 EU 가입을 위한 경제·인권 문제 개혁에 주력했지만 이 과정에서 연정 정당 간 갈등이 커지고 심지어는 민주좌파당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나면서 빠르게 동력을 상실했다. 거기다 아흐메트 네지데트 세제르 대통령과의 갈등 속에 2001년 IMF 사태까지 터지면서 레임덕을 맞이했다. 이와중에 에제비트 총리는 고령으로 인해 건강 문제까지 생겼다.

결국 정국 장악력을 상실한 상황에서 치러진 2002년 총선에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이끄는 정의개발당에 크게 패하면서 정권을 내려놓고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1] 후일 총리직에 올랐다가 1980년 극좌 성향 무장괴한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2] 앞선 챕터에 기재된 바와 같이 정당들의 이합집산으로 내각이 하루가 멀다하고 무너졌고, 그리고 인한 정국 불안과 정치적 테러, 튀르키예 국민들의 정치 혐오도 극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