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18:25:34

부어잉다랑

이 문서는 토막글입니다.

토막글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wiki style="display: inline-flex; vertical-align:middle; margin-right:10px"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word-break:keep-al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3d428b>국가 우산국 · 세라
역사 역사 전반 · 우산국/역사
전투 신라-우산국 전투 · 우산국 여진족 해적의 침입
왕사 우해왕 · 풍미녀
유적 저동리 고분군 · 사동리 고분군 · 천부리 고분군 · 나리 고분군 · 현포리 고분군 · 태하리 고분군 · 당양리 고분군 · 남서리 고분군
인물 토두 · 백길
기타 우산도 · 울도군 · 지증왕 이사부 · 대한제국 칙령 제41호
}}}}}}}}}

1. 개요

夫於仍多郞
생몰년도 미상

고려 시대 울릉도 출신의 인물. 우릉성주(羽陵城主)의 아들이다.

2. 생애

十一月 丙子 羽陵城主遣子夫於仍多郞來, 獻土物.
(1032년 11월 병자일(8일) 우릉성주(羽陵城主)가 아들 부어잉다랑(夫於仍多郞)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쳤다.
고려사

1018년과 1019년 우산국(오늘날 울릉도 우산국 여진족 해적의 침입을 겪으면서 1022년 우산국 주민들은 고려로 피난을 오게 되었는 고려는 우산국 피난민들을 예주(禮州: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으로 안치시켰다.

부어잉다랑은 1032년(덕종 2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토산물을 바쳤다. 그러나 고려 측이 우산국이 아닌 '우릉성'으로 부른 것으로 보아 이 시점에서 우산국은 국력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157년 고려 조정에서 파견한 김유립이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만 남아있는 무인도처럼 묘사된다.