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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4:48:54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 폭파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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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배경3. 암살 계획4. 1939년 11월 8일5. 반응6. 이후의 이야기7. 참고 문헌

1. 개요

Attentat im Bürgerbäukeller
(Bürgerbäü-Attentat)

1939년 11월 8일 나치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게오르크 엘저가 숨긴 폭탄에 의해 암살될 뻔한 사건.

2. 배경

1923년 11월 8일 아돌프 히틀러는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바이에른 주정부를 완전 장악하기 위해 뮌헨 폭동을 단행했으나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실패를 전화위복으로 삼아 자신의 이름을 독일 전역에 알렸고 이를 계기로 영향력을 키우더니 1933년 1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총리로 지명되었고 이듬해 총통에 오르면서 정계를 확고히 장악하였다. 이후 나치 정부는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을 일종의 '성지'로 삼고 11월 8일을 '혁명 기념일'로 정하였다. 히틀러는 매년 11월 8일에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 내려가서 '노전사'들을 모아 놓고 연설하고 그들과 친목을 두텁게 다졌다.

파일:게오르크 엘저.jpg

이 무렵 게오르크 엘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고 직장에서 완벽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성실하게 일하는 것만 빼면 흔하디 흔한 목공이었으며 정치에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공산주의 단체에 들어간 적도 있고 1933년까지 독일 공산당에 투표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자기와 같은 노동자들의 형편이 나아지려면 그들을 지지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그랬을 뿐이지, 공산주의 이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조용히 지내는 듯했던 그의 마음 속에는 히틀러와 나치당에 대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그는 나치당 집권 이래 노동자들의 삶이 하루하루 힘들어지는 것과 노동자들이 불만을 함부로 표출하지 못하고 침묵 속에 살아가는 것의 목격자였고 1938년 가을 체코 위기가 불거지자 히틀러가 언젠가 전쟁을 일으킬 거라고 여겼다. 체코 위기는 뮌헨 협정 체결로 인해 해소되었고 국민들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귀속시킨 히틀러에게 열광했지만 그는 히틀러가 조만간 다시 타국의 땅을 차지하려 들 것이고 따라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확신을 품었다. 이에 전쟁을 막고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히틀러를 암살하기로 결의했다.

3. 암살 계획

1938년 11월 초 게오르크는 당 지도자들이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 모인다는 기사를 읽고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갔다. 맥주홀은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 홀이었고 히틀러에 의해 중심 연설 장소로 선정되었다. 게오르크는 지하실의 배치 상황을 메모하면서 보안이 의외로 허술하다는 걸 파악했다. 이는 당시 맥주홀이 경찰이 아니라 당원들에 의해 관리되었고 책임자는 국민들이 히틀러를 맥주홀에서 암살하려고 할 정도로 미워할 리 없다며 방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히틀러가 자리잡을 연단 바로 뒤의 기둥에 시한폭탄을 박아 두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오르크는 무기 생산 공장인 윌든마이어(Waldenmaier)에 저임금으로 취직하여 운송 부서에서 일하면서 퓨즈와 폭파 장치가 생산되는 '특수 부서'를 포함한 여러 곳에 접근했다. 그는 기회를 틈타 110파운드의 고폭탄을 공장 밖으로 밀반출하였고 아파트로 돌아온 뒤 정교한 시한폭탄 설계 작업을 했다. 1939년 4월 초 게오르크는 다시 뮌헨으로 가서 야밤을 틈타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 잠입했다. 그는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스케치도 하였으며, 공간을 줄자로 쟀으며 채석장에서 임시로 일하면서 다이너마이트를 훔칠 수 있었다.

1939년 8월 제2차 세계 대전이 임박할 무렵 게오르크는 장치를 설치하기 위한 마지막 준비에 착수했다. 그는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의 단골 고객이 되었다. 그곳에서 매일 저녁을 먹고 맥주를 주문하고 문을 닫을 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위층에 잠입해 창고에 숨어 있다가 11시 30분 이후에 나와서 일찍이 점찍어 둔 기둥을 파냈다. 그는 이 일을 무척 신중하면서도 느리게 진행했다. 손전등으로 비추면서 나무 외피에 깔끔하게 구멍을 내는 데 사흘 밤을 보냈다. 다음에는 기둥 자체를 파내기 시작했다. 끌로 돌을 치는 소리가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몇 분마다 한 대씩 쳤고 망치를 내리치는 타이밍을 시내 전차가 통과하거나 수세식 소변기가 자동으로 물을 내려갈 때와 일치하도록 맞추었다. 그렇게 야밤 동안 파내다가 동이 트기 전에 바닥에 쌓인 먼지와 부스러기를 깔끔하게 청소하고 쪽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그는 이런 식의 작업을 35일 밤 내내 진행했으며 한 번은 거의 잡힐 뻔한 적도 있었다. 맥주홀 문을 열고 있던 웨이터가 그를 발견하고 매니저에게 말해주러 달려갔다. 게오르크는 왜 여기 있느냐는 질문을 받자 "전 단순히 처음 찾아온 고객일 뿐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커피를 정원에서 마시고 그대로 떠났다.

또 그는 144시간 동안 작동하는 타이머를 개발했다. 이것은 폭발물에 내장된 '라이플 총'의 형태로, 스프링과 웨이트가 내장되어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 폭발을 일으키는 시스템이었다. 게오르크는 안전 장치 역할을 하기 위해 보조 타이머를 추가하였으며 그가 파낸 구멍에 정확히 맞도록 디자인된 상자에 폭탄을 넣었다.

엘저는 히틀러가 맥주홀에서 저녁 8시 30분에 연설을 시작해 약 90분간 연설한 다음 노전사들과 잡담을 나누는 패턴을 보이는 걸 파악하고 이에 따라 밤 9시 20분에 폭탄이 터지도록 설정했다. 여기에 폭탄 시계의 소음을 잠재울 코르크 마개로 구멍을 막았으며 누군가가 기둥을 톡톡 두드렸을 때 텅 빈 소리가 나지 않도록, 또 장식을 한다고 못을 박아서 폭탄이 망가지지 않도록 구멍 안에 함석을 댔다. 이리하여 11월 6일 폭탄 설치를 마쳤고 11월 7일 밤에 다시 찾아와서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그가 기둥에 바짝 귀를 붙이니 초침 소리가 들렸다. 다음날 해가 뜨자마자 게오르크는 뮌헨을 떠나 콘스탄츠로 가서 국경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하려 했다.

4. 1939년 11월 8일

파일:1939년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연설하는 히틀러.jpg

1939년 11월 8일 저녁 매년 그랬던 것처럼 나치당 노전사들이 모여들었다. 사실 히틀러는 당초에 서방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있었던 비상시국이라서 매년 하던 맥주홀 거사 기념 연설을 하지 않고 대신 루돌프 헤스에게 맡기려고 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전날에 마음을 바꿔 뮌헨으로 내려가서 연설하기로 했다. 연설은 보통 8시 30분부터 10시까지 했지만 비상 시국인 만큼 1939년에는 행사 시간을 조금 앞당기고 이틀의 거사 기념 행사도 줄이기로 했다.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 도착하자마자 8시 10분부터 연설을 시작해서 9시 7분에 마쳤다. 그는 냉소적인 톤으로 영국을 비난하였고 열성당원들은 함성을 질렀다. 히틀러는 연설을 마친 뒤에는 노전사들과 담소를 나누곤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급히 맥주홀을 떠나 뮌헨 역으로 가서 9시 31분에 베를린으로 떠났다. 그는 뮌헨으로 왔을 때는 비행기를 타고 갔지만 그날은 안개가 짙게 낀 악천후라서 비행기 뜰 가능성이 적었기에, 기차를 대신 타야 했다. 11월 9일 서방 공격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기로 했기 때문에 그는 뮌헨을 얼른 떠나서 베를린의 총리 관저로 돌아가야 했다.

파일:폭파된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jpg

히틀러가 떠나고 13분이 지난 9시 20분, 연설대 위의 지붕을 받치고 있던 기둥이 게오르크가 설치한 시한폭탄에 날아갔다. 폭탄은 천장과 지붕 일부를 무너뜨렸고 갤러리와 외벽이 무너져 산더미 같은 잔해를 남겼다. 당시 약 120명이 맥주홀에 있었는데, 그 중 7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63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중상자 16명 중 한 사람이 이후 사망했다.

히틀러는 베를린으로 가는 특별열차 전용칸에서 요제프 괴벨스와 함께 교회와의 대결에 관해 논의했는데 그는 이 대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중 급보가 날아들면서 기차가 뉘른베르크에서 멈춰섰다. 히틀러는 처음 보고를 접하자 오보라고 여겼다. 괴벨스는 일기에서 히틀러가 '장난'이라고 생각했다고 적었다. 그러다가 정말로 폭파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괴벨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람은 운이 좋아야 한다. 이제 나는 완전히 안전해졌다! 내가 평소보다 일찍 뷔르거브로이켈러를 떠난 건 신의 섭리가 내가 목표에 도달하기를 원한다는 증거다."

5. 반응

히틀러가 연설차 참석했던 뷔르거브로이켈러 맥주홀에서 폭파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독일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시 프랑스•영국과의 전쟁에 깊은 우려를 품고 쿠데타를 은밀히 꾸미던 독일 군부 인사들도 크게 놀랐다. 그들은 자기들 가운데 누군가, 아니면 불만을 품은 나치당원이나 공산주의자, 성직자 같은 '반동'의 암살 기도가 사전에 발각된 거라고 여겼다. 아프베어의 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의 부하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 육군 대령은 하인리히 힘러의 소행이라고 여기기도 했다.[1]

수사 당국은 곧 암살 기도 배후에 영국 첩보부가 있으며 범인은 한때 나치당원이었다가 히틀러에게 반발하여 뛰쳐나간 오토 슈트라서의 졸개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네덜란드 국경에서 영국 첩보원 R. H. 스티븐스 소령과 S. 페인 베스트 대위를 붙잡았다면서 이러한 해석을 정당화했다. 독일 국민은 당국의 발표를 덮어놓고 믿었고, 영국에 대한 분노가 빗발쳤다. 사람들은 만약 암살이 성공했더라면 내부 혼란이 빚어져 독일의 적들만 이득을 보고, 독일은 전쟁에 져서 베르사유 조약 때보다 더한 결과를 얻었을 거라고 여겼다.

게슈타포는 스위스와의 국경지대에서 체포된 게오르크 엘저를 조사한 뒤 그의 단독 범행이라는 취조 보고서를 히틀러에게 알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감춰두고 이 사건을 선전용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사건에서 사망한 피해자 전원을 순교자로 포장하고 대대적인 추모 행사를 벌였다. 또 1939년 11월 23일 낮 총리 관저에서 사령관들과 국방군 고위장교 200명을 모아놓고 연설할 때 "정치인은 언제 죽을 지 모른다. 나도 최근에 그런 일을 겪었다."고 언급한 뒤 자신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변수로서 나 같은 사람은 유일무이하다. 군인이나 민간인 중 누구도 나를 대신할 사람은 없다. 앞으로도 암살 시도는 되풀이될 것이다. 나는 나의 지력과 결단의 힘을 믿는다. 전쟁은 언제나 적을 절멸시켜야 끝난다. 이걸 외면하는 사람은 무책임한 사람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적에게 유리하다. 지금의 판세는 우리에게 더없이 유리하지만 앞으로는 오로지 내리막이다. 판세가 우리 쪽에 불리해지면 적은 평화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타협은 없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나는 쳐들어갈 지언정 무릎 꿇지 않을 것이다. 제국의 운명이 오직 나한테 달렸다."

이렇듯 히틀러는 게오르크 엘저의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 삼아 자신의 권위를 드높였고 장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랑스 침공을 강행했다. 이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 그치지 않고 전 유럽을 뒤흔들었다.

6. 이후의 이야기

게오르크 엘저는 작센하우젠수용소에 끌려간 뒤 뜻밖에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아마 게오르크의 배후에 국제적 음모가 있다고 여긴 히틀러가 전쟁을 승리로 이끈 뒤 여론 조작을 위한 공개 재판을 벌여서 영국 첩보부에 먹칠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1944년 말에서 1945년 초 다하우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미군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진입하기 일보 직전이었던 1945년 4월 9일에 총살되었다. 향년 42세. 아이러니하게도, 엘저의 체포 및 수사를 주도한 질서경찰 대장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 장군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가담자로 체포돼, 03월 29일 엘저보다 먼저 총살됐다. 엘저 역시 그 소식을 생전에 들었다고 한다.

독일인들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게오르크가 단독으로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걸 믿지 않았고 학자들도 그는 음모의 '간판'으로 내세웠을 뿐이라고 봤다. 심지어 게슈타포가 히틀러가 기적의 사나이라는 걸 국민들에게 과시하기 위해 자작극을 일으킨 것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었다. 게오르크가 혼자서 꾸미고 저질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설득력 있게 논증한 학자는 안톤 호치(Anton Hoch)로, 그는 1969년 'Das Attentat auf Hitler im Muunchener Burgerbraukler 1939(1939년 뮌헨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히틀러 암살 사건)'에서 이 사실을 밝혔다. 그는 이 논문에서 게오르크가 폭탄 공격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그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왜 암살을 결심했는지 자세히 묘사했고 그가 경찰에 진술한 내용의 신빙성까지 확인했다.

2015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13분>(독일어: 엘저)이 개봉했다. 올리버 허쉬비겔(Oliver Hirschbiegel) 감독. #

7. 참고 문헌



[1] 기제비우스는 나중에 단독범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